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놈! 당장 상자를 내놓아라!”
“뺏어가 봐. 그것보다 마법 더 없어? 있잖아. 파이어 볼을 써.”
“이······.”
콰아아아!
윈드 스트라이크가 실드에 부닥치며 맹렬한 소음을 일으켰다.
이 마법은 절대 파이어 실드를 뚫지 못한다.
그러나 마나 소모를 따지자면 그레이는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었다.
파이어 실드 전체가 저절로 강화되며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투웅!
로건은 아이스 볼 3개를 던졌다.
아이스 볼은 쩍 소리를 내고는 부서지며 파이어 실드에 달라붙었다. 2개는 한 곳에 집중적으로, 1개는 파편처럼 흩어져 실드를 뒤덮어버렸다.
파이어 실드는 2개의 충격을 받은 만큼, 다시 전체를 강화하며 많은 마나를 소모했다.
로건은 이런 식으로 마법을 조금씩 쏘며 그레이의 마나를 잔뜩 빨아당기는 것이었다.
텅! 텅!
한편 그레이도 마나 핸드로 쉴 틈 없이 로건의 실드 터트렸다.
그런데 로건은 파이어 실드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기에 적지 않은 마나 핸드가 빗나갔고, 그것도 마나 낭비였다. 이러면서 로건은 실드까지 아껴 마나 효율을 더 높였다.
‘이놈.’
마나 핸드로 한 번만 쥐어짜면 끝인데.
그레이는 약삭빠른 로건에게 기절할 만큼 화가 났다.
‘흐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그레이는 마법어를 뇌리에 읊으며 혀끝을 깨물어 피를 머금었다.
대혼란.
이 카오스 마법에 노출되면 상대는 극도의 혼란한 감정에 빠져, 감정이 파도치듯 들쑥날쑥해져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또 의욕이 떨어져서 온몸이 무기력해졌다.
푸우우!
그레이가 피를 힘껏 뿜자 불길한 빛을 뿜는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로건을 뒤덮고, 주위까지 범위를 넓혀갔다.
‘저주다!’
로건은 코앞에서 터진 붉은 안개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 피할 수 없음을 느끼고 실드를 최대한 강화했다.
‘약하지만 물리력까지 있군.’
로건은 실드가 힘으로 눌리는 것을 느끼며 손가락 하나를 실드 바깥으로 빼 보았다.
손가락이 땅에 쓸린 듯 잠깐 쓰라렸다가 통증이 사라졌으며, 동시에 손가락에서 베리어가 나타났다.
‘됐어! 기회!’
콰아아아!
윈드 스트라이가 나타나 붉은 구름을 휘감기 시작했다. 구름은 물리력을 가졌으나 강렬한 바람을 이길 정도는 못 되었다.
안개가 잠깐이나마 흩어지며 농도가 옅어졌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꽈아아아앙!
“으악!”
로건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레이에게 익스플로전을 터트렸다.
그레이는 카오스 마법을 믿고 실드를 치지 않고 있다가 크게 얻어맞고 말았다.
안개가 흩어지는 것을 보며 즉시 파이어 실드를 펼쳤으나 반 발 정도 늦은 것이다.
꽈아아앙!
로건은 안개 바깥으로 뛰쳐나오며 하늘 높이 날아가는 그레이에게 다시 익스플로전을 썼다.
막 다시 만들어지던 파이어 실드가 부서지고, 그레이는 무서운 속도로 땅으로 떨어졌다.
그레이는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저주를 피하다니, 어떻게?' 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였다.
그레이가 떨어져 꽂힐 땅이 까맣게 물들더니 반으로 쪼개지며 입을 쩍 벌렸다.
그 속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지옥의 무저갱 같았다.
‘으아앗!’
그레이는 추락하면서 본능적으로 파이어 실드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염력으로 몸을 옆으로 힘껏 밀어 암흑의 공간을 비켜 가려고 했다.
그는 저 공간 마법을 레온의 스승과 싸울 때 본 적이 있어서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파앙.
그때 벼락처럼 쫓아온 로건이 워터 볼을 쏘아 그레이를 어둠의 공간에 처박아 버렸다.
“끄으으······.”
그레이는 공간에 가슴, 목에 이어 입까지 잠겼고, 공간은 늪처럼 끊임없이 그레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로건! 저주가 당신의 몸에 닿았소! 괜찮소? 괜찮은 거냐고!”
레온은 백색의 스태프를 그레이에게 겨눈 채로 로건을 애타게 부르며 훌훌 날아왔다.
그의 은신 마법은 이미 풀려 있었다.
백색 스태프는 부르르, 부르르 한 번씩 진동하며 봉인 마법의 힘을 더해갔다.
“괜찮소! 난 괜찮아!”
로건은 얼른 곁으로 다가가서 그를 진정시켰다.
레온은 얼마나 놀랐는지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가뜩이나 피의 저주로 괴로운데, 로건의 위태로움을 보고 정신적인 충격을 또 받은 것이다.
‘이 찢어 죽일 것들······.’
그레이의 핏빛 눈동자는 핏줄이 다 터져있었다.
그러나 그 섬뜩한 두 눈도 금방 공간의 늪에 파묻혀 버렸다.
두 사람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로건은 겹겹이 실드를 둘러싸고 산초의 스태프를 겨눈 채 그레이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레온은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도 그레이를 향한 백색의 스태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화아악!
머리끝까지 잠기려는 그레이의 정수리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두 줄의 희끄무레한 연기였는데 번개처럼 로건과 레온에게 달려들었다.
“영혼의 저주!”
로건은 레온의 경악에 찬 소리를 들으며 그의 어깨를 잡고 시야를 멀리하여 공간을 도약했다.
파앗!
레온은 온통 땀에 젖어서는 소리쳤다.
“영혼의 저주! 그레이의 마법이 지옥 끝까지 따라올 것이외다! 지금 우리의 마법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소. 우리는 앞으로 열흘 동안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하오.”
로건은 두 번 더 뱅글을 써서 거리를 벌린 후 성난 얼굴로 말했다. 영혼의 저주란 말에 에반이 생각난 것이다.
“놈은 확실하게 잡은 거요?”
“물론이오. 지금 마법의 공간에 있······ 엇!”
로건은 레온을 양팔로 안아 들고 레비테이션을 펼쳐 최대 속도로 날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 저주에 두려운 것이 없지만, 레온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야 했다.
쉬이이이!
로건은 무섭게 날면서 소리쳤다.
“열흘이라고 했소?”
레온은 그의 품에 안겨 힘없이 말했다.
“블레어 성에서 걸린 추적 마법은 인식 거리가 굉장하지. 놈의 마법은 정말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온다니까. 로건, 날 두고 떠나시오. 아마 당신 혼자라면······.”
레온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
로건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쏟아졌다.
“안 돼! 난 그 누구라도 그따위 저주에 당하는 꼴은 못 봐!”
* * *
그렇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열흘.
그레이의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이었다.
흰 연기가 쫓아오는 속도는 달리는 로건의 레비테이션보다 약간 느렸는데, 잠시도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을 추격했다.
로건은 하루 3번 뱅글의 마법을 다 쓰고, 레온을 안고 쉬지 않고 날았다.
마나가 바닥을 치면, 근처의 산에서 야생마에게 패밀리어를 걸어 말을 타고 달렸다.
밤이 없고.
낮이 없고.
잠도 없었다.
하루 3번 회복제를 먹으며,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계속 나아갔다.
“로건······. 이젠 나를······.”
레온은 정말이지 죽어갔다.
피의 저주를 맞아서 체력이 떨어졌으면 쉬어야 하는데.
한시도 쉬지 않고 비행 마법의 세찬 맞바람을 맞았고, 말 위에서 몸을 시달렸다.
로건의 응원에 처음에 한두 번은 자신도 블링크 마법으로 그를 도왔다.
그러나 견디다 못한 육체는 심장에 타격을 주어, 한 줌의 마나조차 쓸 수 없게 만들었다.
레온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아······.”
“안 돼!”
파앙.
로건은 그에게 포션을 먹이고 마나를 닥닥 긁어서 염력으로 하늘 높이 날고는, 시야를 멀리하여 뱅글의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는 레온을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시오. 이제 사흘만 견디면 저주는 흩어지오. 이제 거의 다 됐소. 으응?”
“······.”
레온은 로건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눈앞이 환하던 그 훤칠한 모습은 어디에 갔는지.
탐스럽던 입술은 말라 터져 피딱지가 가득하고, 얼굴은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린 사람 같았다.
‘나는······. 나는······.’
로건은 눈물을 흘리는 레온의 등을 쓸어주었다.
“쉽시다. 잠깐만 쉽시다. 그 정도 여유는 있소.”
로건은 서둘러 숲으로 들어가 야생마를 찾았다. 그런데 한참 찾아도 소득이 없다.
새들에게 패밀리어를 걸어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탈 만한 동물이 없었다.
‘후. 정말 이러다가는 저주에 맞기도 전에 레온이 못 견디고 죽겠어. 될까? 안 될 거 같은데.’
블레어 성에서 레온이 피의 저주에 걸렸을 때.
그의 팔목을 잡아서 저주를 막으려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로건은 흰 연기 두 개를 자신이 몸으로 받아낼 생각을 처음부터 했었다.
그런데 실패하면 레온의 목숨은 끝이기에 차마 시험하지 못하였다.
‘2개의 저주는 나와 레온을 각자 목표로 하고 날아오는 거야. 내가 레온의 저주를 온몸으로 막는다면······ 통할까? 가능할까?’
로건은 고개를 젓고는 숲 바깥으로 나왔다.
“레온의 목숨을 놓고 위험한 도박을 할 순 없지.”
레온을 잘 확인하면서 계속 가다가 한계가 왔을 때야 시도할만한 방법이었다.
“이제 좀 괜찮소?”
“괘, 괜찮소.”
레온은 퉁퉁 부은 눈으로 로건을 쳐다보았다.
로건은 말없이 아공간에서 모포 몇 장을 꺼내어 레온의 몸을 둘둘 감았다.
레온은 레비테이션의 맞바람조차 못 견딜 상태였다.
“말을 찾지 못했소?”
“운이 없었지.”
“그러면 그대가 힘든데. 말 위에서라도 자야 하는데······.”
로건은 레온을 안아 들고 빙그레 웃었다.
“난 옛날에 정말 열심히 일했거든? 잠도, 뭘 먹는 것도 까먹어 가면서 말이오.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정말······.”
“한숨 푹 자두시오.”
그는 레온의 머리끝까지 모포를 덮어주었다.
곧 그의 몸이 둥실 뜨더니 뒤로 잠시 밀렸다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이름 모를 땅.
별빛이 초롱초롱한 밤.
로건은 밤을 뚫고 끝없이 나아갔다.
* * *
사흘 뒤.
두 사람은 기어이 저주를 뿌리쳤다.
레온이 ‘됐다. 끝났다.’라고 말한 순간 로건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로건은 레온의 놀란 비명 속에서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펼치고 천막 입구에 락 마법을 걸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포션과 회복제를 먹고 잠에 빠졌다.
“음.”
오전에 잠든 로건은 다음날 오전에야 눈을 떴다.
그는 땅에 깐 모포 위에 앉아서 입맛을 다셨다.
“뭘 좀······ 채워넣긴 해야겠네.”
30명은 들어가도 넉넉한 공간 확장 천막.
그 안에는 탁자와 의자, 침대뿐이었다.
로건은 회복제를 마시고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레온을 살펴보았다.
숨소리가 고르고 표정도 편안했다.
“됐네.”
로건은 탁자 앞에 앉아서 그레이의 마법 주머니를 꺼내고 마법서부터 꺼냈다.
그의 마법에 대한 약간은 병적인 애정이 발동한 것이다.
마법서는 총 680권.
워낙에 많아야지, 당장 그 안의 내용을 모두 살펴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꽤 시간이 걸리겠군.’
그는 각 책의 앞 몇 장씩만 살펴보면서 어떤 내용인지 파악해갔다.
빠른 속도로 책을 한 권씩 옆으로 쌓던 로건은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탁.
그리고 3백 권이 넘었을 때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이거 전부 기억에 관련한 마법이야. 한 권도 빠짐없이. 도대체 어떤 대단한 마법이길래 이렇게 책이 많아?’
나머지도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마 그레이의 마법서는 없을 것 같았다.
로건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레이를 연구 일지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수천 년 전 고대의 백마탑······. 아레스에서 구했다고? 그럼 뭐야? 마법서들은 전부 백마법이란 뜻이잖아. 그레이가 왜 백마법을?’
로건은 일지를 계속 읽다가 감탄했다.
“그레이, 이놈이 백마법을 흑마법으로 변형하려고 했군. 그럼 680권 마법서는······ 내가 모두 배워도 되겠네. 하나도 빠짐없이? 남김없이? 그렇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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