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한 깡패가 너무 유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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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천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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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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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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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지리산 연주암

DUMMY

“정우야, ‘용순’이랑 학교 간줄 알았는데 어디서 쌈박질 했느냐?”


사형스님이 부어오른 눈가를 보고 어디서 주먹질했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그냥 좀 넘어졌어요.”


“우리처럼 나이가 들면 말 안 해도 그려지는 것들이 있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사내들이 몇 사람씩 찬바람을 일으키며 운방사에 찾아와 ‘구석’이 네놈을 찾았던 것도 맘에 걸리고.”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놈들이 제 발로 찾아 왔다면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다만. 세상사 나무는 휘지 않고 바르게 자라고 싶지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휘거나 부러지기도 하지.”


“예, 사형스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보아하니 너는 이제 초년(初年)은 지나고 서서히 대운(大運)이 들어오는 시기야.”


“대운이 들어온다고요?”


“사람마다 마음속 운이 다르긴 하다만, 대운의 징조는 썩은 물은 나가고 새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가장 먼저 주변 사람들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사형스님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옛날에 알았던 사람들이나 감방에 있던 사람들과 헤어지고 운방사에 와서 새로 스님들 만났잖아요?”


“그래,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일은 나하고 ‘연주암’에 다녀오자.”


“연주암이요?”


“그래. 지리산 8부 능선에 있으니 꽤나 걸어야 할 거야. 주방스님한테 주먹밥 싸 달라고 해서 아침 일찍 떠나자.”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사형 안부도 궁금하고. 세상을 살다 보면 계획에 없던 일인데, 갑자기 생각나서 하고 싶은 일이 생기기도 하지.”


자세한 말씀을 안 하시는 사형스님 탓에 정우는 속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보국스님한테서 얼마 전 연주암에 가면 100년 된 백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때

눈으로 보지 않은 허황된 얘기라서 반신반의 했었다.


***


다음날 아침 조반(早飯)을 하고 배낭차림 사형스님 뒤를 따랐다. 평소엔 경내를 돌아다니며 하얀 고무신을 신었지만 오늘은 발목이 편안한 운동화를 신었다. 정우도 보국스님 운동화를 빌려 신고 조금 느슨한 느낌은 끈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주지스님! 요즘은 멧돼지가 사나워요. 너무 늦게 오지 마시고, 늦게 되면 주무시고 내일 오세요.”


누구에게나 넉살 좋은 주방스님이 따라 나오며 안전한 산행을 당부했다. 그리곤 주먹밥을 챙겨주었다.


“알았네. 잘 다녀옴세.”


아랫마을까지 걸어 내려와 농촌 버스를 타고 삼십 분 가량을 달렸다. 농촌 버스는 언제나 손님이 절반도 안 찼다.


오늘도 서너 명 노인만이 드문드문 자리를 지켰다. 열린 창문으로 덜커덩 소리와 삼복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정거장도 따로 없이 어디서라도 손을 들면 태워 주는 고마운 버스였다. 타고 내리는 시간 역시 고무줄이었다. 급한 사람은 느긋함에 숨이 넘어갔다.


“사형스님! 웬 지팡이에요?”


“산길을 가야 하니 만약을 위해서 짚고 가는 거다. 집안 구석에 비치한 소화기처럼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거든.”


아마 떠나기 전 주방스님이 말했던 멧돼지 같은 사나운 짐승을 염려해서가 아닐까 짐작이 되었다.


산길, 들길을 달리는 차창 아래로는 섬진강 모래가 보였다. 여름 가뭄 탓인지 널따란 강 폭 절반은 은회색 모래가 하얗게 쌓였다. 비 온 뒤 무지개가 생각나는 것처럼 모래 판을 보면 정우는 언제나 씨름이 생각났다.


중고등학교 시절, 모래판에서 어금니를 물고 씨름을 했었다. 친구들과 달리 형제나 엄마, 아빠가 없었던 정우는 상대방을 이겨야만 한다는 오기가 두 배였다.


씨름을 하다가 상대방한테 밀려서 넘어지는 순간이면 패배감보다는 혼자라는 외로움이 진하게 머리속에 밀려왔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친구들은 부모님이 우산을 가지고 학교에 왔다. 그러나 정우는 단 한차례 그런 일은 없었다. 젊고 예쁜 이모님이 있긴 했지만 비 오는 날 우산까지 챙기는 여유는 없었다.


이런 날은 세상에 자신 뿐이라는 슬픔이 엄습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단 한 차례도 떠나지 않았다. 상대와 겨뤄서 스스로 이겨내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정우는 상대를 넘어뜨리는 씨름을 잘했다. 자신 보다 크고 무거운 힘센 선수를 만나면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면 상대방 힘을 역 이용, 기술로 이겨야만 했다.


자신을 향해서 엄청나게 밀어붙이는 힘을 살짝 방향만 틀어주면 상대는 자신의 원심력에 따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래선지 백사장 모래를 보면 자신이 잘했던 씨름이 생각났다.


***


한 시간쯤 달렸을까? 산 아래로 기다란 마을이 보이는 길에서 내렸다. 운동화 ,승복차림 사형스님이 앞서 걸었다. 지평선 자락 넓은 들녘도 보였다. 삼복더위라선지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마을길을 지나 산길로 이어진 좁은 길로 접어 들었다. 여기서부터 수십 개 고갯길, 삼십 리를 가야만 한다고 했다.


“정우야, 절간 생활이 따분하지 않느냐?”


“따분하죠. 서울 회장님 지프처럼 지붕 열리는 차 타고 바닷가로 놀러 가고도 싶고.”


“그래, 네 나이 그런 마음이 없다면 젊은이가 아니겠지. 그런데 너는 왜 아직까지 절간에 남아 있느냐?”


“왜 사느냐고 묻는 것처럼, 한 마디로 말씀 드릴 순 없지만 여러 가지 마음이에요. 물과 불이 함께 있는 운세라 부처님이 눌러 줘야 한다는 사형스님 말씀도 신경 쓰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소나무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등짝, 겨드랑이를 따라 흐르던 땀방울 주변이 두 배쯤 시원하게 느껴졌다.


“와, 사형스님! 너무나 시원해요.”


시원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래, 땀이 난 뒤라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구나.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운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시련이나 좋지 않은 일로 바닥을 다져야만 한다.”


“바닥을 다져요?”


“그럼. 바닥 다지기는 멀리 높이 올라가는 것처럼 참기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이라야 그만큼 의미가 크다.”


“참기 힘든 고통일수록 의미가 크다고요?”


“암만. 너 시계 추가 왔다 갔다 하는 괘종시계 알지? 추가 좌우로 움직이는 거리가 짧다면 기어를 돌려야 하는 힘이 약해져서 시계는 금방 선다.”


“무슨 말씀인지 의미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리산은 10월 단풍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한 여름철 파랗고 무성한, 이 세상 숨 쉬는 오만 것들이 절정에 달했다. 수백 수천 종 나무와 작은 식물들이 경쟁하듯 존재감을 드러냈다. 파란 잎새를 기어오르는 이 벌레는 이름이 무엇일까?


사형스님 뒤를 따라서 진득하게 꽤나 오래 걸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깊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고갯길 때로는 내리막길을 계속 걷기만 했다. 세 시간은 올라 온 듯 했다. 정우는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나 아버지뻘도 지난 사형스님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똑같은 보폭으로 쉬지 않고 발걸음을 했다. 무협지에 나오는 소림사 스님처럼 축지법이라도 쓰는 걸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형스님! 아직도 멀었어요?”


자고로 처음 가는 초행길은 실제보다 멀게 만 느껴졌다.


“이제 얼추 왔느니라.”


얼추 왔다는 얘기가 얼마나 남았다는 것인지 애매해서 짜증이 났다.


벌써 두 번째 듣는 소리였다. 그러나 속으로 삭일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얼마쯤 더 걸었을까? 칠순이 다된 사형스님은 단 한차례 힘들어 하거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짜증 난 마음이 편안해질 무렵 멀찍이 바위가 절경이었다. 소림사 무술 영화에 나올듯한 기암절벽이 장관이었다. 바위에 달린 지붕도 보였다.


이렇게 높고 외진 곳 스님이 살고 있는 '암자'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정우는 사형스님을 쫓아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외견상 단 한치 다르지 않고 이목구비가 똑같은 인간이면서도 삼시세끼 밥 먹고 살아가는 방법은 수백 수천 가지였다.


운 방사 마당을 나선지 여섯 시간 남짓 됐을까? 주먹밥을 먹느라 중간에서 겨우 십분 남짓 쉬었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사형스님은 근력이 한창 때인 정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오래 쉬면 쉬었던 기계를 새로 돌려야 하는 것처럼 오히려 힘들다고 했다. 삼시세끼 먹어야 기운이 나는 몸을 기어로 돌리는 기계와 비교했다.


***


드디어 대문도 마당도 없는 ‘연주암’에 도착했다. 제비가 초가집 추녀에 흙과 지푸라기로 집을 지은 듯 바위 난간에 지은 자그만 암자였다.


사형스님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스님이 소나무 밑에서 한가하게 새 먹이를 주다가 두 사람을 맞았다.


"나무관세음보살!"


"어서 오세요.”


사형스님과 스님은 동시에 합장을 했다.


“주지스님! 별고 없으시지요? 4개월 만에 뵙습니다.”


꼬리가 긴 두 마리 새가 소나무 주변을 낮게 날다가 외부 손님한테 아는 척을 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새벽이면 이슬 내리는 소리, 요 녀석들이 밥 달라고 지저귀는 소리 듣는 거 말고는 별일이 있을 게 있나요.”


사형스님이 주지스님이라고 부르는 ‘노승’은 움푹 패인 눈빛이 살아 있었다. 이마에선 빛이 나고 목소리도 징소리처럼 높은 음이었다.


말씀 하시는 느낌이나 차림으로 보아 사형스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것으로 느껴졌다. 이슬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말에 약간은 신비함까지 느껴졌다. 도대체 새벽녘 이슬 내리는 소리를 어떻게 듣는단 말일까?


따뜻한 봄이 되면 초가집 추녀, 강남 갔던 제비 부부가 날아와 서까래 사이 집을 짓는 것처럼 '연주암' 은 경사진 암반에 지어진 자그만 암자(庵子)였다.


‘절간’이라면 기본인 대웅전은 고사하고 아이들 장난감처럼 부처님을 모신 ‘사당’도 ‘절방’도 콧구멍처럼 좁았다.


누가 이런 높고 위험한 산 꼭대기에 새집보다 조금 큰 암자를 지었을까? 세찬 바람이 불면 부서져 나뭇잎처럼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이런 곳에는 전기는 고사하고 물 한 방울 없을 것 같았다.


와! 이런 척박한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가 있구나? 순간 비바람 눈보라가 쳐도 꼬박꼬박 삼시세끼 나오는 세 평 감방은 호사스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물의 으뜸 인간이 깃털처럼 가볍게 산다는 생각도 들었다.


***


연주 암은 하루 한 차례씩 500미터를 내려가야만 길어 오는 물 한 주전자로 하루 큰 불편 없이 생활한다고 했다. 칠순이 지난 노승(老僧)이 매일 500미터를 내려가 물 한 주전자를 받아 오다니? 세찬 파도가 밀려오듯 물 한 방울 소중함이 생명수처럼 진하게 느껴졌다.


“사형, 금년도 이제 조금만 지나면 단풍 들고 앙상한 나뭇잎 지면 추워질텐데, ‘운방사’로 내려가시죠. 춥고 불편하신데 왜, 고집을 하세요.”


사형스님은 이곳 스님을 ‘사형’이나 ‘주지스님’이라고 번갈아 불렀다. 아마도 두 분 스님이 나누시는 말씀으로 보아 이곳은 운방사에 딸린 암자로 보였다. 단지 운방사와는 거리가 멀어서 꼬박 다섯 시간이 걸리는, 극기 훈련한다는 느낌이었다.


이 때 두 스님이 나눈 얘기를 알아 듣기라도 한 듯 꼬리가 긴 새가 날아와 '짹짹짹' 아는 척을 했다. 소나무 한쪽 가지에 짚으로 엮은 새집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새벽이면 부처님 공양은 누가 올리고, 이 녀석들 밥은 누가 준단 말입니까? 겨울철은 물도 덜 쓰게 되고 괜찮아요.”


주전자 물은 덜 길어 와도 된다는 의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줌도 안 되는 이런 이유쯤은 먹다가 남긴 잔반처럼 아무것도 아니련만, 부처님께 올려야 하는 공양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 먹이 때문에 내려갈 수 없다는 주지스님 머릿속 정신 세계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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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화 주지스님! 계세요? NEW 7시간 전 90 6 12쪽
38 38화 도연스님과 연주 암 가는 길 24.09.17 144 7 12쪽
37 37화 VIP 룸 24.09.16 180 9 12쪽
36 36화 변호인 24.09.15 208 8 12쪽
35 35화 막 내린 오야붕 +2 24.09.14 221 10 12쪽
34 34화 이모님!!! 24.09.13 251 10 12쪽
33 33화 운명 24.09.12 269 11 12쪽
32 32화 약장수, 딴따라! 24.09.11 269 7 12쪽
31 31화 이정우 입니다! +2 24.09.10 303 11 12쪽
30 30화 칠순잔치 +1 24.09.09 347 10 12쪽
29 29화 정우와 사형스님은 부자(父子)? 24.09.08 341 13 11쪽
28 28화 단감, 매실나무 24.09.07 372 12 12쪽
27 27화 잡념(雜念) 24.09.06 426 11 12쪽
26 26화 인과응보(因果應報) 24.09.05 432 10 12쪽
25 25화 용순이 실종 +1 24.09.04 410 13 12쪽
24 24화 박수무당은 아니지? +2 24.09.03 410 11 11쪽
23 23화 동가 숙(宿), 서가 식(食) +1 24.09.02 466 17 12쪽
22 22화 운방사 백중 +1 24.09.01 528 15 12쪽
21 21화 지리산 백사 +2 24.08.31 545 19 12쪽
» 20화 지리산 연주암 +1 24.08.30 590 15 12쪽
19 19화 깡패 양아치 +2 24.08.29 610 13 12쪽
18 18화 스님과 재소자 +1 24.08.28 646 14 11쪽
17 17화 회장님 제안 거절 +1 24.08.27 653 17 12쪽
16 16화 원석(原石), 정우 +1 24.08.26 694 18 12쪽
15 15화 서울 나들이 +1 24.08.25 718 19 11쪽
14 14화 오야붕 닮은 회장님 +1 24.08.24 760 17 12쪽
13 13화 망나니 ‘용순’이 아빠 +2 24.08.23 795 20 12쪽
12 12화 별의별 사람들 +1 24.08.22 799 18 12쪽
11 11화 탁발(托鉢) +1 24.08.21 877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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