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41화 - 도과(倒戈)
아민은 입 아프게 지껄여가며 정해 준 길을 비켜나간 비사에 실망이 아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정말로 비사에 대한 것이 믿음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발 곁에 잘 묶어 놓았다 생각한 자만이었을까.
변백(辨白) 한마디 없이 입을 다문 비사를 바라보더니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찌 되었건 다시 달래야만 했으니 작은 실수 정도는 눈감아주는 대범함이 필요하였다.
"왕자 저하! 가셔야 합니다. 폐하께옵서 저하를 모셔오라 하였습니다!"
아민의 거처 앞에선 병사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병사들을 저리 대동하고서 아비가 자신을 부를 리 없었다. 이것은 추궁하려는 부름의 마중이었다.
아민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실수였지. 그래 실수였겠지. 네가 그 뒤가 어찌 될 것인지 알면서도 그 아이를 살려두었을 리가 없지. 그렇지? 비사. 보지 못한 것이지?"
아민은 비사가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지척의 사람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측심(惻心)이 결국에야 튀어나오고 만 것이냐. 그리 내리누르라 했거늘.'
모른척해야만 했다. 실수라 덮어야 했다. 이것을 고의라 아민이 인정한다면 지금이 바로 줄이 끊어지는 순간이리라.
'헌데 얼굴을 가리었을진대, 어찌 그리 확연히 나의 사람을 보았다 말하는 것인가.'
아민은 비사가 부모 잃은 소녀를 동정하여 살려두었다 여기었기에 그 이상의 의심을 두지 않았다.
하도 재촉하여 불러대니 슬쩍 짜증이 난 아민은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문이 덜컹거리며 벽에 되돌아 부딪히자, 애꿎은 백자 찻잔의 물이 쏟아져 내렸다. 찻잔 바닥에는 소린(小鱗) 두 마리가 푸른 염료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것들이 함께 쏟아져 나올 리도 없건만 비사의 눈에는 그들이 헤엄칠 물을 잃은 듯이 보였다. 팔딱거리는 숨을 맨바닥에 몸을 부딪치며 잃어 갈 것이다. 비사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찻잔을 바로 세워 놓았다.
마중을 나온 장수를 가냘프게 뜬 눈으로 길게 내려다보자, 밖에 선 자들 모두가 고개가 뻣뻣한 왕자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도포 자락을 크게 펄럭이더니 성큼 발을 내디뎠다.
모두 초조한 움직임을 보이는 와중에도 비사는 문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을 누구보다도 비사 자신이 잘 알고 있음이었다.
이레 전, 비사는 청금성에서 멀지 않은 대작(大)의 저택에 들어 있었다. 군데군데 꽃이 새겨진 격자창이 사방을 메운 높다란 건물이었다.
그날 밤에도 청황의 하늘에는 달이 밝았다. 달이 어찌나 크고 구름도 없는지 밤이 깊었음에도 달빛만으로 글을 읽어도 될 정도였다. 달무리도 없는 것을 보니 명일(明日)도 오늘과 같이 맑을 것이었다.
비사는 주름지고 두둑한 살 속의 경추(頸椎)를 주저 없이 꺾었다. 똑바로 눕혀 놓으니 그저 잠이 든 듯이 보였다. 식지도 않은 주검 위로 일순 서안(書案)에 놓여 있던 얇은 종이가 바람에 날리며 팔랑팔랑 느긋하게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비사는 그 여유롭고 위태로운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알지 못했다. 기억에서 잊힌 것이 아니라 애당초 들은 적이 없었다. 그저 널따란 마당을 보아하니 한자리하는 인물일 것이겠다 여긴 정도였다.
'왜 죽여야 했던가.'
갖가지 이유를 둘러대던 아민이 언제부터 이유를 말하지 않았던가.
죽는 순간이나 제대로 느꼈을까 싶었으나 살아 마지막에 흘렸을 진땀이 손끝에 옮겨붙어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어딘가 찝찝한 그 감촉을 흐르는 물에 담가 휘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끼이익하고 밀려 나가는 문의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내린 뭣도 아닌 찰나의 순간 넋을 놓은 탓으로 오늘 밤, 생을 거두어야 할 자가 한 사람 늘어나고 말았다.
"웬 놈이냐!"
들어선 이는 막상 소리를 지르고서도 바닥에 누운 자를 보더니 두려워 주저하던 소녀가 급히 달려 들어왔다.
"아..아버지..."
비명이 소녀의 입을 통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니 되어요! 이리 가시면 아니 되어요. 어엉엉"
여전히 따스한 아비의 몸이 다시는 깨지 않을 것을 알아버린 소녀의 눈이 비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도 곧 죽을 목숨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목을 타고 오르는 모진 말들이라도 내뱉어야만 했다.
"저주할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네놈이 절대로 깨지 못할 고통 속에서 비참이 살아가라 저주할 것이다!"
자신이 윤허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빛을 등진 것일까. 윤허를 죽인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의미 없다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 순간부터일까.
눈을 떠도 감아도 생생한 그 고통의 냄새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어져 나와 어느새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두 얼굴이 갖는 절망에 접점이 생겨나 버렸다.
'죽여야 한다.'
아민이 머릿속에서 외쳐대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의 뒤를 쫓을 테니까.'
'나의 뒤를...'
'그러니 죽여야 한다.'
비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조용한 손의 움직임에도 소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올려진 그 손이 얼굴을 가리던 천을 잡아끌자 고이 덮었던 표정이 드러났다. 그림자 드리운 탓에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마치 비어 있는 것마냥 보였기에 소녀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한동안 두 사람 다 미동이 없었다. 소녀의 눈이 어둠에 익숙어지자 비사의 앳된 얼굴이 샅샅이 눈에 새겨졌다. 비통한 눈을 한 살인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이제 이 얼굴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리라.
비사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살려두었다. 마주쳐 버렸음에도 살려두었다. 구하는 신은 없으나 벌하는 신이 있다 하면 저 소녀는 독을 품은 살이 되어 자신을 꿰뚫고 아민에게로 갈 것이었다. 그것이 못내 무거운 마음이 되었으나 윤허와 같은 자신도, 아민도 벌을 받아야 하지 않은가. 응당 그래야만 하지 않은가.
낭월(朗月)의 밤이라 하였다. 비사는 발아래 그림자가 한층 더 깊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으나 그 밑이 내려다보이도록 멈추어 서지 않았다.
- 작가의말
- 이전 고쳐보겠노라 말씀 드린 것들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모자란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반부에 남겨주시는 흔적도 전부 소중히여기고 꼬박꼬박 확인한답니다! 싸랑이 넘치지요. ㅎㅎㅎ 관심을 주는 것에 주저하지 마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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