20. 강호초출 江湖初出 1
시간은 물처럼 흘렀다.
긴 겨울이 지나갔다.
어느덧 이월 중순이다. 고원 분지에 풀이 드문드문 올라왔다.
무쌍은 온화한 봄볕에 몸과 마음을 내려놨다. 마른 초지에 누워 뜬구름을 멍하니 본다.
그러다가 풀잎을 꺾어 입에 물었다. 괜히 입이 심심해서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고 지난 석 달 반을 뒤돌아봤다. 많은 일이 있었다.
이매일보와 돌래혈사의 초식을 맛봤다. 특히 이매일보는 완숙해졌다. 잠력까지 빨아먹던 초식이 내공의 일정량을 쓰는 수준에서 제어했다.
이제 몸이 가려는 대로 운신이 가능하다.
이,삼 일에 한 번씩 뭣 빠지게 토끼를 쫓은 결과다. 겨울 내내 이 몸뚱이가 고기를 계속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개산 고원 분지에서 토끼는 천연기념물이 됐다.
귀백무심검은 열두 번째 초식 만성약결滿成若缺까지 능숙하게 펼칠 수 있다. 24개 초식 중 이 열두 초식은 그를 가르친 둘째 형보다 낫다고 자부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혼원일기공에 이르니 입맛이 쓰다.
지난 날 석고창에서 혼원일기공을 수련하던 때가 반복되는 상황이다. 삼청의 기운이 순환해 음양이 조화를 이뤘다.
게다가 봄이 오며 양기가 부쩍 늘었다.
그래도 겨울 동안 혼원일기공이 2성 원만에 이르렀다. 성취라면 성취라 할 수 있다.
2성의 벽을 넘을 준비도 따로 해두었다.
그로인한 목표는 백회혈의 개방이다. 임맥과 독맥 양맥이 교통할 첫 관이 백회이며 달리 두정이라 한다.
또 이 두정의 개방은 단전을 각성시킬 단초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적지독란으로 혈지단을 만들어 뒀다.
“퉤.”
무쌍은 입에 물고 있던 풀을 뱉었다. 혈지단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떠올리니 입으로 쓴 물이 올라와서다.
단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도 중요하지만, 약재를 연단할 용기와 화력도 갖춰야 했다. 그는 이 두 가지를 갖추기 위해 가진 수단을 다 써야 했다.
약탕기를 대신해 향로를 써야 했는데 쉽게 달궈지고 식어버리는 성질 때문에 겨우내 말린 적지독란의 삼 분의 일을 낭비했다. 나중에 점성이 좋은 흰 진흙을 향로 안에 붙이고 구어 내 약탕기 아닌 약탕기를 만들었다.
단약 제조에 있어 화력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초반에는 강력한 화력이, 나중으로 갈수록 은근한 불이 필요하다. 그는 근 한 달을 고생해 송진과 숯을 구하고 만들었다.
그 후로도 적지독란과 방가촌을 오가며 구한 재료를 더해 혈지단을 만들려는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렇게 간신히 만든 혈지단이 열 알에 불과했다. 그것도 그제서야 얻은 수확이다.
“으갸갸.”
무쌍이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혈지단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다. 향공도원으로 발걸음을 잡았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오전까지 두정 개방을 위해 꼬박 하루 동안 쉬었으니 몸과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일체의 방해를 피해 지하폐관동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그런데
“꽥. 꽤애액.”
백자목 위에서 흑원들이 방방 뛰었다.
무쌍은 마지막일지 모를 흑원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놈들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 동굴에서 나왔다.
그가 보기에 당연한 결과다.
식량을 아껴 분배해 먹으면 이것들이 짐승이겠는가?
이놈들이 동굴을 나온 후 고원 분지가 어수선해졌다. 나무를 헤집어 뿌리를 캐서 먹거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을 보면 닥치는 대로 사냥했다.
각자 먹이 본능에 따라 쫓으니 서열이 무너졌다. 어제부터 머리가 반백 우두머리가 흑원 두 마리에게 쫓기며 다퉜다.
무쌍이 보기에 결국 우두머리가 무리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것으로 보였다.
생존의 세계는 어딜 가나 서열이 중요한 것 같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은 법칙이었다.
먹이와 종족 유지 본능이 젊은 흑원들로 하여금 우두머리를 밀어냈다.
반백의 우두머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놈도 전에 우두머리를 쫓아냈거나 죽여 자리를 차지한 놈이라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다 젊은 흑원 하나가 뜻대로 되지 않자 옆에서 걸리적거리는 어린 흑원에게 화풀이를 했다.
젊은 흑원이 어린놈을 잡아 나무아래로 집어던졌다.
괘액.
높이가 삼 장이나 되는 백자목이다. 어린놈이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퍽.
어린 놈이 땅바닥에 쳐박혀 부르르 떨었다. 그때부터 무리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더니 우두머리의 암컷이 고함을 질렀다.
크아악. 괘액.
암컷이 방방 뛰더니 우두머리와 젊은 흑원 두 놈들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다. 암컷이 가세하자 무리가 합세했다. 젊은 흑원 둘은 무리에 쫓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놈이 몰매를 맞아 죽었다.
남은 한 놈은 무리에 쫓겨 숲속으로 달아났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무리에서 가족은 힘이군.”
무쌍이 싸움의 결말을 보며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르르릉.
단근석이 내려와 지하폐관동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됐다.
무쌍은 한기가 왕성한 안쪽에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한 차례운기조식으로 소주천을 끝내고 몸을 점검했다.
여전히 이틀 전과 다름이 없다. 진기는 풍부혈을 통해 뇌간까지 거침이 없다. 이후 뇌로 진입한 진기는 숨뇌를 세수洗隨해야 하는데, 여기서 진전이 없다.
이 숨뇌를 세수하는 것을 농관弄關이라 한다.
하지만 진기는 뇌에서 요지부동하다가 종래에는 승읍혈로 빠져나와 일부는 심장으로 몰려 양기를 끌어올렸고, 일부는 단전으로 가 축기를 했다.
무쌍은 농관을 넘어 백회혈을 뚫어 두정頭頂을 개방하려고 한다. 이는 혼원일기공의 경지가 3성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혈지단을 복용했다.
“윽.”
혈지단은 침에 닿기 무섭게 녹았다. 곧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데 마치 화산을 삼킨 듯하다. 예상치 못한 고통에 신음이 절로 났다.
액체로 위장에 자리 잡고 존재감을 발휘하더니 용암처럼 변했다. 분화구가 폭발하고 지열에 녹아내린 암장이 되어 무쌍의 육체를 잠식하려고 한다.
쓰흡.
무쌍이 놀라 헛바람을 크게 삼켰다.
그러자 얼마지 않아 열기가 한기로 변해 온몸 곳곳으로 퍼졌다.
“크흑.”
신음이 터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당연하다. 운수행의 이연태가 진맥하고 처방한 때와 지금의 몸 상태를 간과하고 혈지단을 복용한 결과다.
이의원이 진맥할 당시는 양기가 승하여 숨만 쉬어도 양기가 심장에 쌓였다. 지금은 태행산맥의 한기를 육음맥으로 돌려 양기를 눌렀고, 또 이매일보를 수련하며 원기가 소진되어 음양이 균형을 맞춰가는 시점이다.
무쌍은 온몸을 내달리는 한기에 바닥을 기었다. 떨리는 그의 입에서 흰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학. 학.”
양손으로 어깨를 비볐다. 그런다고 가라앉을 한기가 아니었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풀었던 가부좌를 다시 잡았다. 농관은 고사하고 얼어 죽게 생겼다.
운기를 통해 한기를 몰아내려고 한다.
단전의 진기를 회음으로 이끌었다. 그 순간 온몸으로 퍼져있던 혈지단의 기운이 단전으로 몰려왔다.
붉은 송충이 같던 진기가 명문혈을 지나면서 덩치를 불리더니 푸른 뱀으로 변했다. 그리고 풍부혈까지는 일순간이었다.
쾅.
뇌간으로 푸른 뱀이 들어서며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좁았던 뇌간의 터가 활짝 열렸다.
짜르르.
그리고 머리가 얼음 속에 파묻혀 뇌만 서서히 결빙되는 고통이 찾아왔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감각에 정신이 멍해졌다. 이것도 잠시 얼음이 목부터 시작해 가슴으로 내려왔다.
무쌍의 상체에 무서리가 자리했다.
“커흑.”
가부좌가 절로 풀렸다.
무쌍은 너무 고통스러워 땅바닥을 긁었다. 손톱이 깨지며 피가 흘렀다.
그러길 일각.
그는 통증을 견뎌낼 수 없어 아예 드러누웠다. 호흡이라도 편히 갖고 안정을 찾으려 한다.
날숨에 결을 맞춰 혼원일기공의 요상결을 시도했다.
스흡. 스흡.
단전에 힘을 주고 호흡을 골랐다. 그러며 통증을 이겨내려 손바닥을 땅에 붙여 골반을 밀었다. 조금이라도 호흡에 탄력을 받으려는 동작이다.
입으로 숨을 들이쉬고 툭툭 뱉었다. 그러며 진기를 수소음경과 족태음경의 배유혈들로 이끌었다.
이 동작을 몇 차례 반복했다. 손과 발 끝에 먹먹함이 사라지고 온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혼원일기공의 요상결이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땅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손가락이 석실 바닥에 각인한 글자들을 읽고 이것을 따랐다.
무쌍은 억지로 몸을 뒤집어 바닥을 쓸었다. 먼지가 쌓여 감춰졌던 글자들이 드러났다.
현허칠성 요기. 玄虛七星 療氣.
주화입마나 내상을 입었을 때 운기하는 요상결이었다.
무쌍은 눈과 손가락 끝으로 요상결을 빠르게 확인했다. 혼원일기공의 요상결과 일치하는 구결이 반절이 넘는다. 차이점이 있다면 현허칠성 요기는 주화입마에 치중한 요상결이다.
무당파의 현허칠성신공 중 일부분으로 추정됐다. 현무가 폐관하며 남겼으리라.
아직도 숨이 넘어갈 듯한 한기는 여전하다. 무쌍은 다시 드러누워 현허칠성 요기를 따랐다.
반 시진이 지나자 무쌍은 가부좌를 틀었다.
요상결은 혼원일기공으로 바뀌었다. 단전으로 모여든 음기는 삼청의 순환으로 옥청에서 태청으로, 태청은 상청을 돌며 음양의 균형이 맞춰졌다. 이것도 경계가 무너지며 음양이 없는 혼원으로 일기가 됐다.
푸른 뱀이 붉은 뱀으로 변해 뇌간으로 서서히 밀고 갔다. 활짝 열린 뇌간腦幹의 터를 지난 진기는 숨뇌를 감쌌다.
이 순간 무쌍의 정신은 나我도 타他도 없다. 무념무상이 이어지며 두정이 열리며 폐관동의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백회혈이 충규가 되며 전정혈까지 진기가 내려왔다.
“후우.”
세 시진이 지나고 무쌍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눈에 희열이 떠올랐다.
혼원일기공이 3성에 다다랐다. 단전의 내공은 붉은 뱀이 경락을 지배하는 적사등赤蛇登에 올랐다.
이로써 무쌍은 내공만 따졌을 때 이류의 경지로, 그의 나이 비해 빠른 성취를 거뒀다.
물론 삼청 중 옥청의 기운은 혼원으로 순환해 양기가 만만하지 않게 됐다.
무쌍의 얼굴에 미소가 맴돌았다. 뜻밖의 입산수련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무쌍은 향공도원을 떠나며 방가구를 찾았다.
그는 겨울 동안 다람쥐가 곡간 드나들 듯, 동촌여관을 여섯 번이나 들러 수수를 품었다.
그러다가 보니 주인이 연씨고 사냥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몸이 불편한 것도 알았다. 수수가 팔려간 이유이기도 했다.
“수수 있습니끼?”
“하리로 내놓은 논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임주현에서 왔어. 다관에서 그들을 만나고 있네. 그나저나 떠나려는 것인가?”
동춘여곽의 주인 연씨는 대답을 하며 무쌍을 살폈다. 무쌍은 말끔한 금사금의의 경장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무쌍을 보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연씨 아저씨”
“수수가 슬퍼 하겠군.”
“강한 사람입니다.”
“배가 불러오는데 무책임하군.”
”몇 달 후 진주 언가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그들이 몇 명이 될지 모르나 여기에 상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쌍은 향공도원의 옥림지를 방치하기가 아까웠다.
옥림식재를 비롯한 세 권의 책과 삼왕정蔘王精 한 채를 서신과 같이 표국을 통해 세가로 보내면 옥림지는 가문이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이만한 동천복지洞天福地도 찾기 힘들다.
“언가 사람이었던가?”
“네. 그들에게 말해놓을 테니 아이가 태어나면 수수와 같이 언가로 보내십시오. 섭섭하지 않게 대우해 줄 것입니다.”
“내. 딸년에게 말을 하겠네만, 간다는 장담은 못 하겠네. 사람에게 데인 터라.”
“......, 뜻이 그렇다면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무쌍이 고심 끝에 답했다. 그리고 품에서 종이로 포장한 꾸러미를 내놨다.
“뭔가?”
“응향밀凝香密입니다.”
“처음 듣는 것이네만.”
“사삼沙蔘 중 수백 년을 묵으면 노두가 커져 안에 물이 고입니다. 이것이 다시 시간이 흘러 섞지 않고 굳으면 이를 응향밀이라 합니다.”
“이걸 왜?”
“대처에 나가서 팔면 은 이백 냥은 받을 겁니다. 나중에 언가에서 사람이 오면 그들과 동행하고요.”
“고맙네. 그런데 수수를 만나지 않고 가려는가? 조금 있으면 돌아올 텐데.”
“그냥 가겠습니다. 수수를 만나면 오늘 못 갈 것 같군요.”
무쌍은 연씨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휑하니 돌아서서 여관을 나섰다.
연씨는 손을 들어 무쌍을 말리려다가 말았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그가 말은 이리해도 딸 수수에게 어떻게 말할지 걱정부터 들었다.
- 작가의말
- 글쓴이 덕민입니다.
재미있게 글을 읽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는 하루 1편씩 글이 올라갑니다.좋은 하루 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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