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09화 - 동형(同形)의 하늘
신전의 서재는 꽤 크고 넓었다.
미트라의 쌍둥이 신인 오르마즈드가 지혜의 선신이기도 했기에, 미트라교의 신전들 역시 글을 가르치는 것도 문학이나 지식을 전파하고 기록하는 것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얀 벽과 짙은 나무색의 책장 사이사이로 종이냄새와 풀냄새, 무두질 된 가죽 냄새가 가득했다.
세이는 이 공간이 좋았다. 그리고 비사와 함께 들어오는 것은 더없이 즐거웠다. 아무의 방해도 없이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내심 방안의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독점욕이 불타오르는 작은 아이였다.
아무래도 글을 읽는 것이 어려운 비사가 질문하면 세이는 쉬운 말로 풀이를 적어주었다. 읽어 줄 수는 없지만, 이러한 행동들이 세이에게는 어딘가 자신이 필요성을 갖는 것처럼 느꼈다. 조금 아쉬운 것이라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의자와 탁자의 발에 덧씌운 천만큼이나 조용해야 했기에 비사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안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누구의 목소리도 없다. 모두 자신과 같고 세이 역시 모두와 같았다.
책 속은 자신과는 상관없을 듯한 그런 세계가 펼쳐져 있기에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책 속 사람들의 인생을 사는 듯 느껴졌다. 소년에게도 자신을 잊고 몰입할 세계가, 기억의 고통에 잡히지 않기 위한 도피처가 필요했다.
비사는 책장을 스치면서 느껴지는 아늑함에 청금성의 일이 아주 오래전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 자신을 스스로 비웃게 하던 그 작은 불안만 이따금 떠올라 순간을 잠시 멈추게 했지만 잊어도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왠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집중을 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이상하게도 너무나 평안한 일상이 무섭게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여기가 어디인지 이 낯선 인상의 사람들은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나 딱히 갈 곳도 없던 터라 책에 몰입한 세이는 그냥 남겨 두고 비사 홀로 신전을 둘러보게 되었다.
몇 달을 오고 갔으나 이 안을 둘러본 적은 없었다. 믿지 않는 신의 신전이라는 것은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터였다. 매끈하게 발라진 벽의 흰 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중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를 운용하지 않아도 오감이 발달 된 비사였다. 딱히 살기를 가진 것도 아니니 긴장할 필요가 없는데도 습관이란 것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서서 누군가 지나쳐가길 기다렸다. 빠르지 않은 그 발소리는 꽤 일찍 눈치를 챈 탓인지 한참이 지나서야 다가왔다. 일전에 보았던 여사제와 낯선 소녀였다. 붉은빛이 도는 금발에 보랏빛 도는 눈동자의 당차고 도도한 얼굴이었다. 소녀의 복색은 꽤 화려해 귀족의 자제인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비사는 사제를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스쳐 가길 기다리자 여사제는 눈가만으로 웃으며 답했다.
비사를 지나쳐 몇 걸음이 지나자 사제 옆의 소녀가 말을 꺼냈다.
"유달리 검은 머리 색이 있다더니, 저 소녀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있지요."
"그때 말씀드렸던 것은 어찌 되었나요. 세이카님의 신력으로 보신 것이니 틀림없겠지만, 대체 그게 무엇일까요."
"라미아님, 저같이 미천한 이가 본 것이니,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세이카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그럼 예의 그것을 마저."
소녀는 미소 지으면서도 스미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불길한 검은색이다.'
비사는 결국, 신전 안을 돌아다니던 것을 관두고 근처로 나와 가본 적도 없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번잡한 길을 지나 인적 없는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을 마냥 걸었다. 이렇게 홀로 걷다 보면 어린 날에 걸었던 비참한 길이 떠오르곤 했다.
비사의 가족들을 모다 죽이고도 윤허는 어린 비사를 끌고 갔다. 어렵사리 도망치기는 하였으나 자신을 기다릴 살아남은 가족이라고는 없었다. 그 비통함을 가슴에 품고 사람을 피해 어둑한 뒷길로, 지치고 피가 나는 다리를 질질 끌며 쉼 없이 걸었었다. 쉬고 싶어도 언제 윤허가 자신의 목을 쥐어 챌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좁은 틈을 기어들어 가지 않으면 아픈 다리를 필수도 없었다.
아득하니 먼일 같다 여기면서도 어째서인지 지금도 그곳을 헤매는 것처럼 피가 싸늘해졌다.
챙-
높은 벽 너머로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렸다.
익숙한 음. 칼 부딪히는 소리였다. 사람이 주변에 없나 살펴보고는 높은 성벽을 발끝으로 슬쩍 건드리며 올라섰다. 안쪽의 지대가 높은 것인지. 오르고 보니 안에서 보면 한층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근처의 나뭇가지 사이에 올라앉았다. 서른 명 남짓한 소년과 청년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도 무가가 있고, 무사의 직급은 있다 했으니 그런 곳 중 하나인가.'
적명가. 법력을 닦은 이와 무인의 길을 걷던 사람들의 가문. 자신의 가문. 살아남은 이는 비사 하나뿐인 사라져 버린 가문 적명. 가주의 독녀 아니던가. 옹알이보다 칼을 먼저 잡고 서른여덟의 스승 밑에서 온갖 것을 배운 비사였다. 그날, 독안개(毒霧)를 품은 밤이 오기 전에는 세상의 주인은 저였다.
'그래, 그 밤까지는 무엇이 부족했으랴.'
짙은 어둠이 눈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맑은 한낮의 오후였다.
나무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얽히고설키는 인영들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아마, 검을 쥐는 자들의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할 것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검을 손에 쥔 적이 없었다. 딱딱하니 들어차 빠진 적 없던 굳은살이 많이 물렁해져 있었다.
'살아지는구나, 살아지는 것이다. 칼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상에 투신이 필요하던가. 가공할 무공이 필요하던가. 딱히 부딪혀 오는 이도 없고, 싸울 상대도 없다. 이리 높은 나무에 오를 수 있는 것만도 충분한 것이 아닌가. 죽고 죽이고도 긴장한 채로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그냥 이대로 조용히 지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련가.'
자신이 즐겁고자 힘을 써본 적은 없는 비사였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고된 순간을 버텨야 한다는 오기밖에 몰랐다. 나무 위의 안식밖에 없는, 수풀 속에서 웅크린 잠 밖에 잘 수 없던 자신이 다시 혼자가 되어 내쳐지지 않으려 내두른 것밖에 없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지나온 길을 되짚어 신전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빠져나가 인적 없는 골목을 다시 걸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일렁이는 것이 마치 미련 많은 마음 줄 같았다. 길 끝에서 누군가 작은 손을 흔들었다. 책을 보며 기다리다 지쳤는지 입구에 서서 비사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미간을 조프린 채로 곱게 미소 지었다.
- 작가의말
날이 많이 더워지네요.
팥빙수로 삼시세끼가 먹고 싶습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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