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물들이 착각한다 괴물 천재 피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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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유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1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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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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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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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별은 (4)

DUMMY

36화.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별은 (4)




···젠장, 왜 하필 많고 많은 소속사 중에 레드스타야?


이태주의 출연이 성사되는 장밋빛 미래인가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보자마자 부푼 꿈이 유리창처럼 와장창 깨져나간다.


물론 채정연 사건은 단순히 배우 본인의 잘못이긴 했다.

하지만 당시 소속사의 대응 과정이나 직원 입막음을 했던 정황을 봤을 때, 레드스타 임원진도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거기다 중요한 건, 당장 지금 이태주의 소속사는 레드스타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알기론 1인 기획사에 가까운 작은 회사 소속이고, 이태주가 단역을 전전할 때부터 같이 커 온 걸로 아는데.


혹시 중간에 이태주가 회사를 옮기기라도 하는 건가?


“좋습니다. 이걸로 한배를 타게 됐네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뜨거운 가운데, 내 몸은 멋대로 계약을 마무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주 일어선 이태주와 다시 한번 악수를 나눈다.


하지만 소년미 묻어나는 그 해맑은 미소가, 이제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확!


그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세상이 다시 뒤집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따듯한 분위기의 거실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를 뒤흔드는 어지러움에 내가 잠시 비틀거리자, 큼지막한 손이 내 어깨를 붙든다.


“감독님! 괜찮으세요?”

“···아. 예, 잠시 현기증이 나서.”

“현기증이요? 우선 앉으시죠. 물도 좀 드시구요.”


파란 니트를 걸친 현시점의 이태주다.

나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곧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를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친절하게 손수 내 손에 들려주는 물도 한 모금 마시고.


건너편의 진혜진 작가까지 걱정 담긴 시선을 보내오자, 나는 헛기침하며 변명했다.


“크흠. 어제 회식 때 자제한다고 했는데 좀 과음한 모양이네요.”

“···뭐, 뭐라구요?”

“아, 기사 봤어요, 감독님. 드라마 종방연 하셨다고.”


이태주가 다행이라는 듯 눈웃음을 짓고, 진혜진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좀 적당히 마시지, 왜 무리하고 그래요?!”

“작가님이랑 새 작품 들어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그만.”


적당히 넉살을 부리자 진 작가가 눈을 흘기다 고개를 홱 돌린다. 새침한 모습에 이태주는 밝게 웃음을 터뜨리고.

나는 머쓱한 척 뒷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금 갑작스럽긴 하네요. 오늘 미팅에 따로 배우분 오신다는 말은 없었거든요. 이 배우님은 혹시 어떤 일로···”


그 말에 진혜진과 이태주가 동시에 입을 떼려던 찰나.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캐주얼 정장 차림의 남자가 쟁반을 들고 걸어 나온다.


쟁반 위에 가득 담긴 테이크아웃 커피들과 간식들이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린다.

사람이 더 있었구나. 이태주 담당 실장인가?


“아, 감독님 오셨구나! 그럴 줄 알고 제가 커피 넉넉하게 사 왔습니다!”

“아휴, 대표님. 서빙은 저희 애들 시키면 된다니까 왜 직접 하세요.”

“하하. 아닙니다 작가님. 다들 집필 때문에 바쁘실 텐데, 이런 건 제가 해야죠.”


대표님이라고?


그렇게 말한 남자는 싱글벙글하며 테이블에 음료를 하나씩 내려놓는다.

그리고 빈 쟁반을 옆구리에 척 끼더니, 내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감독님! 작게 기획사 하고 있는 최병건이라고 합니다!”


최병건. 이 사람이 이태주 소속사 대표였구나. 그런 것 치고는 나이도 젊어 보이고, 초면에 태도도 무척 살갑다.


얼른 일어나서 인사를 받자, 주방 안쪽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최 대표는 진 작가 옆자리에 슬쩍 앉으면서 말했다.


“이거 참. 죄송합니다 감독님. 혹시 이번 작품 대본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작가님께 급하게 연락드린 건데. 본의 아니게 두 분 회의하시는데 끼어들게 됐어요. 저희 불찰입니다.”

“아, 괜찮습니다. 그보다, 대표님께서 먼저 대본을요?”


우리 쪽에서 먼저 연락을 넣은 건 아닌가 본데?


그러자 최 대표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이태주를 슬쩍 쳐다본다.


“네. 태주가 진혜진 작가님 작품을 워낙 좋아해서요.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중독입니다.”


그건 작가 입장에서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는지, 팔짱 낀 진혜진의 입꼬리가 움찔거리고 눈이 반짝거린다.


“으흠. 그건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하하, 네. 이 녀석이 작가님 첫 작품 <죽일놈의 사랑>부터 쭉 본방사수 해온 건 기본이고, 이제는 아예 블루레이에 대본집까지 사서 돌려보고 있습니다.”


최 대표의 말에 이태주는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고, 진혜진의 몸이 그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진다.


“···그래요? 쫌, 괜찮았나봐요?”

“괜찮다 뿐이겠습니까. 요즘은 회사 들를 때마다 직접 배역 들어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통에-”

“아, 형! 그 얘기까지 하시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저 이미지 가벼운 거 사람들 슬슬 눈치채고 있는데.”

“인마, 태주야. 작가 감독님 앞에서는 솔직해야지. 그리고 막말로 그게 네 진짜 캐릭턴데, 숨긴다고 숨겨지겠어?”


두 사람이 만담처럼 떠드는 모습을, 진 작가도 어느새 만족스럽게 웃으며 바라본다.


이래서 뜬금없이 이태주가 와있었던 거구나. 진혜진 작가와 사적으로 친분이 있나 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이태주를 배역에 고려하고 있긴 했는지, 테이블엔 이미 얇은 대본이 놓여 있다.


원래라면 나도 넝쿨째 호박이 굴러왔다며 마냥 좋아했을 텐데.

루프를 통해 본 게 있어서 표정 관리가 쉽지 않다.

밝은 얼굴로 떠드는 최 대표와, 레드스타 쪽 대표의 모습이 오버랩 돼서 이질감이 생긴다.


일단 이 두 사람 사이에 뭔 일이 생기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아니면 일이 벌써 생겼는데도 가면을 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동안 공치사를 주고받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한 최 대표가 겉옷을 챙겨 들며 말했다.


“아이고. 저희가 갑자기 쳐들어와 놓고는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요.”

“아니에요. 얼굴 봐서 좋았어요. 그리고 배우가 대본 받고 싶다는데 싫어할 작가 없죠.”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선뜻 대본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작가님.”


대본을 소중하다는 듯 품에 안고 일어나는 이태주를 보며, 진혜진이 말을 덧붙였다.


“보다가 원하는 배역 있으시면 편하게 연락주세요. 진지하게 검토해볼 테니까. 3부는 나오는 대로 회사 쪽으로 보내드릴게요.”

“정말입니까? 그럼 염치 불구하고 꼭,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연신 허리를 꾸벅이는 최 대표를 보며, 나도 그쯤 진 작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던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대표님. 이 작품 출연하게 되면 계약은 바로 가능하신 거죠? 편성되면 7월 말 첫방이라 4월까진 얘기 끝나야 하는데.”


이태주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가볍게 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아, 그. 계약은 제가 추후에···.”

“그럼요, 감독님! 저야 언제든 가능합니다.”


낯빛에 당혹이 스쳐가는 최 대표 대신 이태주가 대신 웃으며 답했다.


곧이어 최 대표도 입꼬리를 올리며 힘주어 대답했지만, 짧은 순간의 변화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역시 뭔가 있긴 있다는 거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의 손을 다시 한번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현관을 빠져나가자, 옆에 서 있던 진혜진이 입을 샐쭉거리며 말했다.


“···뭐야. 인상 좋았나 봐요? 바로 계약 얘기 꺼낼 정도면?”

“그렇게 보였습니까?”

“네. 뭐, 안 그래도 지난번에 순경에 이태주 남혁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지 조금 참고하긴 했어요. 이태주 나쁘지 않죠. 순수하고 깨끗한데, 어딘가 좀 닳아있는 미청년.”


···이거 야단났네. 작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대본 쓸 때 배우를 떠올리면서 썼다는 건데.


자칫하면 다른 배우는 얼굴 맞대보지도 못하고 프로필에서 걸러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혜진이 다시 거실의 테이블에 앉으면서 보기 좋게 웃는다.


“나도 좋아요, 이태주.”



*



갑작스레 터진 루프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긴 하지만, 나는 먼저 오늘의 목적을 떠올렸다.

기념비적인 첫 작가 미팅이다.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일단 나온 대본부터 읽었다.


연락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대본은 벌써 2부까지 나와 있었다.

거기다 텅 비어있던 제목도 어느새 새로운 이름이 자리하고 있다.


<커넥트>.


연결이라. 읽자마자 아주 잘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메인 소재부터 20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두 주인공을 연결해주는 공중전화인데다,

주 무대인 마을의 사람들도 그 간극을 메워주는 연결의 매개체로써 움직인다.


진혜진 작가가 지금까지 한글만 쓰는 작품명으로 화제가 되긴 했는데, 그게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꼭 맞는 작품명을 찾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첫 장을 넘기자, 충치처럼 거슬리던 잡념들이 확 날아간다.


정신없이 푹 빠져서 대사와 지문을 읽다가, 헛손질을 몇 번이나 한 후에야 그게 2부 마지막 페이지라는 걸 깨달았다.


“···뭐, 어떤데요?”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지, 스마트폰을 보며 딴청 부리던 진혜진이 툭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긴 하네요.”

“···뭐라구요?”

“여전히 재밌기도 하구요. 1부는 오히려 이 버전이 저한텐 더 잘 맞네요. 캐릭터 동기가 명확해지면서 플롯도 더 깔끔해졌어요.”

“···흥. 그냥 재밌다고 하면 될 걸 왜 자꾸 앞에 사족을 달아요? 그때도 그러더니.”


틱틱거리면서도 진혜진은 우쭐한 얼굴로 일회용 커피잔을 홀짝였다.

머리칼을 자꾸 귀 뒤로 넘기는 게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나도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받았다.


“그때도 그랬다니. 언제요. 5년 전이요? 그걸 아직 기억해요?”


말을 듣자마자 진혜진이 움찔한다. 귓불이 점점 빨개지더니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무, 무, 무슨 소리에요! 내가 언제 그때라고 했어요! 그쪽이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그래요? 잘못 들었나? 근데 왜 화를 냅니까?”

“화 안 냈어요!”


씩씩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게 영 설득력이 없긴 한데, 대신 글에 설득력이 가득하니까 됐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몇 번 보다 보니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보고 있던 대본을 덮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 정도면 매니지먼트 쪽에 돌리기엔 충분하겠네요. 기획안이랑 제작 투자용으로는 일단 주연 4인방 먼저 잡아두면 될 것 같은데. 후보 명단 짜둔 거 있습니까?”


그러자 이쪽을 한껏 흘겨보면서도, 진혜진은 태블릿 화면을 켜서 내게 내밀었다.


살펴보니 4명의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들, 심지어 단역 후보의 명단까지 주르륵 나와 있었다.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이런 부분은 또 엄청 세심하네.

대본 자체도 그렇고, 새삼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게 탑급의 작가라는 게 실감 난다.


일단 핵심 인물부터 살펴보면···

역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할 순경 ‘준호’ 역에는 1옵션으로 이태주, 2옵션으로 남혁진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약간 껄끄러운 티를 냈는지, 진 작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요?”

“아뇨. 그렇다기보단··· 작가님은 남혁진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진혜진은 턱을 살짝 괴더니 곰곰이 생각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좋긴 한데, 몸 좋고 까무잡잡한 게 시골 청년 같은 느낌이 있어서. 알다시피 순경은 도회에서 막 도착한 설정이잖아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좀 아니다 싶은 건 아니죠?”

“네 뭐···. 근데 뭐에요? 아깐 이태주 좋아하는 거 같더니. 변덕 심한 스타일이에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던지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예 숨길까 싶다가도, 말하자면 이제 작품 끝까지 같이 갈 사인데. 어느 정도는 털어놓는 게 좋겠지 싶었다.


“이태주 배우 관련해서 들은 얘기가 있어서요.”

“···네? 무슨 얘기요?”

“소속사 계약 문제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계약 문제요? 좀 전에 두 사람 사이좋은 거 직접 봐놓고선 왜···”


진 작가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손뼉을 마주쳤다.


“아. 이게 미주 언니가 말했던 그거구나.”

“···네?”

“언니가 그랬거든요. 작품 하면서 그쪽이 신통방통하게 자꾸 정보를 물어왔다고. 리스크 관리는 맡겨두라던데?”


···대체 전미주 작가님이 뒤에서 뭘 퍼뜨리고 다니시는진 모르겠는데.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믿어준다면 일이 한결 수월하다.


“뭐 어쨌든. 아예 이태주를 포기할 건 아니지만 남혁진도 만나보는 방향으로 하죠.”

“그래요, 그럼.”

“좋습니다. 그러면 다음은··· 창수 역.”


강력계 형사 출신의 파출소장 창수.

순경 준호와 함께 메인 포스터를 장식할 핵심 인물이고, 20년 전인 2002년의 무대를 거의 모노드라마처럼 누비는 캐릭터다.


이미지 매칭도 매칭이지만, 무엇보다 묵직한 연기력. 사건에 직접 얽혀 감정을 표현해야 할 캐릭터라 연기를 중점적으로 캐스팅해야 한다.


“강인수, 김달환, 여진희······.”

“뭐, 왜요 또.”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귀신같이 의도를 알아챈 진혜진이 눈을 가늘게 뜬다.


물론 작가가 올린 세 사람의 이름도 가볍지는 않다. 전부 연기로는 크게 밀리지 않을 중년 배우들이고, 강직하고 올곧은 이미지가 캐릭터에 부합한다.


하지만 내가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그리고 좀 전에 다시 읽었을 때마저도 머릿속에 떠오른 배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유태웅 배우는 어떻습니까?”

“···네? 유태웅이요?”


그 이름을 듣자 곧바로 대꾸하려던 진혜진의 입이 도로 닫힌다.

단어를 몇 번이나 굴려보다가, 입술이 달싹이더니 결국 다시 열린다.


“···유태웅 좋죠. 나라고 그 생각 안 해본 줄 알아요? 근데 그분이 드라마를 하겠냐구요. 충무로에서도 몇 안 되는 중년 간판인데.”


말마따나 유태웅은 앞서 언급한 세 배우와는 달리 영화판 위주로 활동하는 배우다.

그나마 했던 드라마도 거의 10년 전에 했던 공중파의 일일 드라마가 전부고.


진혜진 작가의 가상 캐스팅 명단에는 올랐겠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지워버렸을 이름이 바로 유태웅이다.


“하게 만들어야죠. 작가님 대본이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거라 보는데요?”

“됐어요! 아부하려면 한참 늦었어. 아무튼 뭐,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에요? 혹시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 아님 아담 픽쳐스, 거기서 유태웅 잡아줄 수 있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뭐에요? 말로는 유태웅이 뭐야. 디카프리오도 잡지!”


싱싱한 활어 같은 반응에 나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대신, 알만한 사람을 알거든요.”



*



SR 엔터테인먼트, 팀장 우승혁은 책상에 턱을 괸 채 사무실의 소파를 바라보았다.


가죽 소파에는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가로로 누워있었다.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는지 소파 중간이 푹 들어가서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마치 소파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다.


사무실 내부는 적막한 가운데, 사내의 손에 들린 휴대용 콘솔 게임기에서 철없는 효과음만 흘러나왔다.


뿅- 뿅-


그 소리에 착잡한 얼굴을 쓸어내린 우승혁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형님.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만 계실 거에요. 이제 극장도 슬슬 다시 시동 거는데. 지금 크랭크인 해야 관객수 확 치고 올라올 때 스크린 들어갈 수 있다구요.”


그러자 곰 같은 사내, 유태웅이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그렇구나. 올해 관객 제일 많이 들어온 게 뭐였지?”

“<빅토리>요.”

“그거 몇만인데?”

“···200만이요.”

“193만, 이 시끼야. 수필름 그거 때문에 80억 적자 떠안고 문 닫았다.”


우승혁은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물어봤냐고 구태여 따져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저 인간의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에.


사실 지금껏 무수한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그중 어느 것도 유태웅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게 충무로의 영화사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근 몇 년을 성실하게 사무실에 누워 지내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아니 뭐. 그럼 딱 정하기라도 합시다. 예? 언제까지 노실 건지 기간이라도 정해두자고요.”

“뭐? 야 인마. 내가 그냥 노는 것처럼 보여?”

“예.”

“잘 봤네 그럼. 어쩐지 너 보는 눈은 있더라.”

“아이고···”

“오늘 점심은 중식 어떠냐? 갑자기 춘장 땡기네.”


우승혁이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만 푹푹 쉬고, 유태웅이 실실 웃으며 배달앱을 뒤지던 바로 그때.


-지이이잉


우승혁의 스마트폰이 울렸고, 화면에 이름이 떴다.


[이주현 캐스팅 디렉터]


익숙한 이름을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어, 이 디렉터. 이게 대체 얼마 만이에요? 하하하. 드라마 쪽 건너갔단 얘긴 들었는데. 아유, 진작 밥 한 끼 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바빠가지고······”


그 대화 소리에, 소파에 누워있던 유태웅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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