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영아를 잘 부탁하네
35.
황당한 일이다.
명해루주의 딸이라면 듣기론 아미파에서도 아끼는 제자라고 들었다.
몇 년만에 그 복잡한 아미파의 입산 시험에 필요한 절차들을 거의 대부분 생략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속도로 통과했다고.
아미파는 몇 년에 걸쳐 제자의 자질을 시험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야만 본산인 아미산에 드는 것이 허락된다.
그렇기에 아미파는 다른 구파일방보다 속가 제자의 비율이 높고, 본산의 제자 숫자는 적은 편이다. 그만큼 정예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미파의 주축 고수는 다른 문파의 고수들보다 좀 더 강하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 정도입니까?
-예. 게다가 아미파의 비련창(飛蓮槍) 자체가 강호에도 이름을 떨치는 절학이기도 하고요.
당소군과 무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들었던 정보다.
그때는 좀 놀랐었다.
보통 아미파라고 하면 창보다는 검, 그 외의 수법을 쓰는 문파로 등장하곤 하니까. 물론 고증을 따지자면 아미파가 창을 사용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소림권(小林拳), 무당검(武黨劍), 아미창(峨嵋槍).
흔히 백일도(百日刀), 천일창(천일창(千日槍), 만일검(萬日劍)이라고 해서 검을 만병지왕이라 추켜세울 때 쓰는 말과 비슷하게 소림의 권법, 무당의 검법, 아미파의 창법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놀란 것만은 아니었다.
“명해루가, 설 소저에게···?”
“루주 자리를 내려놓기로 했네. 세상을 좀 돌아보고 올 생각이야.”
“그래도 이건 좀 갑작스럽습니다만···”
명해루를 자기 딸에게 넘겼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아미파의 제자 신분으로 명해루를 물려받는 게 가능한가,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물론 아직 입산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아미파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는 제자가 명해루의 주인이 되는 걸 아미파 본산에서 달가워할지 의문이었다.
“듣기로는 곧 진산 제자로 들어가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만···.”
“취소했어요!”
“진짜입니까, 루주님?”
명해루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딸이 걷고 싶은 길을 걷게 해주자고 생각을 바꾸었지. 내 욕심 때문에 아미파로 간 것도 사실이니. 이미 무련 사태께 말씀드리고 값을 치른 다음일세.”
백서군은 놀랍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아미파 입장에서도 굉장히 황당했을 것이다. 제자를 빼앗긴 아미파의 스승은 무슨 심정일까.
백서군은 괜히 등골이 으슬으슬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미산에 있을 설화영의 스승이 괜히 자신을 족치러 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으니까.
아미파 본산에 들기 위해 치러야 하는 입산 시험에서 좋은 결과만 내면 진산제자로 들어가는 게 확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재.
그런 인재가 백서군의 밑에서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설화영이 말했다.
“백 대인. 대인 덕분에 아버지께서 잘못을 깨달으셨습니다. 그 점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한 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것밖에 없습니다. 깨달은 것은 루주님이시고, 그걸 실행에 옮기신 것도 루주님이시지요. 저는 한 게 없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백서군은 백운관이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 말 그대로 발버둥친 거니까. 결국 어떻게든 쥐어짜서 이겼으니, 승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겸양하지 말게, 백 점주.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진 본 루 입장도 애매해지잖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물론 그렇다고 너무 오만하지도 말게나. 이제 한 번 졌을 뿐이네.”
“제가 배워서 꼭 명해루를 사천제일의 이름을 이어나갈 수 있게 노력할 거예요. 그동안 아버지가 저지른 일의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제가 백 대인 밑에서 배운다면 조금은 아버지의 죄가 덜어지지 않을까 해서요···.”
설화영의 말에 명해루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죄를 지은 것은 자신인데, 어찌 보면 그는 도망가는 꼴이고 대신 딸이 그 죄업을 짊어지는 모습이다.
그것을 설화영 본인이 자처했다는 것도 명해루주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꼭 그래야겠느냐?
-명해루는 바뀌어야 해요. 그리고 제가 아니면 누가 가겠어요. 게다가 직접 배워보고 싶기도 하고요. 백 점주님 밑에서요.
명해루주는 백서군을 보았다.
“그래서, 이 아이를 좀 가르쳐줬으면 하네.”
“제가 말입니까?”
“백 점주 말고 여기에 다른 사람이 있나?”
백서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보단 루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영이에게 직접 물어봤네. 하지만 자네 밑에서 배워보고 싶다더군.”
“정말입니까, 설 소저?”
“네, 맞아요!”
해맑게 대답하는 설화영을 보니 괜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미파와 연관이 있는 명해루주의 딸.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타이틀인데, 그 타이틀을 지닌 사람이 자기 밑에서 배우겠단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는 게 정말 골치 아팠다.
‘아니, 생각을 달리하면 또 좋은 인재일 수도 있긴 한데···.’
명해루주는 루주 자리에서 물러나고, 설화영이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면 사실상 명해루가 이룩해 놓은 인프라나 네트워크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명해루주 자리를 물려받은 설화영이 자신의 밑에 있으면, 그녀를 통해서 이것저것 관리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좀 부담스럽긴 한데.’
물론 사천제일을 목표로 삼은 이상, 이런 것도 결국에는 백서군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결국 사업을 확장하다 보면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으니까.
아직 확장할 수준은 아니기는 하지만, 이번 일로 백서군과 장칠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손님이 쏟아질 수도 있다.
그런 시점에서 설화영의 합류는 백서군이 기뻐하면 기뻐했지, 슬퍼할 일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주판을 두드려 보는 얼굴이군, 백 점주. 내 딸이 마음에 안 드는가?”
“그런 게 아닙니다. 장차 사업이 커지게 되면 저 혼자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많아질 텐데, 그 때는 설 소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음, 그렇지. 게다가 조 총관도 도움이 될 걸세.”
“명해루의 총관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물론 지금까지 관계가 좋지 않았으니, 내 떠나기 전에 그 어색한 관계를 좀 풀어보는 자리를 만들어보려 하네.”
명해루주의 말에 백서군은 볼을 긁적거렸다.
물론 백서군은 총관에게 악감정이 있다. 없다고 하면 그건 부처다. 명해루주를 대신해 항상 백서군을 만나러 왔던 게 총관이니 악감정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한 배를 탈 사이라면 엉킨 관계를 풀기 위한 술 한 잔쯤은 필요한 법이지요.”
“쉽지는 않을 걸세. 사람 마음에 생긴 앙금이라는 게 그리 쉽게 풀어지던가.”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백서군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때로는 사업을 위해 자신의 감정보다 이성을 따라야 할 때도 있지요.”
“그걸 알고 있다면 다행이군. 훌륭한 자질일세. 상인의 덕목 중 하나지.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요하게 여길 것. 물론 나는 그러질 못했네만.”
자조하는 듯이 명해루주가 웃는다.
손익을 따지기는 했으나, 그가 백운관을 가져오고자 했던 행동의 밑바닥에는 사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었다.
상인으로서 이익을 위해 백운관을 합병하려는 것이다, 그런 식의 논리를 내세웠지만 결국 그 행동 기반이 사적 감정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상인으로서는 냉정하지 못했다. 주위의 비난을 몇 번이나 감수해 왔기에 무뎌졌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백서군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덕분에 영이와도 화해했고, 조금은 눈이 트인 기분일세. 천하를 돌아보고 오면 그때는 또 무언가가 달라져 있겠지.”
“그럼 루주 자리는 아예 내려놓으시는 겁니까?”
“루주 자리는 이제 은퇴일세. 영이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아. 약관은 넘겼으니.”
약관, 스무 살을 갓 넘겼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방령(芳齡)을 함부로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전생에 여자 나이를 함부로 물었다가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는 백서군이기에, 굳이 나이는 묻지 않기로 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밝힐 테니까.
명해루주가 말했다.
“일은 조 총관이 가르칠 걸세. 10년 가까이 성도를 떠나 아미산에서 지냈으니, 총관에게 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워야겠지.”
“열심히 배울게요, 아버지.”
“그래. 열심히 하거라.”
어째 부녀가 서로 쿵짝을 맞추면서 얼렁뚱땅 백서군 밑에서 일하게 되는 게 확정되는 모양새다.
그걸 굳이 막을 생각까진 없었기에, 백서군은 피식 웃을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로 돌아오시면, 그때는 제가 우린 차를 대접해드리지요.”
“벌써 보내버릴 셈인가? 아직 안 가네.”
“아쉽군요.”
“이 사람이.”
명해루주가 껄껄 웃음을 터트린다.
“속이 후련하군. 떠나기 전에 본 루의 강압에 못 이겨 본 루 밑으로 들어온 가게들은 전부 풀어줄 생각이네. 물론 내 이름이 아니라 영이의 이름으로 취하는 첫 번째 조치가 될 것이야.”
“그렇게까지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않나. 본 루는 새롭게 출발해야 하네. 사천제일이라는 이름은 아직 본 루에게 남아있지만, 그 현판을 빼앗겼으니 명예도 어찌 보면 빼앗긴 셈 아니겠나?”
“그래도 여전히 사천제일이라는데 이견은 없을 겁니다.”
“그렇기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물러나고 영이가 새 주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내 대에서 행한 일을 영이가 끊어줘야 사람들의 인식이 변할 걸세. 그래야만 영이가 본 루를 이어받는 데 큰 잡음이 없지 않겠나.”
명해루라는 거대한 주루의 주인이어서일까.
생각이 깊었다.
“굳이 그러셔야 해요, 아버지?”
“그래야 한다. 이제부터는 네가 명해루의 루주라는 걸 잊지 말거라, 영아야.”
“아버지···.”
“조 총관이 많은 걸 도와줄 게다. 명해루의 초석을 다질 때부터 일해왔으니, 너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게야. 열심히 배우거라.”
“네, 아버지!”
백서군은 볼을 긁적거렸다.
두 부녀를 향해 소심하게 손을 들어보인 백서군이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아, 내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구먼.”
명해루주가 고개를 숙였다.
“영아를 잘 부탁하네, 백 점주.”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
“그래서, 설 소저가 백운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건가요?”
백운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던 당소군은 설화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설화영이 움찔 떨었다. 그만큼 당소군의 시선이 매서웠던 탓이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뇨. 그런 건 없어요. 단지 이해가 안 가서 그렇죠.”
당소군의 말이 칼로 딱 잘라 끊는 것처럼 단호했다.
“명해루와 관계가 안 좋았던 게 한두 해 일이 아닌데,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명해루주의 딸이 백운관에 뭔가를 배우러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백 점주는 사람이 좋은 건가요, 아니면···.”
당소군이 뒷말을 삼킨다.
자신이 생각해도 무례한 말이라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백서군은 그녀가 뱉으려다 삼킨 말이 무엇일지 금세 눈치챘다.
‘생각이 없는 건가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그래도 그걸 입밖으로 내뱉지 않고 삼킨 걸 보면 당소군이 그를 배려해주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녀는 자신과 친분이 없는, 이른바 ‘영역’ 밖의 사람에겐 이상할 정도로 매몰찼으니까.
“물론 전부 믿기는 힘들지만, 명해루주께서 루주 자리를 설 소저에게 물려주고 물러나신다더군요.”
“정말인가요?”
당소군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백서군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황당했으니 이상한 반응도 아니다.
“그래서 설 소저가 백운관에서 일을 하게 된 거고요?”
“정확히는 주방 일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요?”
“백운관의 총관 역할을 설 소저에게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 백 점주.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어요?”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당소군의 말에 담긴 뜻은 명확하다.
너 호구세요? 라고 물은 것이다.
백서군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백운관의 규모가 커질 것을 대비해서 설 소저와 명해루로부터 이것저것 배우면 좋지 않을까 해서 받아들인 것도 있습니다. 당 소저께서도 양해해주시면 좋겠군요.”
“···마음에 안 드네요.”
당소군은 날카로운 눈으로 설화영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할 수만 있었으면 눈빛만으로 설화영을 구멍이 수십 개는 뚫린 분재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처신에 힘쓰는 게 좋을 거예요. 명해루든, 설 소저든.”
당소군의 목소리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녀가 설화영과 눈을 마주쳤다.
“알겠나요, 설 소저?”
백서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음이 날아든다.
-아랫사람을 부리려면 단호하게, 철저하게. 잊지 말아요. 백 점주. 호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 건 아니에요.
당소군의 말에 백서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호의가 지나치면, 그게 권리인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더구나 설화영은 백서군과 관계가 좋지 않은 명해루주의 딸이었다.
당소군의 반응이 이상한 게 아니다.
-어차피 이런 역할엔 익숙하니까요. 조금만 지켜봐주시겠어요?
백서군을 향하는 당소군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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