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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청(卍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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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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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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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1. 오표일배(五票一盃)

DUMMY

30.




석요명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전음에는 음공(音功)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저 신강 땅 마교의 고수들이 사용한다는 귀전마후(鬼箭魔吼) 같은 음공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등골을 새파랗게 날이 선 도검이 긁어내리는 기분이었다.


-무슨 뜻이오, 선배?

-말 그대로일뿐이다.


중원에서 이름이 알려진 고수의 한마디란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오죽하면 오악위증(五岳爲證)이라 하겠는가. 고수의 말이 가지는 무게라는 건 중원오악이 나서서 증인이 되어준다는 의미이니, 사실상 중원 전체가 그 말을 신뢰한다는 뜻인 게다.

오악이 무엇인가.

동악 태산, 서악 화산, 중악 숭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을 이야기한다. 중원 전체를 의미하는 관용구로도 간혹 쓰이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이 다관을 신경 쓰시는 겁니까?

-네놈이 알 바 아니다.


굳이 캐묻지 말라는 소리다.

어차피 이 상태에서 더 묻는다고 대답을 줄 위인도 아니었기에 석요명은 당무외에게 캐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묻는다고 대답해 줄 위인도 아니었으니까.

당무외의 전음이 끊어지자, 석요명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눌렀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신주십삼좌로 쌓아 올린 위명과 위엄이 그대로 산산조각나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주인장! 여기 주문 받으시오!”

“차가 늦지 않소!”

“이거야 원, 우리도 좀 신경 써 주쇼!”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칠이 탁자들을 돌아다니며 사죄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주방 쪽에서 백서군이 음식을 내놓는 소리가 들렸다.


“장칠! 손님들께 가져가라!”

“예, 점주 어른! 금방 갑니다!”



***



백서군과 석요명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들은 설화영은 향차를 홀짝거렸다.

식수 대용이기에 맛을 바라면 안 되는 것이 향차라고는 하지만, 달이는 방식이 다르기라도 한 걸까.

백서군이 달인 게 분명할 향차는 그녀가 그간 마셔왔던 차와는 뭔가 달랐다.


‘집에서 먹던 것과 비교해도 오히려 더 나은 점이 있어.’


차와 요리에 관한 재능은 없어도 차와 요리를 즐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설화영이다 보니, 명해루에서 먹던 것과 자연스럽게 비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요리는 모르겠지만, 다과나 차는 확실히···.’


백운관 쪽이 조금 더 앞선다.

물론 이것저것 따지고 들어간다면 백운관보다 명해루 쪽이 앞서는 쪽이 있지만, 차와 다과에 한정한다면 백운관 쪽이 조금 더 나았다.

아미산에도 좋은 차가 난다.

당장 속가 제자의 일과 중에는 아미파가 관리하는 다원의 차나무 잎을 솎아내는 일도 있다. 그 일을 하면서 차에 관한 관심이 더 깊어졌다면 깊어졌다고 할까.

시중에 나온 차를 구해 마시는 일 정도는 아미파에서도 제재하지 않는 부분이었기에, 풍족한 용돈을 음식을 먹고 분석하는 것과 차를 마시고 그 풍취를 즐기는 데 대부분 사용했을 정도로 설화영은 차와 음식을 좋아했다.


‘차라리 무공이 아니라 차와 요리를 더 잘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삼키며 설화영은 석요명 쪽으로 흘깃 시선을 주었다. 아직도 그가 먹어 치운 단황소의 영상이 눈앞에 어른 거리는 것 같다.

단황소만 하더라도 명해루에서는 볼 수 없는 종류의 다과다.

저런 다과는 수도, 북경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씩 북경에 다녀온 사저들이 들려주곤 했던 이야기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북경에 가면 먹을 수 있는 것 중에 소(酥)라는 게 있대.

-소? 밭 가는 소 말이야?

-아니, 그거 말고. 소는 흔히 볼 수 있잖아. 북경에 가면 먹을 수 있는 소병(燒餠)이래.

-소병이면 구운 떡이잖아? 흔한 거 아니야?

-우리가 생각하는 구운 떡하곤 뭔가 다른 모양이야.

-진짜로?

-응. 흔히 먹기는 힘들다고 이야기하는데, 확실히 그렇던데?

-얼마나 힘든데?

-먹으려고 가면 항상 없어서 못 먹는 정도?

-혹시라도 북경에 가면 사다 줄 수 있어?

-가져오는 동안 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먹어보고 싶다···.


아직도 북경에 다녀왔던 사저들의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소(酥).

도대체 얼마나 맛있으면 그런 말을 할까 싶었는데, 석요명이 호평하는 것을 보면 그 평가가 틀린 건 아닌 듯 했다.

게다가 북경도 아니고 이 사천 땅의 중심, 성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석 대협께서 저렇게 칭찬을 하시다니···.’


아버지, 명해루주에게 들었던 바로 석요명은 저렇게 칭찬이 후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었더라도 간단하게 한두 마디 정도 하고 말았다는 석요명이 저렇게 칭찬을 늘어놓았다는 건 그만큼 요리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

설화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예전의 아버지는 지금이랑 다르셨는데.’


한숨이 살짝 내려놓은 찻잔 위로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그녀의 아버지, 명해루주는 다인(茶人)이면서 숙수(熟手)였던 사람이다.

설화영이 어렸을 때는 아버지, 명해루주가 직접 타준 차를 마시면서 지냈던 시절이 있다. 그녀가 차와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지금은 루주로서 칼도, 다구에서도 손을 뗀 채 주판을 튕기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어렸을 때의 명해루주는 아직 요리와 차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던 사람.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설화영은 차와 요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적어도 그녀에게서 무공에 대한 재능을 아미파의 장로가 발견하기 전만 해도 그랬다.


‘어릴 때 마셨던 차의 맛이 나.’


어릴 적, 아버지가 그녀에게 타주었던 차의 향기가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분명 다른 사람이 탄 차인데도 차향이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아마도 그녀의 일곱 살 생일 때즈음이었던 것 같다.

명해루주와 친분이 있던 아미파 장로가 찾아와 그녀의 근골을 확인했던 날.


-이 아이의 근골, 굉장히 뛰어납니다. 제자로서 탐이 날 정도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빈니(貧尼)가 설 시주에게 거짓을 고해 무슨 이득을 얻겠습니까?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명해루주는 그녀에게서 무공에 대한 재능이 보인다는 아미파 장로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사람이 바뀌었다.

차와 요리를 더 좋아하는 그녀를 무관으로 보내 무예의 기초를 가르치려 했고, 어느 정도 기초가 쌓이면 아미파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아미파와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그녀의 의견을 아예 묵살하고 제멋대로 결정해버린 아버지에게 실망한 것도 그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스를 수가 없었지.’


그렇다 해도 혈육이고, 자신이 아니면 아버지의 꿈을 이뤄줄 사람이 또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미파의 속가 제자로 들어가 정식으로 절차를 밟고 진산제자, 아미파의 진산절기를 배울 수 있는 본산제자가 되기 직전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예전으로 돌아오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


차맛이 쓰게만 느껴졌다.

한때는 그 무엇보다도 차와 요리에 진심이었던 아버지의 옛 모습을 알고 있어서인지, 그 쓴맛이 가시처럼 목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지길 바라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차라리, 패하더라도 그 때의 아버지가 달여주시던 다정한 차를 다시 마실 수 있으면 좋겠어.’


아무리 아버지가 밉다고 해도, 그녀와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해도 아버지니까.

쓴맛으로 텁텁해진 입을 달래기 위해 설화영은 같이 내어져온 다과, 도소를 집어들었다.

도소는 마치 가뭄에 마른 땅바닥처럼 표면이 갈라져 있지만, 그 두께가 얇지 않고 오히려 두꺼운 편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두께.

밀가루, 설탕, 돼지기름을 재료로 구워낸 물건이다.

한입 크게 도소를 베어문 설화영은 밀려드는 단맛과 고소함으로 쓴맛을 잊었다. 순식간에 도소를 다 먹어치운 설화영이 손을 들었다.


“여기, 도소 추가요!”

“예! 갑니다!”


***



“음? 저게 뭔가.”

“뭐 말인가?”

“저 자들 말일세. 손에 뭘 들고 있지 않나.”

“죽통 말인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무인들이나 성도 사람들의 손에 백운관의 이름과 문양이 박혀 있는 죽통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건 사천지회가 3일차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거리에 죽통을 들고 다니며 뭔가를 마시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그 죽통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찾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못 보던 것이 돌아다니면 그 근원지를 찾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니까.


“백운관?”

“명해루와 맞붙는다는 그 다관 아닌가?”

“그 이름을 또 듣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듣기로는 석 대협이 백운관에 다녀갔다고도 하더군.”

“석 대협께서 말인가?”

“그렇다더군.”

“호기심이 생기는데. 한 번 가볼까?”

“듣기로는 백운관의 다과를 엄청나게 칭찬하셨다는 모양이야.”

“다과가 그래봤자 다과지. 진미일 리가 없지 않나?”

“석 대협께서 그런 말을 들으셨다면 노발대발하셨을 걸세.”

“그런 말 하지 말게. 무서우니까.”

“아무튼 어서 가세. 차와 다과를 얼마나 잘 만들기에 석 대협께서 그렇게 칭찬 하셨는지 한 번 가 봐야지.”

“가세. 어서.”

“어허, 서두르지 말게.”


석요명이 백운관을 방문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리자, 자연스럽게 백운관을 찾는 이들의 숫자가 늘었다.

안 그래도 벽운진인과 청성파의 방문으로 호기심이 생긴 타 문파의 무인들까지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손님으로 인해 백서군이 운영하는 노점의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무시무시하게 바쁘군.’


백서군은 땀을 훔치며 죽통에 담은 차를 내놓았다.


“당 소저. 왼쪽이 통천향, 오른쪽이 보이차입니다. 잘 전달해주십시오.”

“알겠어요.”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도도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목소리다.

당소군이 다가온 무인 두 명에게 차를 건넨다. 아니, 건넨다기 보다는 떠넘기는 것에 가까운 방식을 그들의 손에 차를 쥐어주었다.

그런 방식으로 차를 테이크아웃 해 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개중에는 죽통을 돌려주러 온 사람도 있었다.


“이 죽통을 가져오면 무슨 표식을 준다고 들었소.”

“받아가시죠.”


죽통을 회수한 당소군이 그걸 팽가 형제에게 전달하면, 팽가 형제는 뒷마당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설거지거리를 신나게 우물에서 떠온 물로 씻어내고 있는 악심호에게 전달한다.

그 대신에 나비가 그려져 있는 종이 한 장을 죽통을 가져온 사람에게 내어준다.


“이게 그 표식이오?”


당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통을 가져온 무인이 물었다.


“다섯 장을 모으면 차 한 잔을 공짜로 마실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말이오?”

“그만큼 꾸준히 오지 않으면 안 되겠죠.”


냉랭하기 짝이 없는 응대다.

하지만 무인을 상대해주고 있는 게 당가의 대공녀임을 생각하면, 냉랭한 응대로 끝난 게 다행일 것이다.

괜히 그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거였으니까.

무림인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데도 질서가 깨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큰 힘을 발휘한 탓이다.


“다음에 또 오겠소.”

“올 때 표식을 가져오지 않으면 공짜는 없어요.”

“명심하겠소!”


무인이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당소군은 문득 백서군이 죽통에 관해 설명하던 것을 떠올렸다.


‘오표일배(五票一盃)라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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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오표일배(五票一盃) +18 24.09.13 10,561 27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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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 통천향(通天香) +10 24.09.04 13,780 273 12쪽
21 20. 재미있겠네요 +19 24.09.03 14,041 285 12쪽
20 19. 삼대포(三大炮) (2) +12 24.09.02 14,442 296 12쪽
19 18. 삼대포(三大炮) +15 24.09.01 14,453 292 12쪽
18 17. 사천제일루라는 간판, 내려주셔야겠습니다 (4) +22 24.08.31 14,949 293 15쪽
17 16. 사천제일루라는 간판, 내려주셔야겠습니다 (3) +15 24.08.30 15,445 29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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