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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청(卍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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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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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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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통천향(通天香)

DUMMY

21.





사천지회는 사천 각지에서 모이는 무인들이 친목을 도모하기도 할 겸, 서로의 무공을 겨루는 비무대회의 성격을 띠고 있다.

거기에 그 해, 주관하는 문파에 따라 준비하는 상품도 달라지니 각지에서 모여드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오죽하면 그 상품을 노리고 비교적 사천과 가까운 감숙, 귀주, 운남에서도 사람이 올 지경이니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런 만큼, 그 비무가 벌어지는 비무대와 가까운 노점들이야말로 말 그대로 제대로 봉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일주일 매출로 한 해를 버티는 가게도 드물지 않게 나온다.

사천지회가 해마다 있기도 하니 당연한 일이다. 아예 사천지회 때만 노리고 장사를 하는 가게도 적지 않다.

백서군만 해도 어제 벌어들인 매상이 그간 벌었던 돈보다 많았으니까.


“···죽겠구만.”


백서군은 팔을 탈탈 털었다.

돈을 번 만큼 고생도 적지 않다. 그만큼 리턴값이 있으니 버티는 거지, 그조차도 아니었으면 백서군도 이미 나가떨어졌을 거다.

하루 종일 웍질하고, 칼질하고, 차를 달이는 반복 작업을 다른 사람도 없이 백서군 혼자 담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일주일, 지옥이겠는데?”


역시 얼른 숙수를 구하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백서군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침 일찍 일어낸 백서군은 침구를 정리하고, 세안을 마친 다음 전낭을 챙겨 바로 집을 나섰다.

이제야 겨우 동이 트고 있을 정도로 어슴푸레한 여명이 비치는 새벽길.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두렵기도 하지만, 이 시간대에 돌아다니는 건 보통 고양이나 강아지 아니면 순찰을 도는 병사들 정도뿐이다.

성도의 후미진 외곽에 있는 집 겸 직장인 백운관을 떠나 성도의 번화가로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풍경 자체가 달라진다.


부족한 찻잎이 있으면 구하러 가야 하는 게 다관 일인 만큼, 백서군은 찻잎이 부족하면 무조건 성도의 번화가를 찾곤 했다.

저 멀리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명해루의 마천루 같은 건물이 보였다.

성도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북경에 있을 고루거각도 저만큼 높지는 않을 거라 이야기할 만큼 큰 건물이다.

물론 백서군의 관심사에 명해루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어르신, 계십니까?”


백서군이 성도의 번화가에서 찾은 곳은 취풍헌(醉豊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아담한 크기의 가게였다.

다관(茶館)이나 다루(茶樓)와 달리, 백서군이 찾은 취풍헌은 다기(茶器), 다구(茶具), 찻잎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백서군이 가장 먼저 안면을 트려고 노력했던 곳이기도 했고.


“얼굴 한번 간만에 비추는구먼.”


안으로 들어서니, 입가에 길쭉한 장죽(長竹, 담뱃대)를 문 노인이 웃음을 흘리며 백서군을 맞이했다.

취풍헌의 점주 노인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최근 바빠 얼굴을 비추지 못했군요.”


백서군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리자, 그의 인사를 받은 노인이 곰방대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흘흘. 노인네 얼굴 좀 보러 자주 오게. 이러다 언제 뒈졌는지 나 말고 다른 놈이 이 자릴 꿰차고 앉아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그것도 다 겉보기인 법이지. 이 노인네는 사지 여기저기가 쑤신다네.”


취풍헌의 주인인 노인이 입가에서 장죽을 떼었다.


“아침부터 찾아온 걸 보니, 또 찻잎이 부족한 게로구먼. 새 찻잎이 필요한가?”

“예. 어르신께서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알고 있지. 명해루의 설가놈이 또 한바탕 푸닥거리를 해대더니 이 어두운 귓구멍에도 뭔 일을 벌였는지 들리더군.”


노인은 입가에 문 장죽을 슬쩍 내려놓았다.


“삼대포라는 게 그렇게 맛있다고 소문이 다 났던데.”

“짬이 나시면 오셔서 매상이라도 올려주고 가시지요. 삼대포 한 그릇 정도는 무상으로 내어드릴 생각이 있습니다만.”

“뼈마디가 쑤셔서 한 걸음 움직이기도 힘들다네.”


노인의 말은 너스레다.

백서군도 그걸 알고 있기에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이번엔 또 어디의 차가 필요한가?”

“통천향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통천향이라···.”


향기가 하늘에 닿는다는 거창한 이름.

광동오룡이라 구분되곤 하는 광동 특산의 청차 가운데 하나다.

노인이 몸을 일으킨다.


“으음, 찾는 건 역시 봉황인 게지? 단총(單叢).”

“예.”

“봉황단총(鳳凰單叢)이라. 이 사천 땅에서 그걸 찾아달라 하는 자네도 참 별나지 싶군.”

“하하. 좋은 차는 찾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요.”


광동 차문화의 중심이자 발원지인 조주(潮州).

그 조주 땅에는 봉황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에서 키우는 차나무 중 단 한 그루의 차나무에서만 찻잎을 채집하여 차를 만든다.

그것을 일러 봉황산의 단총(單叢), 봉황단총이라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같은 지역, 동일 품종의 차나무에서 찻잎을 채집해 만든 것도 같은 범주 안에 든다.


‘단총 자체의 역사도 길지.’


당장 봉황단총만 하더라도 그 역사가 남송 시대에 시작된 것이라, 9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은 명나라 시대이니 봉황단총의 역사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을 시점.

그렇다 해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는 명품이니 광동이 차의 명향(名鄕)이라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이 시대의 차라는 건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딸깍’한다고 며칠 뒤에 도착하는 구조가 아니었으니까.


“통천향은 단총 이외의 품종이 없지 않습니까.”

“흘흘. 가짜 통천향도 판치는 모양일세.”

“제가 취풍헌에만 오는 이유가 그거 아니겠습니까?”


노인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다.

사천에서도 손꼽히는 흥풍상단(興豊商團)에서 세운 취풍헌은 사천에서도 차를 좋아하는 이들이 찾는 차와 다기, 다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전문점이다.

당연히 이곳의 벌이는 높으신 분들이 충당해주지만, 흥풍상단이 출자해 만든 전문점인 만큼 그 이름값이 절대 낮지 않다.

그야 그럴 것이, 청성이나 아미, 당가의 도움 없이 사천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상단이었으니까.


“산차(散茶)가 필요한 게지?”

“예. 통천향 같은 차는 병차(餠茶)처럼 만들었다간 맛을 장담할 수 없지요.”

“흘흘. 자네는 역시 차를 잘 아는구먼.”


차의 보관 방식에 따라서도 그 이름이 달라진다.

산차(散茶)란 덩어리 형태로 보존한 차가 아니라, 찻잎의 원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한 차를 가리킨다.

반대로 병차(餠茶)는 떡처럼 뭉친 원반 형태의 차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이차는 주로 병차 형태로 보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운남흑차는 더 필요없고?”

“당가의 대공녀께서 사가시기는 하지만, 아직 찻잎이 부족하진 않으신 모양입니다.”

“흐흐, 어쩌다 당가의 대공녀가 운남의 흑차에 빠졌을꼬. 곧 가져다주지.”


노인이 안으로 사라진다.

조금 기다리자, 노인이 통천향이란 글씨가 박혀 있는 차통(茶筒)을 들고나왔다.


“차향(茶香)을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어르신?”

“상관없네.”


통천향 같은 광동 쪽 차들은 냄새를 맡아보는 시향(試香) 단계를 필수로 거친다.

제대로 된 통천향은 강화(姜花), 생강꽃 향기가 난다.

다시 말하자면, 생강꽃 향기가 나지 않는 건 통천향이 아니라는 뜻이다.


‘봉황단총의 십대향(十大香)에 들어가 있을 정도니까.’


봉황단총 중에서도 오직 통천향만을 위한 향기라고 할 만큼, 사실상 생강꽃 향기가 나면 그건 곧 통천향이란 의미도 된다.

그만큼 통천향이 생강꽃 향기가 나는 대표적인 차라고 할 수 있으니까.

노인에게서 차통을 건네받은 백서군은 차통의 뚜껑을 열었다.

차통을 열자마자 은은한 생강꽃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상품(上品)이다.

찻잎의 색깔이 변하지도 않았고, 향을 속인 것도 아니다.


“황갈색. 생강 향기. 상품, 그중에서도 최상품이군요.”

“취풍헌은 항상 좋은 차를 구비해두려고 노력한다네. 알아주니 고맙군.”


노인의 말에 백서군은 웃으며 차통을 닫았다.


“당장 돌아가서 끓여보고 싶을 정돕니다.”

“차 상인에겐 그만한 칭찬이 또 없지. 더 필요한 건 없는가?”

“아직 다구나 다기를 더 사기엔 제 다관이 작지 않습니까.”

“자네의 차 달이는 실력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다관이 커져도 벌써 커졌을 걸세.”

“하하. 언제 또 짬이 나시면 백운관에 들러주시지요.”

“생각나면 가겠네.”


백서군은 전낭에서 돈을 꺼내 값을 치렀다.

짧은 차통을 다섯 개나 사서 그런지, 챙겨온 전낭이 생각보다 많이 가벼워지기는 했으나 좋은 품질의 차를 구하는 데는 돈을 아낄 필요는 없으니까.

좋은 차는 손님을 부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사천 땅에서 광동에서 온 좋은 품질의 차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천 땅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흥풍상단이 취풍헌의 뒤에 있으니 가능한 일이인 것이다.


“그럼 또 오겠습니다.”

“나중에 보세.”

“시간 나면 들러주십쇼.”


백서군이 인사를 해보이곤 취풍헌을 나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노인은 입가에 다시 장죽을 물었다.

노인만 남은 취풍헌의 가게 안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



백서군은 장칠이 출근하기 전, 새 찻잎을 가지고 노점으로 향했다.

객잔과 다루를 겸업하고 있는 만큼 백서군이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요리도 해야 하고, 차도 달여야 하니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다.

그렇다고 사천지회 기간 동안에 숙수를 급하게 구하기도 애매하다.

백서군의 요리나 차, 다과를 먹고 돌아간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는 거니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생각이 너무 많은가.”


노점 안으로 들어온 백서군은 내부를 정리했다.

오픈 준비는 언제나 다른 매장보다 조금 더 빠른 편이 좋다. 그래야 손님들을 일찍 받을 수 있으니까.

더구나 사천지회가 열리는 지금은, 일찍 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으면 그게 더 낫다.

몸은 고생하더라도 그만큼 벌어들이는 돈이 있으니.


“통천향도 간만인데.”


차 달이는 냄새가 향긋하다.

제대로 우려진 통천향의 찻물은 옅은 녹색이 살짝 섞은 금빛을 띤다. 보이차와 달리 뜨거운 물로 차를 씻어내는 세차(洗茶)까지 굳이 거칠 것도 없다.

물론 그래도 가장 처음 우린 차는 한 번 덜어내는 것이 맞았다.

초탕(初湯)한 물을 따라내고, 제대로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고, 달고···. 전에 먹어봤을 때랑 같군. 가짜는 아니야.’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

생강의 매운맛이 단맛과 섞여 주는 맛이 농후하다. 차를 마시자마자 단맛이 올라와 입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

시간이 흘러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여운 같은 뒷맛.

백서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스승님은 이걸 회감(回甘)이 좋다, 라고 하셨었지.”


쓴맛은 침샘을 자극해 침의 분비를 돕는데, 차를 마시면서 올라오는 살짝 쓴맛이 침샘을 자극해 나오는 침이 혀 앞쪽으로 돌아 나와 느끼게 되는 약간의 단맛을 회감이라 이야기한다.

차를 마시고 난 후에도 여전히 입안에서 침이 그치지 않고, 미묘한 느낌을 일으키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 생진(生津)과 생진회감(生津回甘)이라 부르곤 한다.

물론 굳이 차를 품평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품평가가 아닌 이상, 굳이 알 필요는 없는 말이다. 백서군이야 스승으로부터도 차에 미친 놈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하다 보니 배우게 된 것이었다.


“최상품이군. 확실히.”


백서군은 팔을 쭉 펴면서 몸을 풀었다.


“오늘도 열심히 해볼까!!”


저 하늘에 주홍빛 구체가 어렴풋이 맺히는 게 보인다.

사천지회의 두 번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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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통천향(通天香) +10 24.09.04 13,780 273 12쪽
21 20. 재미있겠네요 +19 24.09.03 14,041 285 12쪽
20 19. 삼대포(三大炮) (2) +12 24.09.02 14,440 296 12쪽
19 18. 삼대포(三大炮) +15 24.09.01 14,451 292 12쪽
18 17. 사천제일루라는 간판, 내려주셔야겠습니다 (4) +22 24.08.31 14,948 29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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