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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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향馨香
작품등록일 :
2012.09.25 10:10
최근연재일 :
2014.12.21 16:37
연재수 :
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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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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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2.09.0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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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붉은 못 41화 - 도과(倒戈)

DUMMY

아민은 입 아프게 지껄여가며 정해 준 길을 비켜나간 비사에 실망이 아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정말로 비사에 대한 것이 믿음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발 곁에 잘 묶어 놓았다 생각한 자만이었을까.

변백(辨白) 한마디 없이 입을 다문 비사를 바라보더니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찌 되었건 다시 달래야만 했으니 작은 실수 정도는 눈감아주는 대범함이 필요하였다.

"왕자 저하! 가셔야 합니다. 폐하께옵서 저하를 모셔오라 하였습니다!"

아민의 거처 앞에선 병사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병사들을 저리 대동하고서 아비가 자신을 부를 리 없었다. 이것은 추궁하려는 부름의 마중이었다.

아민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실수였지. 그래 실수였겠지. 네가 그 뒤가 어찌 될 것인지 알면서도 그 아이를 살려두었을 리가 없지. 그렇지? 비사. 보지 못한 것이지?"

아민은 비사가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지척의 사람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측심(惻心)이 결국에야 튀어나오고 만 것이냐. 그리 내리누르라 했거늘.'

모른척해야만 했다. 실수라 덮어야 했다. 이것을 고의라 아민이 인정한다면 지금이 바로 줄이 끊어지는 순간이리라.

'헌데 얼굴을 가리었을진대, 어찌 그리 확연히 나의 사람을 보았다 말하는 것인가.'

아민은 비사가 부모 잃은 소녀를 동정하여 살려두었다 여기었기에 그 이상의 의심을 두지 않았다.

하도 재촉하여 불러대니 슬쩍 짜증이 난 아민은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문이 덜컹거리며 벽에 되돌아 부딪히자, 애꿎은 백자 찻잔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 찻잔 바닥에는 소린(小鱗) 두 마리가 푸른 염료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것들이 함께 쏟아져 나올 리도 없건만 비사의 눈에는 그들이 헤엄칠 물을 잃은 듯이 보였다. 팔딱거리는 숨을 맨바닥에 몸을 부딪치며 잃어 갈 것이다. 비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찻잔을 바로 세워 놓았다.


마중을 나온 장수를 가냘프게 뜬 눈으로 길게 내려다보자, 밖에 선 자들 모두가 고개가 뻣뻣한 왕자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도포 자락을 크게 펄럭이더니 성큼 발을 내디뎠다.

모두 초조한 움직임을 보이는 와중에도 비사는 문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을 누구보다도 비사 자신이 잘 알고 있음이었다.


이레 전, 비사는 청금성에서 멀지 않은 대작(大)의 저택에 들어 있었다. 군데군데 꽃이 새겨진 격자창이 사방을 메운 높다란 건물이었다.

그날 밤에도 청황의 하늘에는 달이 밝았다. 달이 어찌나 크고 구름도 없는지 밤이 깊었음에도 달빛만으로 글을 읽어도 될 정도였다. 달무리도 없는 것을 보니 명일(明日)도 오늘과 같이 맑을 것이었다.

비사는 주름지고 두둑한 살 속의 경추(頸椎)를 주저 없이 꺾었다. 똑바로 눕혀 놓으니 그저 잠이 든 듯이 보였다. 식지도 않은 주검 위로 일순 서안(書案)에 놓여 있던 얇은 종이가 바람에 날리며 팔랑팔랑 느긋하게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비사는 그 여유롭고 위태로운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알지 못했다. 기억에서 잊힌 것이 아니라 애당초 들은 적이 없었다. 그저 널따란 마당을 보아하니 한자리하는 인물일 것이겠다 여긴 정도였다.

'왜 죽여야 했던가.'

갖가지 이유를 둘러대던 아민이 언제부터 이유를 말하지 않았던가.

죽는 순간이나 제대로 느꼈을까 싶었으나 살아 마지막에 흘렸을 진땀이 손끝에 옮겨붙어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어딘가 찝찝한 그 감촉을 흐르는 물에 담가 휘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끼이익하고 밀려 나가는 문의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내린 뭣도 아닌 찰나의 순간 넋을 놓은 탓으로 오늘 밤, 생을 거두어야 할 자가 한 사람 늘어나고 말았다.

"웬 놈이냐!"

들어선 이는 막상 소리를 지르고서도 바닥에 누운 자를 보더니 두려워 주저하던 소녀가 급히 달려 들어왔다.

"아..아버지..."

비명이 소녀의 입을 통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니 되어요! 이리 가시면 아니 되어요. 어엉엉"

여전히 따스한 아비의 몸이 다시는 깨지 않을 것을 알아버린 소녀의 눈이 비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도 곧 죽을 목숨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목을 타고 오르는 모진 말들이라도 내뱉어야만 했다.

"저주할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네놈이 절대로 깨지 못할 고통 속에서 비참이 살아가라 저주할 것이다!"

자신이 윤허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빛을 등진 것일까. 윤허를 죽인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의미 없다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 순간부터일까.

눈을 떠도 감아도 생생한 그 고통의 냄새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어져 나와 어느새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두 얼굴이 갖는 절망에 접점이 생겨나 버렸다.


'죽여야 한다.'

아민이 머릿속에서 외쳐대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의 뒤를 쫓을 테니까.'

'나의 뒤를...'

'그러니 죽여야 한다.'

비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조용한 손의 움직임에도 소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올려진 그 손이 얼굴을 가리던 천을 잡아끌자 고이 덮었던 표정이 드러났다. 그림자 드리운 탓에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마치 비어 있는 것마냥 보였기에 소녀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한동안 두 사람 다 미동이 없었다. 소녀의 눈이 어둠에 익숙어지자 비사의 앳된 얼굴이 샅샅이 눈에 새겨졌다. 비통한 눈을 한 살인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이제 이 얼굴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리라.



비사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살려두었다. 마주쳐 버렸음에도 살려두었다. 구하는 신은 없으나 벌하는 신이 있다 하면 저 소녀는 독을 품은 살이 되어 자신을 꿰뚫고 아민에게로 갈 것이었다. 그것이 못내 무거운 마음이 되었으나 윤허와 같은 자신도, 아민도 벌을 받아야 하지 않은가. 응당 그래야만 하지 않은가.

낭월(朗月)의 밤이라 하였다. 비사는 발아래 그림자가 한층 더 깊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으나 그 밑이 내려다보이도록 멈추어 서지 않았다.


작가의말

- 이전 고쳐보겠노라 말씀 드린 것들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모자란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반부에 남겨주시는 흔적도 전부 소중히여기고 꼬박꼬박 확인한답니다! 싸랑이 넘치지요. ㅎㅎㅎ 관심을 주는 것에 주저하지 마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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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2

  • 작성자
    Lv.4 느리아리
    작성일
    12.09.05 15:05
    No. 1

    뭘 그리 죄송해하십니까.
    글이 있어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DragonLo..
    작성일
    12.09.05 21:25
    No. 2

    허허... 갈수록 아민 개객끼.. 자신을 구해준 어린아이에게 정적제거를 시켜놓고 죽이지 않았다고 흥분하고 나무라는....정말 쓰레기군요..묶어두다니...애초에 비사를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다는 얘기니...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2.09.05 21:54
    No. 3

    로페마님// 으하하 손이 느린게 죄송한!? ㅎㅎ 항상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간 되셨기를 바랍니다. ^^

    DragonLord님// 대상이 쪼오금 다르긴 하지만, 아민으로서는 어느새 비사가 잘 부릴 만한 수족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4 재회
    작성일
    12.09.05 22:39
    No. 4

    우리 비사 서클렌즈도 끼는군요ㅎㅎ
    삽화를 보니 분위기가 쉽게 상상이 가네요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2.09.05 22:54
    No. 5

    재회님// 으하하 비사는 미용에 신경을 거의 쓰지 않는... ㅎㅎㅎ 사실 타이틀에 붙어있는 그림은.. 옷이라도 좀 판타지 스럽게 입혀보자 했던... 기분이었습니다. ㅎㅎ 40화에 붙여 놓은 회색 그림이 좀 더 비사의 느낌과 닮지 않았을까 해 봅니다. 표정 없긴 어느 그림이나 똑같지만 말이지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5 아스라인
    작성일
    12.09.06 12:32
    No. 6

    과거 회상 부분에서 약간의 배경 묘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과거는 동양적 세계라 전각이라던가 기와집 천장 아래서. 정도의 묘사만 있어도 장면이 좀 더 잘 그려질 듯. 그냥 잡설입니다.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2.09.06 13:41
    No. 7

    아스라인님// 그렇군요! 회상 부분이 중간중간 나오고 짧게가려하니 뭐랄까 이야기와 분위기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기에 배경 묘사를 좀 빼버린 감이 있었군요. 변명은 고만쓰고 좀 더 묘사에 신경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

    전각과 기와를 넣자니 말씀해 주신 것을 바로 써먹자니 조금 그러하여 다른쪽이나마 조금 수정을 해보았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아스티자
    작성일
    12.09.06 20:36
    No. 8

    짧습니다.....짧아도 너~무 짧아요ㅠㅠ
    부디 은혜로운 글 많이 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sfartar
    작성일
    12.09.11 22:39
    No. 9

    스스로 죽음을 생각한 것이려나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2.09.11 22:46
    No. 10

    아스티자님// ㅠㅠ 내용상 여기서 끊어야만 한 이마음을! !!!
    오늘도 감사합니다!

    계룡산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강철신검
    작성일
    13.01.23 01:10
    No. 11

    재밌게 읽고 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형향馨香
    작성일
    13.01.23 03:22
    No. 12

    헉! 강철신검님!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우와!!! 우오!
    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왠지 부끄러워지는 이 마음은 뭘까요 ㅎㅎ 이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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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붉은 못 39화 - 도과(倒戈) +9 12.08.27 1,821 80 11쪽
38 붉은 못 38화 - 흑백논리(黑白論理) +12 12.08.25 1,853 5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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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붉은 못 36화 - 결련(結連) +2 12.08.08 1,899 56 10쪽
35 붉은 못 35화 - 결련(結連) +13 12.08.06 1,768 51 13쪽
34 붉은 못 34화 - 결련(結連) +6 12.07.31 1,974 64 17쪽
33 붉은 못 33화 - 결련(結連) +14 12.07.30 2,231 47 13쪽
32 붉은 못 32화 - 지주사(蜘蛛絲) +13 12.07.28 1,981 66 10쪽
31 붉은 못 31화 - 지주사(蜘蛛絲) +12 12.07.27 1,812 43 10쪽
30 붉은 못 30화 - 지주사(蜘蛛絲) +8 12.07.26 1,705 43 7쪽
29 붉은 못 29화 - 지주사(蜘蛛絲) +10 12.07.25 1,738 37 9쪽
28 붉은 못 28화 - 동행(同行) +12 12.07.24 1,834 39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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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붉은 못 25화 - 동행(同行) +10 12.07.20 1,875 45 14쪽
24 붉은 못 24화 - 사람의 손 +9 12.07.19 1,640 56 11쪽
23 붉은 못 23화 - 사람의 손 +16 12.07.18 1,963 46 8쪽
22 붉은 못 22화 - 사람의 손 +12 12.07.17 1,818 44 8쪽
21 붉은 못 21화 - 사람의 손 +12 12.07.16 1,952 50 11쪽
20 붉은 못 20화 - 령회(領會) +12 12.07.14 1,966 43 20쪽
19 붉은 못 19화 - 령회(領會) +12 12.07.13 1,901 38 9쪽
18 붉은 못 18화 - 령회(領會) +15 12.07.12 1,960 4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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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붉은 못 04화 - 죽은 태아(胎兒) +14 12.06.13 2,917 46 8쪽
3 붉은 못 03화 - 죽은 태아(胎兒) +11 12.06.12 3,269 48 12쪽
2 붉은 못 02화 - 죽은 태아(胎兒) +17 12.06.10 5,691 85 26쪽
1 붉은 못 01화 - 이향(異鄕) +22 12.06.10 10,105 6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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