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물들이 착각한다 괴물 천재 피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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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유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1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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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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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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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끝은 없고, 시작만이 (3)

DUMMY



30화. 끝은 없고, 시작만이 (3)




처음이다. 사람의 접촉이 아닌 사물의 접촉으로 루프가 발생한 건.


그래서 그런지 눈앞이 아주 깜깜하다. 꺼버린 TV 같은 암흑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이게 진짜 루프가 맞나, 혹시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슬슬 겁이 나려던 찰나.


어디선가 먹먹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그게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와아··· 이게 대체 책장만 몇 개예요? 이게 다 대본이에요?

-뭐, 시놉시스도 있고, 대본 초고도 있고. 일단 내 손에 한번 닿았던 건 전부 다 여기 처박아 뒀지.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 그리고 천진하면서도 자신감이 실린 청년의 목소리다.


일단 내 목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둘 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 여기 있네.


가까이 다가온 중년의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이 확 끌려 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눈앞이 밝아진다.


동시에 수염 지긋한 남성의 얼굴이 크게 드러난다.


그런데, 시점이 평소의 루프와 다르다. 마치 내가 사람이 아니라, 작은 동물이나 사물이 되어버린 듯한 앵글이다.


···설마 이거, 내가 만진 시놉시스의 시점인가?

내 영혼이 종이 뭉치에 빙의라도 했다는 거야?


거기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나를 내려다보는 이 사람.


이 사람 지영국 CP잖아? 주름살도 좀 늘었고, 수염도 희끄무레한 게 지금과 다르긴 하지만 분명히 내가 아는 지 팀장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바로 이 시놉시스야. 제목도 없고, 작가명도 없어. 줄거리까지 대충 몇 줄 끄적여놓은 이 기획을 이진혁이 처음 들고 와서 밀어붙일 땐 아주 기가 찼었는데···.


과거를 회상하듯 읊조린 지영국이 씩 웃으며 옆을 쳐다본다.


-그놈은 아주 보란 듯이 성공시키더라고.


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도 잠시, 청년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하하. 그랬었죠. 저도 기억나요. 심지어 제작 때 온갖 사건 사고가 다 일어나서 삼재 붙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는데. 나중에 끝나고 보니 그게 다 드라마 잘되려고 그랬던 건가 싶더라구요.

-맞아. 너무 오래돼서 까먹고 있었네. 너도 이 작품 조연출로 들어갔었지?

-네. 저 아무것도 모를 때 박 피디, 아니 박 감독님이랑 같이 숨도 못 쉬고 굴렀죠.


두 사람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이내 지영국이 시놉시스를 청년에게 넘겨주는 듯, 내 시야가 휙 돌아간다.


그리고 눈앞에 드러난 청년의 모습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김주성. 막내 녀석이다.

녀석답지 않게 인중에 거뭇한 수염까지 기른 어색한 모습에, 나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에 또 한 번 소름이 돋는다.


-햐··· 정말 옛날 생각나네요. 저도 이 기운 받아서, 이번 작품 한번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래. 입봉한다고 다 감독 되는 게 아니야. 실력만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매 작품 처음 같은 마음으로 정진해야 이진혁이처럼 스타 감독 소리도 듣고, 박선영이처럼 자리도 잡고 하는 거지.


그러자 결연한 얼굴로 지영국을 쳐다본 김주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국장님.


뭐, 뭐가 어째?

국장에, 스타 감독에, 누가 뭘 한다고?


하지만 생각을 이어갈 새도 없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시야가 맹렬하게 돈다.


-확!


익숙한 멀미와 어지러움이 관자놀이를 파고든다.



*



휴게실 테이블 위, 쓰러진 커피 캔에서 커피가 질질 새어 흐른다.


하지만 나는 그걸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어안이 벙벙해져 웃음만 흘리고 있다.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박 피디와 막내 모두 데뷔를 하고, CP는 국장이 되는 데다, 나는 스타 감독 소리까지 듣는다고?

하하하, 이게 말이야 뚱딴지야?


사물과의 접촉으로 루프가 일어난 것만 해도 놀라운데, 심지어 스케일이 몇 년 단위로 뛰어버려서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막내가 입봉을 하려면 지금으로부터 못해도 5년은 흘러야 할 텐데.

무려 5년 뒤의 미래를 내가 봤다는 건가?


···그래도 마치 내 이상향을 실제로 빚어놓은 듯한 기억이라, 일단 기분은 좋긴 하다. 나도 잘되고 주위 사람도 잘 되는 미래니까.


그리고 지금껏 내가 봐왔던 루프는, 어떻게든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던지라 막무가내로 안 믿을 수도 없다.


일단 내가 본 것들을 기준 삼아 움직여야 하는 건 맞긴 한데···


그러고 보니, 이번 루프에는 달라진 점이 또 하나 있다.

그동안은 말하자면 실패를 막기 위해 시간이 돌아갔다면, 이번에는 오히려 그 반대다.


성공을 하기 위해 내가 뭘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준 느낌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내가 진짜 좀 전의 미래처럼 만들 수 있을까 걱정되긴 하는데.


나는 여전히 손에 들린 시놉시스, <Untitle>을 보며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아무래도 이놈이 그 성공의 핵심이 될 것 같다고.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으로 머리는 복잡하지만, 일단 먼저 읽어보자.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루프가 벌어졌었으니까.


망설임 없이 뒷장을 펼쳤고, 내가 좀 전에 봤던 기획들과는 달리 아주 빈약한 로그라인과 줄거리, 그리고 제작 현황이 보였다.


[한적한 시골 마을. 20년 전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으로 마을이 점점 망해가는 가운데.

마을 파출소로 전근한 순경이 낡은 공중전화를 통해 과거의 파출소장과 연락하게 되고,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미스터리를 해결해나가기 시작한다.]


첫 인상은 일단 범죄 스릴러에, 미스터리와 시간여행 장르를 섞은 것 같다.


슬쩍 봤을 때 소재는 그렇게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첨부된 대본이 없어서 지금 뭘 판단하긴 힘들고.


제작 현황에도 당장 이 대본의 출연이나 협찬을 따낸 게 아니라, 제작사에서 지금까지 어떤 배우를 썼고, 어떤 투자를 유치해왔는지 정도가 적혀 있었다.


당연하지. 기획이 이렇게 빈약한데, 이것만 보고 선뜻 계약할 곳은 없을 거다.


근데 이걸 내가 CP한테 가져다 밀었다고? 바로 옆에 다른 메가톤급 대본들을 두고?

나 같아도 미친놈인가 싶었겠는데.


···혹시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제작사 이력에 적힌 배우들이나 협찬사, 제품명 따위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 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끼던 찰나, 나는 설마 하는 생각에 무심코 지나쳤던 첫 번째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제작: 아담 픽쳐스]


···아담 픽쳐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곳은 내가 GTBN에 입사하기 전, 3년 넘게 근무했던 바로 그 외주 제작사였다.


이 대본을 여기서 피칭한 거구나.

떠나온지도 벌써 2년이 다 돼가는데. 가끔 연락한다고 해놓고 아직까지 얼굴 한 번 못 봤네.


이 사람들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참에 대본 얘기도 할 겸, 나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아담 픽쳐스의 신임 대표 엄혜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책상을 쓸었다.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지난 수년, 얼마나 많은 모멸과 핍박을 견뎌야 했던가?


고작 직원이 10명, 이제는 9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제작사지만, 엄혜정은 결국 난관을 이겨내고 왕좌를 쟁취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마치 자신에게 주는 상이라도 되는 듯, 제 이름 박힌 명패를 한참이나 쓰다듬던 엄혜정은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크흠. 들어와.”


헛기침하며 말하자, 누군가 문을 열고 머리를 척 숙인다. 자신의 뒤를 이어 제작팀장 자리를 맡게 된 김 피디였다.


“정례 보고 하겠습니다.”

“음.”

“임미향 작가가 대본 계약 종료하겠답니다.”

“···뭐?”


엄혜정은 충격받은 얼굴로 겨우 말을 뱉었다.


“···임 작가 작품이면, 우리가 가진 카드 중에선 1번이잖아? 얼마 전까지 케이블 편성 조율하고 있다지 않았어?”

“맞습니다. 근데 채널 쪽 감독이 다른 대본 알아보고 있다네요. 그리고 임 작가는 그게 충분히 푸쉬 못한 우리 탓이라 생각하는 거 같고.”

“···젠장.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건데. 감독이라도 다시 만나봐야 하나?”

“늦었을걸요?”


그렇게 말한 건, 대표실로 들어온 또 다른 제작 피디였다.


“···늦었다니? 왜?”

“제가 알기론 최 감독, 마이스토리 쪽이랑 얘기됐다고 들었거든요.”


마이스토리. 그 이름을 듣자 엄혜정은 이를 빠득 갈고, 김 피디는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또 돈이야? 마이스토리에서 감독 쪽에 진행비 꽤 넣어준 모양이지?”

“꽤도 아니고, 아주 두둑히요.”

“더러운 놈들.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장사를 그딴 식으로 해? 방송국이 옛날 같은 줄 아나?”

“그야 아직도 잘 먹히니까요.”


여상스러운 피디의 대답에, 엄혜정은 미간을 콱 찌푸리며 책상을 탕 쳤다.


“그 감독도 그래! 대본을 보고 골라야지, 돈 보고 작품을 고르면 어떡해! 어휴, 됐다 됐어. 그딴 감독이 연출이면 어차피 망할 드라마야. 하나도 안 아까워!”


두 피디는 엄혜정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아쉬움을 읽었지만, 굳이 그걸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이어서 김 피디는 안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임미향 작가는 일단 놔줄까요?”

“···안 놔주면. 방법 있어?”

“더럽게 물고 늘어질 수는 있죠.”


김 피디의 대답에, 엄혜정은 혀를 쯧 차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놔 줘. 계약 기간 많이 남아서 위약금도 큰데, 그 정도면 이미 마음 뜬 거지.”

“네. 해당 건 처리하고 관련 자료 폐기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김 피디는 펼쳐둔 서류에 뭔가를 체크하더니, 곧 말없이 서류철을 덮었다.


팔짱을 낀 채 씨근거리던 엄혜정이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거 왜 덮어? 보고할 사항 더 없어?”

“예.”

“없다고? 이번 주만 해도 내가 매니지먼트랑 방송국을 몇 개나 돌았는데, 연락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고?”

“아, 하나 있습니다.”

“오.”


다시 서류철을 펼쳐든 김 피디가 서류를 들추며 대답했다.


“정수기 업체 쪽에서 협찬 계약을 건바이건으로 돌렸으면 좋겠다네요. 장기 계약하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엄혜정은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그나마 제작사 협찬 포트폴리오에 크게 한 줄 들어가는 업체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빼게 생겼다.


한숨부터 나오긴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결정은 아니었다. 현재 아담 픽쳐스는 일 년에 한 작품 제작 들어가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협찬사 쪽에서도 기간으로 계약해봤자 메리트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은 제작에 연출까지 겸했던 기존 대표가 있었기에 어떻게 버텨온 거였지, 이젠 그마저 은퇴하면서 가세가 기울고 있었다.


그쯤 아랫입술을 짓씹은 엄혜정은, 눈을 질끈 감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젠장. 이젠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어.”

“네?”

“대표님! 안 됩니다! 업계가 더럽다고 같이 더러워지겠다는 발상은-”

“그거 말고!”


엄혜정은 전화번호부 목록을 뒤져서 몇몇 이름을 찾아냈다.


모두 아담 픽쳐스의 전 대표에게 연출을 배워 방송사로 이적한 연출 피디들이다.


방송국 내에서 외주 출신들이 받을 시선을 알기에, 그동안은 꾹 참고 기다렸건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이놈들에게도 손을 뻗어야-


-지이이잉


그 순간 스마트폰이 울렸고, 엄혜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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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4화. 위기를 기회로 (1) +1 24.09.03 1,475 3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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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1화. 누가 왕이 될 상인가 (4) +1 24.08.30 1,434 3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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