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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청(卍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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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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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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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내가 뭘 본 거지?

DUMMY

28.



표독하기 짝이 없는 전음이 번갯불마냥 뇌리를 후려친다.

온몸이 저릿해지는 목소리.

모루 위에 올라간 달궈진 쇠를 내리치는 듯한 전음에 석요명은 순간적으로 과거로 돌아간 듯한 환영을 보았다.


-그래, 네놈이 그 석가장의 망나니 놈이라고?


젊었을 적, 처음으로 만났던 신주십삼좌의 존경하는 선배.

당가의 천병제가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석요명의 앞까지 와서 수레를 멈춘 노인, 당무외가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보았다.


-노부의 이름을 여기서 까발려 시끄럽게 만들 셈이냐?

-다, 당 선배. 여기는 무슨 일로?


당황스럽다.

이미 은거한 인간 아니었나.

여기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인간이 갑작스럽게 튀어 나오니, 석요명 입장에서도 당혹스러웠다.

천병제 당무외. 전대 신주십삼좌.

그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괴팍한 노선배가 뭔가 이상한 걸 잔뜩 담은 수레를 끌고 석요명 앞에 있었다.


-닥쳐라.


그 이상의 말도 없다.

수레의 손잡이를 놓는 당무외의 등 뒤에서 뭐가 굴러 떨어진다.

석요명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와서 떨어진 것은 백운(白雲)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죽통이었다.


“이건···.”


석요명이 죽통을 집어드는데, 노점 안에서 백서군이 뛰어 나왔다.


“노공, 오셨습니까! 제가 부탁 드린 건···?”

“다 가져 왔다. 귀찮게 이런 걸 시킨 이유가 뭐냐?”

“다 쓸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드린 돈이 부족하진 않았는지요?”

“대나무를 잘라 죽통을 만드는데 굳이 돈이 필요하겠느냐? 필요하면 가서 잘라오면 되는 것을.”

“아무리 그래도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 않습니까.”


백서군의 말에 당무외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됐고, 물건이나 봐라.”

“확인해보겠습니다.”


백서군은 당무외의 수레에 실려온 죽통들을 보았다.

그가 처음에 의뢰했던 것처럼 죽통에는 백운이라는 글씨가 힘 있는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물건을 확인한 백서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의뢰한대로 잘 만들어주셨군요. 돈이라도 더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됐다. 내가 돈이 부족해서 네놈 돈을 뜯어서 살겠느냐?”

“대장간에 갈 때마다 집이 허름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내가 직접 지은 집을 욕하면 정강이를 부러뜨려주겠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집이 좋았습니다.”


바로 태세를 바꾸는 백서군.

석요명은 그와 당무외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그 고명한 신주십삼좌가 기껏해야 다관 주인과 자연스럽게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머리가 정지하는 것 같았다.

그가 겪었던 당무외라는 인간의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저 마귀 같은 당 선배가?’

-눈알을 바로하지 않으면 뽑아버리겠다, 석가야.


헙, 하고 새어나오려는 목소리를 석요명은 꾹 참아냈다.

당무외의 살기가 그의 전신을 분재로 만들어버릴 것처럼 찌르고 지나간 탓이다. 예전의 애송이가 아니었기에 당무외의 살기에 겁 먹고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어마어마한 살기였다.


‘이 미친 선배, 도대체 왜 아직도 정정한 거요?’


속으로 올라오는 의문을 삼킨다.

오히려 나이를 먹어 무공이 쇠퇴하기는커녕 의기(意氣)의 수발이 더욱 자유로워진 것 같으니, 괴물이 아닐 수가 없다.

방금 전 살기도 석요명에게만 집중되었는지 주변 사람들은 아예 느끼지 못한 모양새였으니까.

그만한 양의 살기가 집중되었으면 여파가 주변으로 퍼질 법도 하건만.

공기가 서늘해진다거나, 저도 모르게 오한을 느끼는 등 살기에 민감하지 않은 이들이 보일 법한 반응이 전혀 없다.

신묘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제어력이다.


‘의념살(意念殺)의 경지에라도 오르실 작정이신가?’


석요명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백서군과 당무외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건 왜 만들어 달라고 한 게냐? 늙어빠진 손으로 글씨를 하나 하나 새긴다고 뼛골이 다 쑤셨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노공.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데 들어주시니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백서군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당무외가 험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맨입으로?”


그의 반응에 백서군이 웃었다.


“그야 맨입으로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새 차가 있는데, 드셔 보시겠습니까? 다과도 있습니다.”

“이 늙은이는 주는 건 거절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노공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야겠군요.”

“이상한 걸 내놓았다간 혼쭐이 날 줄 알아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백서군이 당무외를 안으로 안내한다.

멍하니 서 있던 석요명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내가 뭘 본 거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석요명은 백서군과 당무외가 들어간 노점 안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데도 돋보이는 당무외의 다부진 체격이 눈에 띄었다.

혼란스럽다.

심법을 운용하며 석요명은 혼란을 가라앉혔다. 수양이 깊지 않았다면 주화입마가 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석요명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 대협. 대협께서도 혹시 손님으로 오셨습니까?”


쭈뼛거리며 물어오는 점소이로 보이는 사내의 물음에 석요명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관 앞에 당도하자마자 충격을 받아서 그렇지, 백운관에 오려고 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장칠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



석요명은 명해루의 노점과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백서군의 노점을 보고는 혀를 찼다.

명해루의 노점은 사천제일루라 자신하는 만큼 규모가 크고, 수십 명의 손님을 단체로 받아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넉넉한 공간을 자랑했다.

백서군의 노점은 돌아다니는 것은 편했지만, 그만큼 탁자의 수가 적어서 받을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명해루가 쓰려고 만들어둔 노점을 이리저리 건드려서 손을 보기는 했지만, 백서군 혼자 주방을 담당하다 보니 부담을 줄이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주방을 점주가 혼자 담당하는 구조인가. 명해루를 혼자 상대하긴 버거울 텐데.’


그나마 당소군과 남궁화, 팽가의 두 형제와 악심호가 있어서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들이 식거나 할 시간 없이 바로 바로 식탁으로 날라지고 있기는 했지만, 백서군에게 걸리는 부하가 적지 않을 듯 보였다.

당무외와는 가까운 곳에 있고 싶지 않아 그와 거리를 좀 두고 자리에 앉은 석요명은 노점 안을 둘러보았다.

부산스럽다.

명해루의 정돈된 소란스러움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명해루는 공간 자체가 널찍해서 소란을 피워도 탁자 밖으로 소리만 넘치는 느김이지만, 백서군의 노점은 말 그대로 시장통 그 자체에 가까웠다.


‘민가에 들어와 앉은 기분이군.’


이게 대가족이 둘러 앉은 식탁 앞인지, 아니면 노점 안인지 도통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불평을 토하기도 그렇다.

석요명이 본신의 기도를 개방하기라도 했다간 그만한 민폐가 없을 테니까. 그랬다간 저기 있는 당무외 손에 작살이 날지도 모른다.


‘도대체 당 선배는 어째 몸이 더 단단해진 것 같군.’


석요명은 음식을 시키기도 전에 내어져 온 향차를 마셨다.


‘나쁘지 않군.’


향차라는 건 어디까지나 식수의 대용이다.

그런 만큼 고급 차를 자주 마시는 석요명의 까다로운 혀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웠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당소군이 석요명 쪽으로 다가오더니 예의를 갖추었다.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너는···.”

“당소군이라 합니다.”


구주십삼성, 암독화의 이름.

석요명이 재밌다는 듯이 입가에 웃음을 내걸었다.


‘암독화가 노점에서 일을 한다··· 재미있는 일이군.’


석요명은 흘깃 당무외 쪽을 보았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였지만, 당무외는 백서군이 가져올 음식을 기다리는 중인 듯 석요명 쪽으로는 시선을 아예 주지 않고 있었다.

안심한 석요명이 입을 열려는 순간, 전음이 천둥처럼 꽂혔다.


-쓸데없이 주둥이를 놀렸다간 주둥아리에 구멍 한 두 개 나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것이다.


석요명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꾹 눌렀다.

하필이면 저 호랑이 같은 선배가 갑자기 나타날 건 또 뭔가.

당소군에게 뭐라 말을 할 수도 없다. 뭐라고 했다간 당무외의 전음이 바로 화살처럼 날아올 게 뻔했다.

속으로 혀를 찬 석요명이 당소군을 보았다.


“어디, 추천할 만한 게 있느냐?”

“오늘 새로 들여온 차가 있습니다. 다과도 추천드릴지.”

“다과는 됐다. 새로 들어온 차가 있으면 가져와 보거라.”

“그리 하겠습니다.”


당소군이 목례를 하곤 도도한 모습으로 떠나간다.

새로운 차라고 해도 사천의 차라면 어지간히 마셔봤다. 사천의 다관이니 사천의 차를 취급하는 것이 당연하고, 타지의 차를 다루는 다관은 몇 없다.

명해루만 하더라도 사천의 명차만을 다루었으니 오죽할까.


‘무슨 차를 가져왔을지 모르겠군.’


새로운 차를 들여왔다고 해도, 중원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만큼 안 마셔본 차가 거의 없다고 자부하는 석요명이다.

물론 광동이나 광서, 절강 같은 곳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흔히 중원이라 표현하곤 하는 하남과 하북 근방만 돌아도 새로운 먹을 것들이 넘친다. 한때는 일국(一國)이 융성했던 땅들이니 오죽할까.


“실망시키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명해루와 승부할 만한 저력이나 전략이 있다는 걸 백서군이 보여주길 바라며, 석요명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석 대협께서 행차하실 줄은 몰랐는데.”


백서군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앗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석요명이 올 거라곤 생각을 못한 탓이다. 말 그대로 기습적인 방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예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금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일주일 동안 한 번이라도 백운관 쪽에 걸음을 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건 좀 당혹스럽군.’


이제 겨우 2일차니까.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야 볼 줄 알았던 사람이 비교적 초반에 찾아온 셈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못해도 이틀은 더 명해루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다.

무림인이란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존재고 신주십삼좌쯤 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축에 든다.

그걸 알고 있는 백서군이지만 그래도 머리가 아픈 건 사실이랄까.


“그나마 노공께서 죽통을 가져다주셨으니, 조금은 편해지겠군.”


노점 안에 있는 손님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들어온 손님들이 금세 채우고 있는 것은 주방 밖에 있는 죽통 덕분이다.

백운관을 의미하는 글씨를 새겨놓은 죽통은 어디까지나 일회성이지만, 미리 이걸 받기 전에 준비해놓은 안내문을 써붙여두었다.

다음에 노점에 올 때 가져오면, 그때는 죽통을 구매할 때 사용한 돈을 일부 돌려주겠다고.


‘무림판 테이크 아웃 겸 텀블러 회수 전략이지.’


거기에 마침 석요명까지 와 있으니 금상첨화다.

석요명으로부터 호평만 들어낼 수 있다면, 명해루주와의 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테니까.

백서군은 차를 마무리지었다.

손님이 손님인 만큼, 직접 내어갈 생각이었다.

강호에서 가장 식도락에 진심이라는 천하에 존재하는 열셋뿐인 초고수. 백서군 같은 사람이 만나기에는 너무 대단한 인물이기는 했다.

살아서 얼굴 보기도 힘들다는 절대자. 그런 무인과 무림인과 엮인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뭐, 피할 수도 없으니.’


이미 피할 수도 없게 된 일, 후회한들 무엇할까.

백서군은 통천향이 든 찻주전자와 찻잔을 소반에 올렸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다기(茶器)들이 달각거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석요명이 앉아 있는 탁자 앞에 멈춘 백서군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신주십삼좌 반설괴 석요명.

그의 앞에 통천향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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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 홍당자파(紅糖糍粑) +12 24.09.07 12,672 28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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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삼대포(三大炮) +15 24.09.01 14,451 29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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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 단황소(蛋黃酥) +22 24.08.27 17,761 378 18쪽
13 12. 무슨 조치를 하려고 +15 24.08.26 18,088 36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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