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라이터
제18화 (라이터)
“맛있어요.”
“더 먹어라. 이것도 맛 보고.”
“예. 할머니.”
“오냐, 곧 있으면 웅장(熊掌) 요리도 나올 게다. 그건 익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얌, 옘.”
평생 처음으로 누리는 호사다.
이사도의 앞에는 온갖 종류의 요리가 가득했다. 그래도 아직 더 나올 요리가 있단다. 현대 사회에서도 곰발바닥 요리는 먹어 본 적이 없다.
성덕절도사 이보신이 외할아버지로서 자신을 받아줬지만, 정작 따뜻한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맞은 편에 앉아 계속 음식을 밀어주는 저 분, 바로 외할머니였다.
“내가 숙명이를 억지로 시집 보내고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예, 할머니.”
“네 아버지 이납은 장부라고 소문난 사내다. 하지만 그래봐야 첩실로 가는 것 아니겠느냐? 이 할미 입장에서는 죽기보다 더 싫었어.”
“압니다. 할머니 심정.”
“그래, 이 할미는 세 명의 딸을 낳았다만, 모두 정략혼으로 보냈구나. 특히 숙명이는 그 중 큰 딸이다. 할미 가슴에 영원한 멍으로 남아 있단다.”
이제 외할머니는 옆으로 앉더니 음식을 떠먹여 주었다. 사도는 낼름낼름 제비새끼처럼 다 받아 먹었다.
이건 음식이 아니다.
정이다. 사랑이다.
언제 이런 속정 깊은 음식을 먹어 봤을까. 이강호는 현대에서 고아로 자랐다. 연구에 미쳐 가정도 꾸리지 못했다.
눈에 습막이 서리고 목이 메였다.
“물 마셔라. 체할라.”
“네. 할머니.”
“참, 네 아비는 잘 있느냐?”
“······.”
선뜻 대답을 못 하겠다.
사실 아직 본 적이 없다. 아버지 이납은 지금 등주 자사로 임명되어 청주성을 떠난 지 오래 되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도 못 봤다.
“네 아비도 당당한 사내다. 숙명이를 많이 아꼈다고 들었어. 언제 한 번 들리라 해라. 할미에게는 그래도 큰 사위다.”
“네. 나중에 뵙게 되면 말씀 전해 올리겠습니다.”
너무 따뜻한 할머니의 정이 듬뿍듬뿍 전해져서 한결 더 먹먹했다.
“나중에 네 사촌들과 인사하거라. 혈육끼리 서로 알고 지내야지.”
“예. 그래야지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몇 사람이 들어섰다.
“오! 잘 왔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방금 할머니가 언급한 사촌들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에는 나이가 많은 남자가 있었다. 수염이 제법 무성하다.
“어머님. 소자 애들과 함께 왔습니다.”
외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른다면··· 이사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장차 성덕 번진을 물려 받을 이보신의 장자다. 그리고 사도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다.
“됐다. 편히 앉거라. 네가 왔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왔다.”
“이사도라고 하옵니다. 미욱한 조카가 외숙부님을 뵈옵니다.”
“오냐. 서로 인사들 하거라. 네게는 이종 사촌이 되겠구나.”
이사도는 외삼촌의 한 발 뒤에 서 있는 이들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다섯 명 모두 건장한 모습들이다.
“앉거라. 다 형제 간 아니더냐?”
할머니 말 대로 뭔가 찡하다. 혈혈단신, 사고무친 신세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신에게도 혈육이 있었다.
이래서 서로 의지가 되는 것이다. 피란, 물보다 진하기 마련이다.
만약, 위험이 닥친다면 만사작파하고 달려와 줄 수 있는 형제가 있었던 것이다. 든든한 배경이 생겼다.
내실에 훈훈한 기운이 가득했다.
***
“뒤져!”
“흥, 고거이 꿈이란 거 모름메?”
“제발, 한 대만!”
“크크크, 내래 핏뎅이한테 맞으믄 어찌 친위군 장령이라 할 수 있갔서.”
“헉, 헉.”
입에서 단내가 난다. 입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버석거렸다. 군데군데 갈라진 곳에서 핏물까지 비쳤다.
그나마 얼굴은 봐준 탓인지 멀쩡해 보이지만, 몸뚱이는 걸레쪽처럼 변했다. 멍은 애교다. 손목뼈가 부러졌다 다시 붙은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이사도는 죽기살기로 곽치우에게 달려 들었다. 그래봤자 아직까지 단 한 수도 맞춰 본 적이 없다.
맹장으로 불리기도 아까운 장수다. 오죽하면 여포의 환생이라고 하겠나. 그런 곽치우가 겨우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이사도에게 맞을 리 만무하다.
“씨발. 오늘은 꼭 칼침 한 방 놓고 말 겁니다.”
“우쭈쭈, 꿈깨라고 하디 않았간? 그 실력으로는 백 년이 지나도 안 됨메. 포기 하기오.”
“포기하면, 더 안 때릴 겁니까?”
“호오, 이 여우 대가리를 파싹 깨주갔서.”
딱, 퍽-
나름 사정을 봐 준 거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다.
“웩!”
골이 윙윙 울린다. 머리를 맞았는데 왜 속에 있는 걸 몽땅 토해내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이사도는 또 퍼지고 말았다.
“야, 일 호, 이 물건 치우라.”
곽치우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부리나케 달려와 이사도를 질질 끌고 가는 덥석부리 사내.
장안성에서 나와 성덕번진으로 가는 중에 만난 산적패의 두목이다. 원래는 성덕번진 군사로 넣으려고 했으나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이왕 군에 투신하려면 차라리 곽치우를 따라 평로치청으로 가겠다고 간절히 청해서 그리 되었다.
곽치우도 내심 싫지 않은 표정이다.
단 둘이 가다 보면 자신이 어린 이사도의 뒷치다꺼리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꿀이지. 모든 걸 시키면 제깍제깍 처리해 주는 꼬붕이 생겼으니...
그렇게 성덕 번진을 떠난 뒤 일주야 동안 곽치우와 이사도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악을 쓰고 덤비는 이사도, 가차 없이 때려 눕히는 곽치우. 그러다 정신줄을 놓으면 일 호와 몇 명이 달라붙어 처리한다. 나무 그늘에 눕히고, 온 몸을 주무르고, 물을 먹이고, 때 되면 호랑이 뼈 달인 탕국을 먹이고.
다시 정신이 들면 다시 똑같이 시작된다.
“독합니다. 독해.”
“누구? 곽 장군?”
“곽 장군도 그렇지만 저 소 공자, 아프지도 않는 지 바락바락 대드는 독기, 질립니다.”
“바보야, 그걸 다 받아주는 곽 장군이 진짜 대단한 거야. 내가 보기에는 애정이 넘친다.”
“하이고, 저게 애정이라고요? 저 같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온 거다. 저 어린 공자님도 하는 걸, 우리는 못하기 때문에.”
“그래도······.”
“장군께서 뭐라더냐? 어차피 죽을 거 뽀대나게 죽으라고 하지 않던? 힘없는 백성 털어서 먹고사는 거, 나도 신물 나던 참이다. 이번 기회에 죽기 살기로 한 번 해봐야 겠다.”
이사도를 나무 그늘에 눕힌 뒤, 일 호라고 불린 사내는 슬그머니 곽치우에게 다가왔다. 극히 공손한 자세다.
“뭬야?”
“저··· 장군님.”
“말 하기오.”
“청주성까지 지금 걸음이면 한 달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저희들도 배우고 싶습니다.”
“···배운다라.”
“넵. 외람되지만 평로치청에 가서도 열심히 수련할 테니 부족한 기초를 조금 잡아주시면 어떨까··· 감히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
“네. 장군님. 산속에 숨어있던 저희를 세상으로 끄집어 내신 분, 바로 장군 아니십니까?”
“책임을 져라?”
“······.”
곽치우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닌 모양이다. 그랬다면 대뜸 언월도가 날아갔을 터이다.
“님자, 그거 아네?”
“뭘 말씀하는 겁니까?”
“지금 그 말이 지옥 아가리를 열었다 이 말이디.”
“예?”
“바로 시작 하기오. 대신 절대 물리지 못한다는 거 명심하라우야.”
그땐 정말 몰랐다. 살면서 이만큼 후회되는 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꿰에엑!”
“아이고, 난 안 해!”
“부처님. 공자님, 조상님. 살려 주십시오!”
온갖 비명이 그때부터 벌판을 가득 채웠다. 불을 만난 메뚜기처럼 여기저기로 도망을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두두두-
말굽 소리에 질린 사내들이 연신 비명을 질렀다.
“멍청한 놈들 아님메? 차라리 덤비라. 그게 덜 맞는 길이디. 암!”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그냥 우우 도망 치다가 등짝과 대가리가 터져 나가는 것보다 맞서는 게 훨씬 덜 맞는다.
“옳티. 쿠하하하. 힘을 더 써보라. 옳티, 그거이야.”
“꿰에에에엑!”
덕분에 이사도는 한 숨 돌렸다. 겨우 나무 그늘에서 호랑이 육포를 씹으며 사도는 실감나는 영화 한 편을 즐기고 있었다.
“제기랄. 부정 못 하겠네. 겨우 걸음마 단계지만 지난 석 달 간 이렇게 장족의 발전을 할 줄이야.”
그 허약한 새 다리 같던 팔뚝에 살이 올랐다. 하체는 말 근육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사람 신체라는 게 단련하기 나름이구나. 한계까지 몰아 붙인 이유가 있었어. 과연 곽 백부는 최고의 스승이다.”
아직 형인 이사고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래도 쓸만하게 변한 자신의 몸을 훑어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우야. 더 하믄 다 뒤쥐겠슴둥.”
곽치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그 자리에 털썩 드러 눕는다. 평야 곳곳에 끙끙 앓는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좆같은 두목. 왜 가만있는 불을 뒤적거려서 온 산을 태우나?”
“그러게. 혼자 뒤질 것이지. 우리까지 끌어들여서 말이야.”
그러나 개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늘이 내려 준 기회다. 병신들아.”
“뭐?”
“첫 날 무조건 도망다니다 개처럼 맞았던 것과 비교해 봐라. 지금은 그래도 한두 번 피할 수 있잖아?”
“······.”
“여포의 환생이라고 불리는 전장의 미친 호랑이 곽치우 장군이다. 그런 분에게 한 수 배우기 쉬운 줄 알아?”
“하긴··· 그렇다.”
“나는 시간이 짧아서 아쉽다. 곧 청주에 도착할 거야. 그럼 이런 기회도 없어져.”
“평로치청 군은 다들 독종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또 주축이 옛적 고구려 유민들이라던데 우리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 마. 내 먼 친척 중 한 분이 진작 거기 투신하셨어. 들은 바에 의하면, 거긴 극락이란다.”
“극락?”
“그래. 차별이 없다더라. 그리고 실력만 있으면 언제든 군조(軍組)나 군위(軍尉)가 될 수 있다고도 하더라.”
“허어. 진짜?”
“녹봉도 만만치 않아. 충분히 먹고살 정도로 지급된다더라.”
“평로치청이 부잔가?”
“너, 세상 물정이 너무 어둡구나. 지금 대륙에서 평로치청이 제일 살기 좋아. 세금을 삼 할만 거둔다. 그래도 돈이 남아 도는 곳이야.”
이사도는 귓전으로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히히거렸다.
몇 달 동안 할아버지가 많은 걸 해내신 모양이다. 사신단이 출발하기 전에 삼만이었던 군세가 오만으로 늘었다. 아마 돌아가면 더 불었을 것이다.
다 돈이다.
야율 적기장군이 밀염방을 싹 쓸어버렸을 터, 금값에 버금가는 소금을 장악했으니··· 평로치청의 곳간은 터져 나갈 것이 틀림없다.
당부한 대로 염상(鹽商)과 합의를 잘 했나? 다 돌아가 보면 알 일이다.
이제 하루 이틀이면 평로치청 관할에 진입한다. 그 다음 또 며칠이면 청주성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이사도에게 일 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왔다.
“공자님. 저녁 준비를 하겠습니다요.”
“네. 그러세요.”
“네. 어제 살짝 내린 비로 나무들이 젖어서 불을 피우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요. 그 동안 장군님과 한 판 더 하시겠습니까?”
“히익! 아저씨. 자객이었어요?”
“···그게 아니라 불 피우기 쉽지 않아서 말씀입죠.”
여러 명이 달라붙어 나무를 잘게 찢어 놓고 부싯돌을 튕기지만 불이 붙지 않아 고생하는 게 보였다.
‘참. 무지한 세상이다. 라이타만 있어도 저런 건 장난인데.’
그 순간, 문득 머리를 스치는 섬광같은 생각 하나.
“가만, 라이터.”
“네? 뭐라굽쇼?”
“아니, 혼잣말이었소.”
불조차 원시적으로 피우는 세상이다. 이들이 어떻게 핸드폰을 알 것이며, 비행기를 알겠나?
그런 고차원적인 물건들 말고 가장 쉬운 것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건.
무엇보다 현 시대의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생활용품.
“그렇네. 왜 나는 전차나 탱크만 생각했을까? 주변에서 쓰는 필수품이 많고도 많은데.”
이사도가 자각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신의 머리 속에는 오 천 년의 문명 지식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우선 라이터를 만들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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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한국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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