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내부 정리부터 하고 가자.
제26화 (내부 정리부터 하고 가자)
청주성 내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는 옥 대인.
대상이다. 번진에서 생산되는 모든 명주(비단)가 그의 손을 거쳐서 풀린다.
“만금상단에서 왜 연락이 뜸한 지 모르겠네.”
“상단주 어른, 소문에는 비계 덩어리의 수하 몇이 목격되었다 합니다.”
“여기, 청주성에서?”
“그러합니다. 밀복을 했지만, 상당 수로 보입니다. 특히 호위대를 맡고 있는 밀객도 잠시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합니다.”
“그 돼지새끼가 청주성에 있으면서 나를 보러 오지 않는다?”
“···아직 왕 행수를 직접 본 것은 아니온지라 십 할 자신은 못하겠지만 거의 확실합니다.”
“그렇겠지. 가뜩이나 제 몸 아깝게 생각하는 놈,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게야. 그래도 그를 호위하는 밀객들이 목격되었다 이거지... 요상한 일이다.”
“접촉해 볼까요?”
“아서라. 밀객들이 입을 열겠나? 사연이 있겠지. 곧 그 출렁이는 살을 흔들며 나타날 게야.”
옥 대인은 항주산 용정차로 목을 축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해는 된다.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귀물, 석류황의 유통을 만금상단에서 독점하고 있다. 그 석류황이라는 천하의 귀물을 못난이 서자, 이사도가 뒤켠에서 만들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쉽군, 바로 코앞에서 그런 귀물이 등장한 걸 놓쳤어. 만금을 벌 기회를 못 잡은 거야. 그러고보면 그 뚱땡이가 촉은 빨라.”
“네. 만금상단은 전에도 대륙 최고였지만, 이번 석류황 유통을 독점하면서 천상계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겠지. 지방의 상단들이 석류황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면 다른 물건까지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야 하니까. 안 팔려서 재고로 남아 있던 물건들을 싹 털어냈겠다. 돼지새끼, 노가 났어. 배가 아프군.”
“그나저나 요즘 여기 청주뿐 아니라 번진 전체가 시끌벅적합니다.”
“그래? 나는 금시초문인데?”
“상단주 어른, 아닙니다. 군사들 훈련이 부쩍 거칠어졌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병장기들이 바리바리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갑옷과 각반, 토시까지 섞여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설마, 전쟁이라도 일어난다, 그 말인가?”
“소인의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어디를 겨냥하는 지 몰라도 전쟁 냄새가 진하게 납니다.”
“아닐 걸세. 안녹산과 사조의의 난을 겪은 후 천하는 태평한 세월을 보내고 있어. 고선지 대장군이 서역을 토벌하는 게 전부였네. 안타깝게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말았지만 말일세.”
“하여튼 동태를 예의주시하겠습니다.”
“그래, 나가보게. 나는 오수나 즐겨야겠어. 간 밤에 새로 들인 첩년에게 시달렸더니 졸리는구먼.”
행수가 이마를 탁 치며 뒷걸음질로 옥 대인의 방을 나섰다.
그러자 지금까지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옥 대인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바뀌었다.
“확실하다. 목표는 우리 번진이야. 이미 상당수 병력이 덕주와 경계에 있는 역성으로 옮겼다.”
그는 즉시 서탁을 당겼다. 그리고 바로 작은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를 써넣기 시작했다. 전서구 다리에 매달 비밀 편지다. 청주성에서 위덕 번진의 절도사부가 있는 덕주까지 전서구로 한 시진이면 도착한다. 두 번진은 같은 발해만을 끼고 있다.
그 순간.
상점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콰앙-
그리고 내실의 대문이 부숴지면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모두 창과 칼을 견착하고 있었다. 기세가 흉흉했다.
“······!”
옥 대인은 쓰고 있던 작은 종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었다.
하지만 곧이어 날아온 창대에 가격 당하고 서탁에 엎어졌다. 그의 얼굴을 발로 짓밟은 채 입에 손을 넣어 강제로 씹던 종이를 꺼내는 무장이 보였다. 얼음처럼 싸늘한 표정이었다.
“이 간자새끼. 어디 감히 수작질을. 조금만 늦어도 큰일날 뻔 했구나.”
“컥, 커억. 왜 이러는 게요?”
옥 대인이 허우적거리며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옥 대인은 까무룩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네가 스물 두 번째다. 뇌옥에 가면 여러 곳에서 모인 놈들 볼 수 있을 게야. 거기서 단합대회라도 하거라. 이 더러운 간자 새끼야.”
***
.
구 노인은 성내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항상 꾸벅꾸벅 졸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를 향해 혼수서귀(昏睡書鬼)라 불렀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서생 한 두 명이 방문할 뿐, 한산한 서점. 굶어 죽지 않는 게 용하다며 주변 상인들이 혀를 차는 지경이었다.
그 서점으로 일단의 병사들이 들어섰다. 졸고 있던 구 노인은 다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반겼다.
“아이고, 웬일로 병사들께서 서점에 다 오셨을까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네. 흘흘흘.”
병사들을 인솔한 군관이 그런 구 노인에게 냉랭한 말을 내 뱉었다.
“나이를 감안해 포박은 하지 않겠다. 냉큼 나서라.”
“···어딜 가자는 말입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듯 험한 말을 하는 거요?”
“그래? 꼭 매를 벌겠다 이말이렸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도 빼지 않은 칼집이 구 노인의 배를 사정없이 찔렀다.
“컥, 아이고 사람 잡는다. 내 평소에 잘못한 게 없거늘, 왜 힘없는 노부를 패는 것이오?”
“너, 고추 있냐?”
“······!”
“없지. 당연히 없을 수밖에. 네가 오늘 새벽 인편에 내 보냈던 밀서, 뇌옥에 가면 보여주마. 황제의 개, 태감부 환밀처에서 침투시킨 간자 놈아.”
“어, 어떻···게?”
“그건 네가 알고 있는 걸 다 토설하고 북망산에 가면 자연히 알게 될 터, 너무 궁금해 하지 말거라."
"......"
"이 수염 없는 환관 놈을 즉각 포박하라.”
“옙, 알겠습니다.”
“내가 사정을 봐줬는데 스스로 거부한 놈이다. 고통스럽게 단단히 묶어라.”
구 노인의 표정이 납 색으로 변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죽은 목숨인 것이다.
***
“억울하오.”
“그래그래. 다 이해한다. 여기서 입 아프게 떠들지 말고 뇌옥에 가서 밝히면 안 되겠냐?”
“조위(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포도 대장) 나리. 지금껏 상납한 돈이 얼마인데 이렇게 박절히 대하는 게요?”
“응. 고마워. 그동안 잘 받아 먹었다. 그렇다고 봐줄 수는 없잖아. 이 원수 신라 새끼야.”
“헛!”
“놀랐지? 나도 말이야. 우리 증조부께서 너희 배신자 나당 연합군하고 싸우다 돌아가셨어. 네가 신라에서 보낸 간자라는 걸 알았으면 진즉에 모가지를 땄을 거다. 개자식아.”
조위의 말을 들은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다 들통난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나 혼자 죽지는 않을 게요. 당신의 치부를 다 까발려 버릴 테다.”
“해. 하라고. 내가 먼저 상부에 다 고하고 왔다. 그리고 이번 출정에 제일 선두병으로 보내달라 자청했거든. 언젠가 너희 신라 땅을 점령하고 모조리 쳐 죽일 날만 기다렸는데 이번 전쟁에서 먼저 죽을 생각하니 조금 억울하기는 해.”
사내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장수라면 말도 통하지 않겠지만, 적당히 타락한 조위다. 매일 서로 속살을 본 사이니 어쩌면 통하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이다.
“강 조위, 놓아주시오. 그동안 모은 재산, 다 놓고 가리다.”
“응, 안 돼. 어차피 나는 곧 죽을 거야. 쓰지도 못할 재산 있으면 뭐하나. 나 아직 홀몸이야.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저잣거리에서 홍루를 운영하던 주인이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포졸들이 양쪽에서 그의 손을 잡고 무릎 꿇렸다.
서걱-
“아이고 강 조위님. 생포하라고 했는데 일을 저지르면 어떡합니까?”
“퉤! 원수 모가지를 하나 잘랐으니 여한없다. 이제 미친 놈처럼 적진으로 돌진하련다. 원수놈에게 빌붙어 삥 뜯어 먹은 죄를 갚아야지 않겠냐?”
***
“인즉 다 정리되었단 말임메?”
“네. 곽 장군. 한 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번 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고거이 잘 되었다야. 그런데 요기, 신라에서 침투시킨 놈은 와 모가지를 뎅강 짤랐슴둥?”
“성내 동편을 책임 진 조위가 그동안 간자에게 상납을 꽤나 받아 먹은 모양입니다. 그 책임을 지겠다며 신라 간자 모가지를 들고 왔습니다.”
“잉? 그 화상 데려오라. 둑지 않을만큼 녹신하게 만져줘야 되갔어.”
“장군, 참으시지요. 이미 최전방 돌격수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싸우다 죽겠답니다. 또 사연을 들어보니 조상이 신라놈에게 죽었답니다. 원수인 셈이죠.”
“고래? 조위 고 자슥, 사내다야. 원대로 해주라.”
곽치우가 쾌히 승락하자 보고하던 군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렇게 정확한 정보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 고거. 님자가 짐작하는 대로임둥. 알잖네?”
“또 이사도 공자님이십니까?”
“잉. 하여간 그 종간나 새끼,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디 한 번 뽀개보고 싶디 뭐이야. 아마 구렁이가 나오디 않갔네?”
“에구 말씀이 너무 험합니다. 자타공인 우리 번진의 지낭 아닙니까? 천하에 다시 없을 신동입죠.”
“내래 결국 고 아새끼 청대로 한 대 맞았지비. 황제한테 많이 뺏어온 공으로 하나 들어주갔다고 주군이 말하니까네··· 빌어먹을 아 새끼, 나를 한 대 패고 싶다디 않갔어?”
“크크크, 제가 그 장면을 못 본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썅 간나 새끼, 하필 눈탱이를 때려게지고 달걀 한 판을 썼어야. 가뜩이나 개성있는 얼굴이라 장가도 못 가고 있는데 말이지비.”
“장군, 말은 바로 하셔야 합니다. 개성 있는 얼굴이 아니라 험상궂은 얼굴이겠지요.”
“님자, 일로 오라. 내래 긴히 할 말이 있슴둥.”
보고하던 군관은 후다닥 뛰어 도망쳤다. 이럴 때 잡히면 자신도 눈탱이 밤탱이 된다.
곽치우는 서책을 펼치더니 붓으로 굵게 X자를 그었다.
[번진 내 간자 명단]이라는 제목이 선명했다.
“많이도 넣었구나야. 서른 놈이면 그동안 우리 번진의 숟가락 몽뎅이까지 다 엿보았단 말이잖네? 하긴 우리도 마찬가지디.”
성내에 침투해서 암약하던 간자를 일거에 소탕했다. 나가는 모든 정보를 차단한 것이다.
“야. 이거 감이 좋다야. 이 썅간나 새끼래 미워할 수가 없어야.”
곽치우는 다른 서책도 펼쳤다.
[위박 번진의 군사 배치도와 헛점]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뱃속에서부터 병법을 익혔다 해도 이케 분석은 못하디. 이대로만 된다믄 병력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갔어. 전승사, 이제 뒤졌어야.”
곽치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나저나 병마사께도 한 권을 보냈다는 말이 있던데··· 통 안 보여주니 답답해 미치갔구나. 요 꾀쟁이 새끼래 무슨 다른 대책이 있는 거이 분명한데······”
구만 대군이 총 동원되었다. 각 지역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조용히. 은밀하게 움직였다.
목표는 위박 번진의 절도사부가 있는 덕주 턱밑의 역성이었다.
역성에서 반나절 거리에 위덕 번진 최후의 방어선 절리성이 있고, 그 너머 덕주에는 전승사가 있다.
***
“잘렸어?”
“네. 폐하. 그렇게 판단되옵니다.”
“허!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벌써 십 년 가까이 신분을 감춘 채 암약했사옵니다.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했사온데··· 황공하여이다.”
“두 곳 모두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한 명은 서점 주인으로 위장했사옵고, 또 한 명은 군위로 복무하던 중이었는데, 콕 찝어 잡아 들였다 하옵니다.”
“그 놈 짓이다.”
“또 이사도 말이옵니까?”
“그래. 천적이로다. 놀랍다. 그 놈만 떠올리면 소름이 끼치도다. 꼭 죽여야 하는데 방법이 마땅치 않구나.”
“폐하. 어찌하오리까?”
“우선 전승사에게 은밀히 통보하라.”
“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죽고, 또 하나는 힘을 빼는 게 이번 일의 목적 아니더냐? 이정기가 간다는 걸 전승사가 미리 알고 대비토록 조치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태감 휘하의 그림자, 모두를 투입하라. 마침 평로치청은 텅 빌 것이다. 그때를 이용해 그 영악한 놈을 무조건 제거하라.”
“네. 폐하. 이도 차질없이 이행하겠나이다.”
황제 이괄이 손을 쓰다듬었다. 이사도만 떠올리면 이상하게 소름이 올라온다.
“모든 그림자를 다 잃더라도 꼭, 반드시, 무조건, 그 놈을 죽여라. 이대로 더 나이를 먹으면 우리 당에 치명적인 독을 뿌릴 놈이로다.”
악연이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는 법이다. 본능적으로 이괄은 이사도를 천적으로 생각했다.
***
“뭐야?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그 시간, 이사도는 등을 깔고 누워 귀를 후비고 있었다.
“어떤 새끼가 내 욕을 하는 모양이네.”
곽치우에게 들었다. 모든 간자를 소탕했노라고.
이제 준비가 끝난 셈이다.
내일이면 청주성에서 본진이 출발한다. 미리 덕주와 지근거리에 있는 역성으로 보내둔 병력과 합류하는 순간 시작된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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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한국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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