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이정기열전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S수미르
그림/삽화
S수미르
작품등록일 :
2024.07.26 21:26
최근연재일 :
2024.09.0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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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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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2. 지나간 역사, 묻힌 역사, 잊혀진 역사.

DUMMY

제2화 (지나간 역사, 묻힌 역사, 잊혀진 역사)




이강호, 아니 이사도(李師道)는 문밖을 향해 외쳤다.


“거기 판석이 있는가?”


즉각 고개부터 들이미는 사내.


“예. 도련님. 부르셨습니까요?”


“잠시 들어오게.”


“예. 그리합죠.”


사내가 하는 행동으로 보아 친밀한 사이다. 분명히 사내가 그랬다. 자신은 하나밖에 없는 수하라고.


이정기의 둘째 손자에게 수하가 하나 뿐? 아무리 서자라도 말이 안 된다.


“할아버지가 부절도사라고?”


“······.”


“왜 말이 없는가? 내가 두창 때문에 정신이 좀 혼미해서 그러니 소상히 대답하게나.”


“그렇습죠. 이정기 부절도사 장군.”


“절도사는 후희일 대인이겠군. 그런가?”


“···네. 그도 맞습니다요.”


“혹시 후희일 절도사와 할아버님이 독대한 채 연회를 연 적이 있는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안 그래도 오늘 저녁. 절도사가 큰 나리를 청했다고 하던데요? 난데없이 연회를 연다고 통보가 와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마다 절도사가 돌았나 생각하던 중입죠.”


제기랄, 그렇네. 딱 그 날이다.


하필이면 할아버지 이정기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때. 무엇보다 조금 있으면··· 상당히 곤란지경에 빠지는 그 날.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나?”


“나리는 군막에 계시죠.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요?”


“집에는?”


“아버지 이납 어른은 다른 성에 부임해서 청주성을 떠난 지 오래 되었고, 집에는 대부인과 이사고 대 공자님, 이렇게 있습죠.”


“내 어머니는?”


“하이고, 활선당. 이 돌팔이 새끼들, 분명히 약을 과하게 썼네.”


“······?”


“돌아가신 작은 마님은 왜 찾으십니까? 공자님 낳고 바로 세상 뜨신 불쌍한 분을 말입니다.”


“······!”


이건 몰랐다.


“집안에 일하는 가솔은 몇 명인가?”


“뭐··· 세어볼 필요도 없습죠. 다섯 명 밖에 안 됩니다요.”


“명색이 부절도사 집인데··· 겨우 다섯?”


“네. 워낙 큰 나리께서 담백한 성품 아닙니까요. 삼시세끼 모두 군막에서 병사들과 같이 먹는 터라··· 덕분에 대부인이 손수 요리를 하는 지경입죠.”


그랬어?


이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이정기 장군의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그 역사서는 온통 당나라 것들이다.


구당서(舊唐書).


당서(唐書).


통전(通典).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귀(冊府元龜).


이외에도 너무 많은 당나라 역사서에 이정기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특히 구당서는 ‘이정기 열전’ 항목을 따로 떼 내어 이정기와 그 후손 이납, 이사고, 이사도의 행적을 다 기록해 놓을 정도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정기는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타고난 신력과 일당 백의 능력을 가졌으나 평생 수하 장수, 병졸들과 함께 뒹굴며 전장을 누볐다.


하급 병졸들이 먹는 것과 다르지 않은 빈약한 식사를 들고 스스럼없이 군사들 틈에서 먹는 걸 즐겼다. 이러니 밑의 장령들과 초급 장수들까지 따라할 수밖에.


이런 이정기의 솔선수범한 행동은 전통처럼,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다.


“우리 평로치청 번진에 고구려 출신은 대충 얼마나 되나?”


평로치청 번진(平盧淄靑 藩鎭).


하남 지역의 거점 도시인 임치와 청주를 관할하던 군벌을 이리 불렀다.


평로는 요서지방을 뜻한다. 현대 사회에서 산동성에 해당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지명이 없었다.


번진이라 함은 절도사가 지배하는 지방 조직, 그리고 절도사는 현대 한국 사회로 따지면 도지사에 해당한다.


“큰 나리께서 이만 대군을 끌고 청주로 내려온 이래 지금 군세가 삼만, 거의 절반은 고구려 출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요.”


“총 삼만 군세. 그리고 절반이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이 말인 게지?”


“예, 그러합죠.”


만만치 않은 병력이다.

삼국지연의 같은 책에서 뻑 하면 백만 대군이 어떻고 저떻고 하지만, 다 허구요. 과장이 태반이다.


만 명의 군사만 되어도 지금 시절이라면 대군이다. 그런데 삼만 군세라.


“지금 당나라는 9대 덕종, 이괄 황제겠군.”


“···공자님. 소인은 까막눈이라서.”


“하하하, 알았네. 겨우 세상 돌아가는 걸 깨달았어. 자네 덕분일세.”


대충 지금이 어떤 시절인지 판석이를 통해 감 잡았다.


***


당나라는 신라와 한 편을 먹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기까지.


수와 당은 정말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붙을 때마다 처참히 깨진 과거의 악몽 때문이다.


그래서 당은 고구려를 멸한 뒤 이십 만에 달하는 고구려 사람, 특히 건강한 남자들을 자기들 땅 구석 구석으로 이주시켰다.


영주(營州, 현대의 요령성 조양시)도 이런 곳 중 하나였다.


영주에 억지로 끌려와 옹기종기 살고 있던 고구려인들. 무슨 희망이 있을까. 자신들이 선택한 삶도 아닌데 노예처럼 살고 있으니.


이런 환경에서 이들이 가장 선호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군(軍)이었다.


그나마 나라 잃은 유민이 맨몸으로 입에 풀칠하고 또 출세하기 괜찮은 직군이 군대였던 것이다.


당나라를 항시 위협하는 발해의 대조영도 여기 영주 출신이다.


이정기 역시 영주에서 유민들을 모아 당나라에 투신했다.


이정기는 당나라를 흔든 가장 큰 사건, 안록산의 난을 기회로 활용하여 대군을 이끌고 몇 번의 전투에 참전했다. 그 능력을 인정받은 뒤 모두를 이끌고 여기 청주(靑州)에 자리 잡았다.


그게 평로치청 번진이다.


그런데 왜?


번진의 주인, 절도사는 이정기가 아닌 다른 사람일까?


이정기의 담백한 성격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고모의 아들, 고종사촌 형인 후희일에게 절도사 자리를 양보하고 부절도사로 남았다.


그는 일신의 직위나 명예보다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 땅에서 천대 받지 않고 잘살기만 바랐던 것이다.


반대로 절도사가 된 후희일은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이정기의 이런 성격을 이용해 절도사 자리를 꿰찬 뒤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항상 불안한 법이다.


자기 손으로 뭐 하나 이룬 것 없이 사촌 동생의 양보 덕에 차지한 자리 아닌가. 이건 신기루와 같다는 것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후희일은 심복지환인 이정기를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강호. 아니, 이사도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뵈어야겠네.”


“에?”


“뭐가 그리 놀랄 일인가? 손자가 할아버지를 뵙겠다는데.”


“예?”


“어허, 앞장 서시게. 할아버지가 계신 군막으로 가야겠어.”


“헤에··· 이 활선당 개자식들. 진짜 약을 독하게 썼네.”


아까부터 이 께름칙한 반응은 뭐냐?


“판석이 자네, 왜 그러나?”


“도련님, 누우세요. 병이 더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요.”


“병? 두창은 다 나았다니까?”


“글쎄. 원래부터 골골했던 도련님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소인은 도통 모르겠는···걸요?”


그랬나?


말로 미루어 짐작컨데 내 몸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성격도 보통 심약한 게 아니었구나.


어떻게 살아온 거냐? 이사도.


하긴···


며칠 동안 훑어본 내 몸 꼬라지가 너무 형편없기는 하다.


마치 꼬챙이처럼 바짝 마른 신체, 키만 껑충하다.


“이제부터 달리 살기로 했네. 그러니 할아버지를 뵈러 가세.”


나는 거듭 재촉했다.


곧 일어날 일, 이건 막아야 한다. 마음이 급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대부인 마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뎁쇼?”


“그게 무슨 말인가?”


“큰 나리께서 집안일은 다 큰 며느님, 그러니까 대부인께 맡겼다··· 이런 말입죠.”


이정기의 큰 며느리, 대부인이라면··· 아버지 이납의 정실부인이고 자신에게는 큰 어머니다. 그런데 손자가 할아버지를 보는 것조차 큰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하나?


“나를······ 썩 반기지 않는 모양이군. 그런가?”


“네. 반기지 않는 정도라면 다행입죠.”


“허어.”


심각하네. 이사도가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었구나.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홀로 되었으니 얼마나 눈칫밥을 먹었을까?


더군다나 고구려는 철저한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렇기에 본부인 소생이 아닌 서자는 철저히 외면 받았다.


그때 문이 왈칵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거침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무언가를 들고.


“어이, 우리 꼬맹이. 좀 나았냐?”


“···.”


“하하하, 맹한 표정은 여전하구나. 이 형이 노루를 한 마리 잡았다. 이거 먹어라.”


쑥 내미는 건, 설익은 노루 뒷다리.


노린내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판석아.”


“넵, 큰 공자님.”


“거기 탁자, 이리 당겨라. 괜히 비단 이불에 기름 튀면 또 어머니 역정 내신다.”


누군지 몰라 멍하게 바라보다가 대화를 듣고 겨우 알아차렸다.


그런데···


저게 13살이라고?


바로 위의 배 다른 형제, 이사고(李師古)라는 건 알았지만,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과장하면 황소 같고, 조금 순화시켜 보아도··· 제기랄, 산적 같은 저 덩치. 아무리 10살 넘으면 장가를 보내는 세상이라지만, 무슨 이스트를 넣어 부풀린 빵도 아닌데.


13살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엄청난 덩치다.


“혀, 형님.”


“오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이리 비실비실하니··· 에이, 식기 전에 먹어라. 몸통하고 다른 다리는 가솔들에게 주고 이거 하나 남았다.”


“아직··· 핏기가··· 남았는데요?”


“새끼야. 이때가 제일 부드럽고 맛있어. 걍 먹어.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말끝에 담긴 진심.


저 험상궂은 얼굴에 깃든 걱정. 핏줄이기에 느껴지는 그런... 애틋함.


코끝이 찡했다.


현대에서도 이강호는 고아였다. 이런 진심어린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너무 크냐? 오냐, 이 형이 잘라주마.”


행동에 거침이 없다. 허리 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더니 노루 다리를 슴벙슴벙 썰어서 탁자 위에 늘어 놓는다.


칼을 놀리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 소를 통째로 해체하는 발골 장인 못지 않다.


“헤헤헤, 큰 공자님. 소인도 한 젓가락?”


“오냐, 판석이 너도 배 터지게 먹어라. 저 골골한 동생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다.”


“예, 오랜만에 고기를 먹게 됩니다요. 헤헤.”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


평소에도 판석이를 저런 식으로 대해왔다는 증거다. 저 정도면... 꽤나 괜찮은 사내다.


얼굴 빼고.


“으하하하. 그 표정은 뭐냐? 어여 먹어. 모름지기 사내란 반듯한 얼굴, 우람한 신체, 그리고 발기찬 하체, 이게 합쳐져야 한다. 너는... 에이, 그 기집애 같은 얼굴에 마른 북어처럼 비틀어진 몸, 또 하체. 음, 그거··· 아침에 서긴 서냐?”


아. 이 양반아.


나 아홉 살이라고.


억지로 몇 점 먹었다. 덜 익은 노루 뒷다리는 노린내로 역겨웠지만... 이사고의 마음이 양념으로 버물어진 고기였다.


우물우물 씹어 넘겼다.


살짝 목이 메었다.


“이 자식아. 일어났으면 이 형에게 제일 먼저 달려왔어야지. 걱정했잖아.”


“...네. 안 그래도 두루두루 인사할 생각이었습니다.”


“밖에서 들었다. 할아버지는 왜?”


“그냥. 제일 큰 어른에게 먼저 인사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요.”


“흠... 우리 꼬맹이가 제법 철이 들었네. 장가 보내도 되겠다.”


팡팡-


“윽!”


이건 좋다고 손바닥으로 때리는 게 아니라 몽둥이로 후려 치는 것 같다.


정말 타고난 힘, 열세 살이라고 도저히 믿기 힘든 완력이다.


현대 사회에서 열세 살이면... 초6? 중 1? 에휴, 비교 자체가 안된다.


저건 헬스로 다듬을 수 없는 육신이다. 그냥 울퉁불퉁, 한 마디로 미친 들소 같은 몸이다.


“오냐, 나랑 같이 병영으로 가자.”


“네...? 큰 어머니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자식, 내가 명색이 가문의 대 공자다. 어머니께는 따로 말씀드리마, 벌떡 일어나라.”


아직 큰어머니를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판석의 말에 의하면 꽤 심하게 나를 미워하는 모양인데, 형은...... 아니었다.


“돌아가신 작은 어머니. 이렇게 말하긴 그렇다만, 이 형은 그분의 품에서 컸지 않냐. 비록 너를 낳고 바로 가셨지만··· 지금도 형은 그분의 품이 그립구나.”


“······.”


“뭐든 어려운 게 있으면 형에게 말해라. 별도 따주마.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친혈육이니라.”


이 사내.


은근 찡하다.


나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내 어머니에게 진한 정을 받아서인지 남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수월하게 할아버지 이정기 장군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


군막은 상상 이상으로 옹색했다.

적어도 삼만 군사를 지휘하는 부절도사의 군막으로 보기 힘들 정도다.


군막을 감싸고 있는 천은 너덜거렸고, 입구에 걸린 지휘관 깃발도 실밥이 터진 상태로 때와 피에 얼룩져 있었다.


황량한 겨울 바람이 낡은 군막으로 들이쳤다. 군막이 펄럭이며 안에 있던 장년의 사내가 언뜻 보였다.


삼국지 소설에서 보던... 미염공으로 불리던 관우가 저런 모습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긴 수염.


걸치고 있는 묵직한 갑옷.


두 손으로 짚고 있는 거대한 환두대도(環頭大刀).


눈빛이 얼음장처럼 서늘하다.


이정기(李正己)다.


주위에 늘어선 무장들은 이 사내의 기에 눌려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었다.


“부관 장령, 얼마 전 잡은 소들. 미리 맛있는 부분을 빼돌린 자가 있었다. 알고 있는가?”


“대장군, 고거이......”


“변명이 필요한 일인가?”


“그게 아니오라, 사정이 조금 있었다 들었슴메다.”


“그 사정 듣고 싶지 않다.”


누군가 군사들에게 배급되어야 할 소를 잡으면서 일부 빼돌린 모양이다. 이를 알아버린 이정기가 추궁하자 익히 속사정을 아는 부관이 해명하는 중이었다.


“처녀가 애를 가져도 할 말이 있는 법, 일일이 그런 사정을 다 헤아리면 추상같은 군령이 먹히지 않게 되고, 군의 사기도 떨어진다. 모르는가?”


“대장군, 하오나 이번 일은 좀 그렇습메다. 소장이 알아서 처결할 거이니 모른 척 넘어가줍소.”


“불가! 절대 불가하다. 그 일을 저지른 보급관은 책임을 물어 퇴출한다. 그동안 맡은 직분을 성실히 이행한 공으로 목은 자르지 않되, 더 이상 군직에 둘 수는 없다.”


“장군, 보급관은 사욕을 채운 거이 아님둥. 지난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 가족들에게 조금 나눠준 것 뿐, 어찌 이 사정을 모른 척 벌한단 말임네까?”


“그것도 엄연히 죄다.”


밖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이사고와 이사도도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차마 군막을 열고 들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크흐흑, 대장군!”


“내가 부관의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군령은 추상같고, 결코 사사로운 감정을 넣어선 안 되는 일, 바로 시행하라.”


지휘관으로서 당연한 처분이다. 하지만 너무 비정한 처결이다.


보급관이 군의 재산을 일부 빼돌린 건 맞지만, 이의 사용처가 전사한 병사 가족에게 사용했다면... 사정을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그때, 반대쪽 군막의 천이 열리며 군관 한 명이 덥썩 무릎을 꿇더니 외쳤다.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장군, 소장의 죄를 백 번 인정하옵니다. 그리고 비록 군을 떠나도 새로 맡은 소임, 목숨 바쳐 이행하겠나이다.”


갑자기 등장해 외치는 사내가 바로 보급관인 모양이다. 그를 위해 구명에 나섰던 부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동무, 그게 무슨 말임메? 새로 맡은 소임이라니?”


“부관 장령, 소관에게 장군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이제 소관은 전사한 병사와 중한 상처를 입은 병사 가족을 보살피는 새 임무를 맡았사옵니다.”


“엥?”


“이를 위해 상당한 자금을 내어 놓으신 대장군께... 크흑, 감사한 마음 금할 수 없어 급히 달려온 길이외다.”


“아, 아, 아. 그랬슴둥?”


부관의 눈에 습막이 서렸다. 그와 보급관 역시 영주 출신으로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


“장군, 어찌 저에게 말 한마디 없이 이리 함메? 저번 전투로 얻은 재물을 또 몽땅 내놓으신 겝네까?”


“험, 커험. 재물은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법, 내 명령 하나에 싸우다 죽은 병사들 아닌가? 그들을 위로하는 건 장수 된 자의 도리일세. 개의치 마시게.”


멋진 마음가짐이다.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걸 군령권을 가진 대장군이 먼저 행했다.


엄중한 군령도 지키고, 현대 한국으로 치자면 보훈처를 세운 셈이다. 이걸 측은지심이 넘치는 보급관에게 맡겨 병사 가족을 보살피게 한 것이다.


저런 장군과 같이 싸우는데 누가 목숨을 아낄까?


이사도는 왜 이정기 군대가 최강 정예였는지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저런 분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묻혔다는 게 안타까웠다.


한편으로 이제 내 할아버지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잘 해결된 것 같구나. 우리, 들어가서 인사드리자.”


“네. 형님. 그러시지요.”


“그런데 너, 많이 달라 보인다. 전에 내가 알던 비실비실한 사도가 아닌 것 같아.”


“아까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뒤늦게 철이 든 모양입니다.”


“괜찮겠냐? 너, 전에는 할아버님 앞에 서면 늘 주눅 들어서 쥐구멍만 파던 놈이.”


“......”


그랬나? 이사도의 허약한 체질과 심성이 그랬단 말이지.


하지만, 달라. 나는 이사도면서 또 이강호거든.


오늘 꼭 이정기 장군을 만나 전할 말이 있단 말이다.





------------

당나라의 한국인 황제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99 푸른평원
    작성일
    24.08.11 20:30
    No. 1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청은이
    작성일
    24.08.18 19:30
    No. 2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5 악지유
    작성일
    24.08.21 19:53
    No. 3

    삼국지에 설핏하면 백만 대군이니 팔십만 대군이니
    하는거 모두 뻥일거라고 오래전 부터 주장하던
    1인데 본문에 그런 내용이 나오니 후련합니다. ^^

    도로도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더 그 시대에
    백만 대군이 어떻게 이동을 하고, 야영을 하며
    취사를 했겠는지 정말 노답.

    좁은 도로나 산길을 백만 대군이 이동을 한다면
    그 길이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대장의 지휘,
    즉 명령이 모두에게 하달이 가능할까요?

    솔직히 백만대군이 아니라 십만 대군도
    제대로 지휘통솔이 쉽지않았을 겁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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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 쿠데타로 추대 된 절도사 3. +3 24.08.08 841 3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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