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시브로 대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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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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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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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DUMMY

로건은 IT 기업의 사장이었고, 그 자신도 뛰어난 프로그래머.

복잡한 알고리즘과 그 응용에 이골이 난 사람이다.

현대인치고도 사고 체계가 남달랐던 그는 처음부터 세 번째 조건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거기에 로건 레스터.

엘프의 피가 섞인 아버지 에반으로부터 마나 재능을 물려받았고.

정신 연령 때문인지, 타고난 건지 모르겠지만 신들린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첫째, 둘째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했다.

그것뿐인가.

시스템의 패시브 스킬.

신화, 전설급의 마법 관련 재능을 몇 개나 가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위의 3가지 조건을 다 잡아먹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아! 어떻게 해!”

로건은 케인이 책상에 이마를 찧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러다 애 잡겠네. 저건 그냥 고문이야.’

자신은 몇 개의 마법 문자를 알고 있더라?

무려 150만 자.

로건 레스터는 비정상적인 정신 때문에 마법을 펼칠 의지가 부족했다.

그러나 에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20년 동안 밤낮으로 마법어를 가르쳤고.

그 덕분에 비현실적으로 튼튼한 기초를 다지게 된 것이다.

“으윽.”

케인은 머리가 깨져나갈 것 같은 두통에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꾸역꾸역 읽어나가다가 눈물을 흘렸다.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다.

“안 돼! 나는······ 나는 안 된다고! 으어헝!”

케인은 대성통곡했다.

로건은 안쓰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5백 장도 못 외웠어. 하긴, 5백 장도 얼마나 대단해. 예전의 나라면 3백 장이나 외웠을까? 2백 장도 힘들었을 거야.’

분량도 분량이지만 내용도 좀 어려워야지.

법전처럼 비비 꼬인 언어의 연속이었다.

‘케인은 분명 머리가 좋아. 하지만 마법사는.’

그는 절대로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겪으면 겪을수록 인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능했다.

‘녀석······ 애썼다. 잊어버려. 마법사 아니라도 할 건 많아.’

로건은 별장을 떠나 영주 성에 들렀다.


* * *


뱅가드 상단 멀링가 영지 지점.

로건은 지점장과 독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로건님.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려 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사람을 보내려고 했다? 혹시?”

“예. 루크님께서 물건을 보내셨습니다.”

“오!”

루크가 보낼 게 뭐가 있겠는가.

마법서 뿐이었다.

로건의 몸이 의자에서 슬쩍 떴다가 다시 붙었다.

“그런데 로건님께는 무슨 일로 찾아주셨습니까?”

“아니, 아니. 내 용건은 중요하지 않소. 나중에 얘기하겠소.”

“예. 그러시면······.”

지점장은 단단히 밀봉된 상자 하나를 탁자 위에 놓았다.

로건은 상자를 어루만지다가 지점장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곳이 없겠소?”

“별채로 모시겠습니다.”

로건은 직원의 안내로 별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개수부터 세어보았다.

총 5권.

1년에 12권을 받으면 되는데 저번에 10권을 받았다.

그렇다면 3권이나 더 준 것이다.

“루크에게 준 뇌물이 효과가 있었군. 그래도 이건 과하지. 회복제가 그만큼 가치가 높다는 뜻이다.”

로건은 마법서들을 어루만지다가 한 권씩 제목을 확인했다.


락 마법, 언락 마법, 인식 마법, 바인드 마법.

이렇게 4권.

나머지 1권은 마법 이론서였다.


“하, 인제 보니 락 마법, 언락 마법을 뱅가드가 먼저 낚아챘네? 이러니까 마법 상점 주인이 마법서를 못 구했지.”

대만족.

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던 ‘인식 마법’까지 보내주었다.

로건은 동봉된 루크의 편지를 읽어 보았다.

“마법서들을 구하는데 정말 많은 돈이 들었다? 상단의 역량을 거의 최대로 동원했다? 마법 이론서는 계속 보낼 수 있지만 단독 마법은 더 이상 구할 수 없다? ······솔직하군.”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루크는 제대로 된 상인.

거짓은 없다고 생각했다.

“단독 마법은 돈으로 못 산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어디······.”

로건은 책에 빠져 시간을 잊었다.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이 되어서도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락은 잠금 마법.

언락은 잠금 해제 마법.

바인드는 적의 움직임을 묶는 마법.

인식 마법은 일종의 추적 마법으로 수십 가지로 응용이 가능한 필수 마법이었다.


로건은 환하게 웃었다.

“훌륭해, 정말 수준이 높아. 당연히 보상해야지. 주고받는 게 있어야 신뢰도 쌓이는 거야.”

똑똑.

로건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

“······.”

로건은 염력으로 문을 천천히 열었다.

끼이익.

눈을 마주친 상인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별채에 들르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으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오?”

“로건님의 하인 케인이 영주 성으로 끌려갔습니다.”

“뭐?”

“조금 전 지점장님과 함께 영주 성 행정관에 들렀는데 리안이 관리에게 통 사정을 하고 있더군요. 지점장님께서 리안의 이야기를 듣고 소식을 전하라며 저를 보내었습니다.”

“······.”


* * *


어제 낮.

케인은 마법서를 외우다가 대성통곡했었다.

사실은 사흘 만에 자신은 이 책을 못 외울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마법사가 되는 길인데.

외우고, 또 외우고.

한 달을 매달렸지만 끝내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무너진 것이다.

“저기······ 괜찮으세요?”

“응.”

케인은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웃었다.

농노 소년 허드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오크통 정도는 제가 사 올 수 있어요.”

“로건님께 매우 중요한 일이야. 내가 가야지.”

케인은 휘청거리며 1층으로 내려왔다.

‘아, 저러다가 쓰러지겠어.’

허드슨은 케인이 넘어질까 봐 그를 따라갔다.

거의 한 달 동안 먹는 둥 마는 둥 책에만 매달렸으니까.

읽고, 소리 내어 외우고.

쓰고, 또 소리 내어 외우고.

천 번?

이천 번도 넘게 그랬을 것이다.

목이 다 쉬어서 제 목소리도 아니었다.

“허드슨, 욕조에 물 데워놨어?”

“예.”

케인은 다시 웃었다.

허드슨은 성격이 순해서 참 마음에 든다.

곡식 자루에 구멍을 내서 뒤집어쓴 것 같은.

그런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지만 착하고 일도 잘했다.

별장에 오고부터 잘 먹어서 볼살이 통통하고 얼굴이 뽀얗게 변한 귀여운 소년이다.

“잘했어. 욕조 물 식지 않았나 계속 확인해. 나는 다녀올게.”

케인은 하인, 농노들이 제 할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로건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만도 어디야. 난 리안 형에게 검술을 배우면 돼. 마법사는 접자. 최선을 다 해봤잖아. 그럼 됐어.’

케인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별장을 나왔다.


오크통을 사러 멀링가 영주 성으로 가는 길.

그런데 걸음걸이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고쳐먹었어도 사람이 당장 웃어지는 건 아니니까.

안면이 있는 경비병에게 인사하고 성으로 들어갔다.

터벅터벅.

고개를 푹 숙이고 그저 목적지로 걸었다.

정신이 다른 데로 가 있어도 몸은 익숙한 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오크통을 사러 잡화 상점에 가는 길.

얼마나 걸었을까?

퍼억.

케인은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졌다.

순간 날카로운 음성이 그의 귓가에 꽂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케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귀족? ······귀족!’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뭘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어? 병신이야?”

여자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숙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니?

아무리 못 배운 놈이기로 이럴 수는 없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오냐!”

“아닙니다!”

케인은 허겁지겁 엎드렸다.

귀가 뜨듯하다.

피겠지.

넘어지면서 돌조각 같은 것에 귀를 찧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

케인은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갑자기 넘어져서 저도 모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케인을 째려보았다.

그러다가 바닥을 짚은 케인의 손을 구둣발로 콱 찍었다.

구두 뒷굽이 얼마나 뾰족한지, 케인의 손등을 뚫고 땅에 박혀버렸다.

“아악!”

케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터지는 비명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이 여자는······. 잘못 걸렸다.’

귀족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아주 유별난 반응.

가끔 이렇게 이상한 귀족이 있지.

귀족은 하늘, 그 아래는 모두 벌레.

“이놈 봐라? 소리까지 질러?”

“······.”

케인은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이 귀족은 벌을 줄 것이다.

아마 몇 달은 몸져눕겠지.

괜찮다.

매 맞는 아이로 몇 년을 보냈는데.

‘그런데 절대로 맞으면 안 돼.’

지금 보통 하인이 아니다.

별장에서 집사장의 위치인데.

집사장이 다른 귀족에게 매를 맞는다?

주인, 로건의 명예에 큰 흠집이 날 것이었다.

귀족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케인은 내심 이를 악물었다.

‘로건님이 어떻게 대해 주셨는데? 마법까지 가르쳐주려고 하셨어. 망신을 당할 바에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낫다. 그러면 그분의 명예가 지켜질 것이니!’

여자는 구둣발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가 지저분해졌어.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아냐고!”

“······.”

“오늘 파티에 갈라실의 후계자께서 온단 말이다! 이 꼴로 어떻게 뵙지? 이제 어쩔 거냐!”

“드레스값을 두 배로 변상하겠습니다. 무례를 범한 값도 크게 배상금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흥. 그건 당연하고.”

케인은 덧붙였다.

“세 배. 아니 다섯 배로 변상하겠습니다. 또 드레스에 어울리는 귀한 장신구를 바쳐 무례를 갚겠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냉랭했던 여자의 표정이 한풀 꺾어졌다.

구둣발도 거두었다.

“다섯 배에 장신구라······ 그래? 하지만 죄를 감할 순 있어도 없던 걸로는 못 한다. 넌 그만큼 나의 중요한 일을 망쳤어. 하지만 네 뜻이 갸륵하니 받아들이고 벌은 5대로 그치리라.”

여자 옆에 서 있던 기사는 허리춤에서 채찍을 끌러 냈다.

“이분은 멀링가 자작 가문의 메리 멀링가 공녀님이시다. 공녀님의 은혜에 감사해라.”

이 길거리에서 로건의 집사장인 자신이 채찍을 맞다니?

케인은 기사가 채찍을 들자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안 돼! 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 * *


뱅가드 상단 별장.

로건은 심각한 표정으로 농노 소년 허드슨을 쳐다보았다.

“그래, 말해봐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것이······.”

허드슨은 케인이 걱정되어 뒤늦게 따라갔다가 그의 불행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길거리에서 채찍을 맞고 끌려가는 케인.

그러나 농노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나.

죽을 듯이 뛰어 별장으로 돌아왔으나, 있는 줄 알았던 주인은 없었다.

허드슨은 로건을 못 찾자 다시 리안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리안은 용병과 함께 인근 산으로 멧돼지를 잡으러 갔다.

어쩔 수 없이 용병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은 또 무슨 힘이 있어서.

그렇게 저택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놀란 용병들은 리안을 찾으려고 산으로 달려갔고.

온 산을 뒤지다시피 해서 가까스로 리안을 찾아 소식을 전했다.

‘케인! 케인을 살려야 해! 로건님이라면 구해주실 거야!’

늦은 밤.

리안은 부랴부랴 영주 성으로 달려갔지만, 성문은 굳게 닫힌 후였다.


허드슨은 엎드린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성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와 케인을 수소문했어요. 지금은 영주 성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리안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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