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한 깡패가 너무 유능하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와천아재
작품등록일 :
2024.08.11 14:15
최근연재일 :
2024.09.18 09: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27,639
추천수 :
633
글자수 :
206,526

작성
24.08.31 09:00
조회
544
추천
19
글자
12쪽

21화 지리산 백사

DUMMY

“주지스님! 저 놈은 운방사 아궁이에 불 넣겠다고 제 발로 찾아 든 놈입니다.”


사형스님이 정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우 역시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을 알고 슬며시 가까이로 왔다.


“안녕하세요? 주지스님! 이정우입니다.”


이제 사 이곳 스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주지스님은 도회지 길거리서 만났다면 쇠붙이, 빈 병, 파지나 줍는 딱 거렁뱅이 모습이었다. 지방 하나 없는 피부가 뼈에 다림질 한 듯 말라 붙었다.


“젊은 놈이 험한 곳까지 왜 왔나 했더니, 절간에서 부처님 말씀을 배우겠다고 찾아 든 놈은 아니었구먼?”


“운방사에 온 지 꽤나 됩니다. 나랏밥을 먹고 나온 놈이라서 누구에게든 진 빚도 없고, 말귀를 제법 잘 알아 듣는 영민한 놈입니다.”


“함박 귀, 한자리서 부처님 말씀을 공부할 흔한 상은 아니다 생각했는데, 공짜 밥을 먹고 새로 살겠다고 나온 놈이었구먼?”


독야청청(獨也靑靑) 지리산 꼭대기서 청빈하게 사는 스님이라고는 했지만, 내 뱉는 언사는 화가 날만큼 상소리에 가까웠다.


“예, 주지스님! 덕담 한 말 씀 내려 주시지요?”


사형스님이 사정 하듯 말했다. 스님은 정우를 위아래로 살폈다. 정우와 눈빛이 마주쳤다. 초라한 행색과 달리 주지스님의 깊숙한 눈빛은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매눈을 닮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 순간 눈길을 피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눈싸움에선 정우가 여지없이 패했다.


“이 곳은 워낙 산 중이라 먹을 것이 없어서 바람과 자연을 먹고 산다. 너 이놈, 정우라고 했지?”


“예, 주지스님! 이 정우요.”


그러나 정우역시 ‘함박 귀’에 ‘흔하지 않은 관상’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은 무슨 말을 할까 관심이 쏠렸다.


“요 아래, 샛길로 한참 내려가면 표주박 낙수(落水)가 있을 거야. 거기 주전자 가지고 내려가서 물 길러 오너라.”


기껏 '물 받아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어차피 받아오는 길, 넉넉하게 받아 오게 다른 주전자는 없어요?”


“오호, 그 녀석. 시키지도 않는 일까지 생각하고. 거 참, 쓸 만한 ‘구석’이 있는 놈이구나.”


정우는 순간 스님이 자신 옛날 이름 ‘구석이’를 입에 올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이 구석’ ‘저 구석’ ‘방 구석’ 이라며 놀림을 당했던 이름이었다.


첫 만남! 속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이건 의도 된 것일까?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쩌면 운명을 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구불구불하고 경사진 길을 내려갔다. 토끼나 고라니가 다닐만한 좁은 길 양쪽에서 무성하게 자란 잡풀이 발목을 간지럽혔다. 이런 잡풀은 낫으로 베고 1주일만 지나면 다시 지금처럼 무성하게 자랐다.


스님이, 날마다 지나가는 길이었기에 눈길 발자국처럼 희미한 흔적이 남았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경사진 깔딱고개 구간은 누가 쌓는지 계단을 돌로 얼기설기 쌓았다.


이런 옹삭한 오르막 내리막 길을 칠순 스님이 하루 한 차례씩 물 주전자를 들고 다닌다는 것이 죽지 못하고 사는 질긴 삶으로 짐작되었다.


분명 말씀 하신 것으로 미루어 살아가는 이유는 새벽이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과 주변을 ‘날아다니는 새 먹이 주는 일’이라고 했었다. 이 두 가지 일을 위하여 이런 곳에서 이토록 황폐한 삶을 산단 말인가?


500미터는 초행인데다, 경사가 심한 산길이라서 더 멀게 느껴졌다. 족히 20여분은 내려 온 듯 했다. 칡넝쿨 닮은 오만가지 잡풀이 편안한 발걸음을 방해했다.


드디어 당산나무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활처럼 곡선으로 휘어졌다. 자연의 신비를 어줍은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화선지에 먹칠 하는 기분이었다.


'와, 멋지다. 이런 바위가 있다니 신기했다.'


금방 어디선가 산신령이 나타나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억수 같은 큰 비가 내려도 바위 아래는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박으로 만든 작은 표주박이 걸려있었다. 누가 썼는지 ‘연주암’이라고 쓴 희미한 글씨가 보였다.


두 살쯤 되는 애기가 오줌 누듯 바위 틈에서 낙수가 졸졸졸 떨어졌다. 이렇게 크고 높은 바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으아, 으아아아아앗!!!!”


담이 크기로 소문난 정우가 혼비백산 뒷걸음질 쳤다. 기다란 백사가 몸을 늘어뜨리고 약수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곤 둘이서 눈길이 마주쳤다. 얼마 전, 농담하듯 보국스님한테서 연주암에 가면 100년 된 백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형스님이나 주지스님은 백사 얘기를 단 한 차례 하지 않았다. 정우는 백사는 영물(靈物)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얘기를 감방가기 전부터 들었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처럼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지팡이 같은 막대기를 주워 한 발짝 한 발짝씩 약수터로 갔다. 불발탄을 보고 조심스럽게 걷는 것처럼 살금살금 갔다.


거대한 백사는 자신이 약수터 주인이라는 듯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주변에 살던 녀석이 물을 먹으러 온 듯 했다. 백사에겐 정우가 방해꾼이었고, 정우에겐 백사가 방해꾼이었다.


눈처럼 하얀 등 비늘, 번쩍번쩍 빛나는 연노랑 비늘이 수 놓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정우는 지금껏 어디서도 이런 아름다운 뱀을 보지 못했다. 입이 벌어지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와, 너 진짜로 잘 생겼구나? 무섭지도 않고?”


사람들이 살기조차 힘든 이런 황폐한 곳에서 말로만 들었던 영물을 만날 수 있다니. 주지스님의 ‘이슬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말씀이 한결 친근하게 느껴졌다.


“잘 생긴 백사야! 너 이름 뭐니?”


정우는 이 녀석과 무슨 말인가를 나누고 싶었다.


“네가, 사는 이 동네가 나도 맘에 드는구나.” 연신 감탄이었다.


한 발이 훨씬 넘는 거대한 백사가 하나도 징그럽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지금껏 움직임이 없던 녀석이 말을 시키자 스르르 낙엽 구르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정우는 오늘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다.


용 꿈을 꾸듯 누군가 만들어 놓은 일을 위하여 사형스님은 연주암을 가자고 했고, 주지스님은 물 길어 오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


한 주전자 물을 받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시험할 정도로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도무지 차오르지가 않았다. 풀섶으로 자취를 감춘 백사 모습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다시 나타날 것만 같았다.


주전자를 대 놓고 사방 천지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산과 하늘 뿐이었다. 여름 산은 오만 것들이 풍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인이나 괴짜 같은 사람들은 수 없이 많고 살아가는 방법도 수만 가지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양손 주전자 물을 받아서 다시 연주 암으로 가야만 했다. 깔크막에선 무거운 주전자를 수없이 바닥에 놨다 들었다 반복했다.


세 평 남짓 감방, 3년 징역도 이 정도 척박한 것은 아니었다.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없고 공간이 좁아서 그렇지, 돌과 나무만 있는 이곳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곳은 징역 생활을 사서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된 수행(修行)을 위하여 더러운 바닥에 엎드려 수족(手足)을 이용, 헤엄치듯 기어가는 티벳 승려들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가득 담아 왔느냐? 쏟지 않고?”


“예, 한 방울 물도 아까워서 흘리지 않았습니다. 근데, 두 분 스님! 약수터에서 큰 백사 봤어요.”


정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조금 전 일을 말하느라 입에 침을 튀겼다.


“눈길이 마주쳤는데, 잘 생긴 놈이 하나도 무섭지 않더라고요.”


“사람한테 몸을 감추는데, 기특하게도 첫날 백사를 봤단 말이냐?”


“예, 틀림없이 봤다니까요. 황금빛 비늘이 번쩍번쩍 눈 부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백사를 보겠다고 와서 번번이 허탕이었는데, 안 그래요? 주지스님!”


해골 닮은 주지스님도 사형스님을 주지스님이라고 했다.


“예. 엊그제는 상스러운 길 손이 찾아와서 이놈을 데리고 사형을 봬러 왔는데, 부처님이 저희를 인도 하셨나 봅니다. 심부름은 사형이 시키지 않았습니까?”


두 분이 나누는 얘기는 도무지 이해도 경지도 알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두 분은 백사가 살고 있다는 것을 휜히 아는 듯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고생 했구나. 한 주전자 물로 하루를 사는 일을 가슴에 담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눈 아래로 쳐진 '함박 귀' 가 흔한 상(相)은 아니라서 초년이 약해 보이긴 하다만 갈수록 대운이 그득할 상이야.”


“대운이 가득할 상이요? 호호, 주지스님!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간은 어디라도 배고픈 중생들에게 공양을 제공했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준비가 쉬운 국수 공양을 주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연주암은 공양 대신 말린 잎을 우려낸, 맛없는 차가 고작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주먹밥으로 요기를 했으나, 오후라선지 허기가 졌다. 심신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


밤 벌레 우는 늦은 저녁이 돼서야, 운방사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보국스님과 민가로 탁발을 나갔을 때처럼 열 시간도 넘게 걸었다.


“사형스님! '연주암'에서 주지스님이 ‘구석이’라는 저의 본래 이름을 말씀 하셨는데,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사형스님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주지스님은 산 꼭대기 암자서 뭘 먹고 사시는 거예요?”


정우는 오늘 하루 딴 세상을 보고 온 듯 궁금한 것들이 봇물을 이뤘다.


“사형도 속세가 궁금한 날이면 민가로 내려와 탁발을 다니지. 어디 그 뿐인 줄 아느냐? 지천(地天)에 먹을 것이 깔려 있다고, 철마다 운방사에서 보내는 공양미도 거절한다.”


“지천에 먹을 것이 깔려요?”


“암만. 사형은 자연에서 자라는 것들을 독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눈다. 여름철이나 가을철이면 산에서 나는 과수나 버섯, 나물을 체취해 말려서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겨울철이면 주식으로 할거야.”


"예에. 혼자 깊은 산에서 무섭지도 않은지 모르겠어요. 어찌 보면 도술을 부리는 산신령님 같기도 하고.”


“이곳, 운방사서 주지스님을 하시다가 발길 닿는 데로 떠나겠다며 '연주암' 에 기거한 지 십 수년 되었다.”


“그럼, 주지스님도 옛날엔 운 방사에 계셨어요?”


“당연하지. 이곳이 큰집인데. 네 놈도 사형한테 좋은 말도 들었고 열악한 암자도 봤으니 느낀 점이 있을 거다. 삼시세끼 먹고 산다는 것이 뭔지도 깨달았을 테고.”


“맞아요, 사형스님! 황금빛 백사도 생각나고 오만 것들이 홍수를 이뤄요. 죄 짓고 징역 사는 감방 생활도 그렇게 척박하지는 않거든요.”


“그래 다행이다. 네가 작은 것이나마 느낀 것 같아서. 이제 열흘 뒤면 칠월백중인데, 내일은 여러 스님들과 전등을 달아야 하겠구나.”


“예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귀농한 깡패가 너무 유능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 변경 안내입니다. 24.09.05 260 0 -
39 39화 주지스님! 계세요? NEW 7시간 전 88 6 12쪽
38 38화 도연스님과 연주 암 가는 길 24.09.17 144 7 12쪽
37 37화 VIP 룸 24.09.16 179 9 12쪽
36 36화 변호인 24.09.15 207 8 12쪽
35 35화 막 내린 오야붕 +2 24.09.14 218 10 12쪽
34 34화 이모님!!! 24.09.13 250 10 12쪽
33 33화 운명 24.09.12 268 11 12쪽
32 32화 약장수, 딴따라! 24.09.11 268 7 12쪽
31 31화 이정우 입니다! +2 24.09.10 301 11 12쪽
30 30화 칠순잔치 +1 24.09.09 346 10 12쪽
29 29화 정우와 사형스님은 부자(父子)? 24.09.08 339 13 11쪽
28 28화 단감, 매실나무 24.09.07 370 12 12쪽
27 27화 잡념(雜念) 24.09.06 424 11 12쪽
26 26화 인과응보(因果應報) 24.09.05 431 10 12쪽
25 25화 용순이 실종 +1 24.09.04 408 13 12쪽
24 24화 박수무당은 아니지? +2 24.09.03 408 11 11쪽
23 23화 동가 숙(宿), 서가 식(食) +1 24.09.02 465 17 12쪽
22 22화 운방사 백중 +1 24.09.01 527 15 12쪽
» 21화 지리산 백사 +2 24.08.31 544 19 12쪽
20 20화 지리산 연주암 +1 24.08.30 589 15 12쪽
19 19화 깡패 양아치 +2 24.08.29 609 13 12쪽
18 18화 스님과 재소자 +1 24.08.28 645 14 11쪽
17 17화 회장님 제안 거절 +1 24.08.27 652 17 12쪽
16 16화 원석(原石), 정우 +1 24.08.26 693 18 12쪽
15 15화 서울 나들이 +1 24.08.25 717 19 11쪽
14 14화 오야붕 닮은 회장님 +1 24.08.24 759 17 12쪽
13 13화 망나니 ‘용순’이 아빠 +2 24.08.23 794 20 12쪽
12 12화 별의별 사람들 +1 24.08.22 798 18 12쪽
11 11화 탁발(托鉢) +1 24.08.21 876 2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