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못 42화 - 도과(倒戈)
아민은 자신의 거처인 영민당에 감금을 당하였다. 은세와 담소를 나누던 화원을 잇는 회랑 밑으로는 근위군들이 들어섰다.
아민이 그토록 원하던 높다란 계단 위, 붉은 비단에 황룡이 수 놓인 의자에 앉은 채로 아비는 목숨을 부지할 것이면 몇 가지의 작은 죄를 인정하고 이곳에서 멈추라 하였다. 조용히 궐을 나가 한량 놀음이나 하라는 뜻이었다. 아민은 탑전(榻前)에서 이를 악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멈추고 나면 대체 뭐가 남는다 말입니까."
그 순간을 떠올리니 다시 굳게 닫힌 눈과 악문 입이 그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차자(次子)인가. 어찌하여 서자(庶子)인가.'
세상에 날 적부터 주어진 분노가 다시금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지금껏 위로 오를 것이라는 굳은 의지와 야망 밑으로 잘 묻어 두었음에도 잠시간의 불안으로 다시 그것들이 비죽이 튀어나오기 시작하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누르고 있자니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고함을 지르며 주고받고 하더니 결국에야 문이 열리었다. 진영과 태준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출입을 금하라는 명이 있었을 것이나 밀어붙여 파고든 모양이었다. 진영이 들어서자마자 급히 목문(木門)을 걸어 잠갔다. 아무리 명이 있다 한들, 왕자 거처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었다.
금수 놓인 포가 아닌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 내린 왕자의 모습에 울화가 치미는 듯 두 사람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제 이 영민당 안에 비단이라고는 침상 위의 포단(蒲團)뿐인가 싶어졌다. 이들의 무너진 표정을 보는 아민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능숙히 속의 열을 감춘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은세는 어찌하고 있다더냐."
"당분간 나오시지 못할 듯합니다."
"그렇겠지."
진영이 무언가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듯이 보였다.
"더 할 말이 있느냐."
"그것이..."
"말해 보아라."
"은세 소저의 아비 되는 자가 이르길 저하께서 소저를 고이 모셔가지 못할 것이거든 붕정사(鵬程寺)로 보내야 할지 모를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찮은 이의 가당찮은 말이라 전하기가 껄끄러웠던 진영이었다.
"그 졸부(拙夫) 아비는 내가 황위에 오르지 못하여도 녹봉(祿俸) 꽤나 받을 것이라 꿈꾸고 있었을진대 폐서인이 되면 그것도 없을 것이니 그리 내치겠다는 것인가. 내 사람이라 소문이 났을 테니 제대로 된 집에는 시집도 보내지 못할 것이겠지. 붕정(鵬程)이라는 고약한 이름의 절도 있더냐. 되지도 않을 으름장을 놓는군. 은세 마음길이 고될 것이 걱정이구나."
붕정(鵬程), 한 번 날면 구만리를 난다 하는 전설의 새의 이름이었으니 그만큼 가야 할 길이 멀고 멀다 하는 뜻이었다. 아민이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은세를 그리 멀리 보내버리겠다는 뜻이리라.
청황의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될 것이라 그리 침을 튀기며 아부를 해대더니 뒤로 도는 것도 참으로 빠른 혓바닥이었다. 위기가 보이자마자 발을 빼겠다는 심산이 바로 보여 비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젊어서는 무과에 급제하지 못하여 십 년이 넘도록 무과를 준비한다 놀러만 다니며 집안 재산을 다 말아먹고 나이 먹어서는 처가 덕에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가던 자였다. 어찌 그런 졸부(拙夫)의 씨에서 은세 같은 여인이 난 것일까.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무사히만 있다면 어디를 가던 다시 데려오면 될 것이다. 몸 상하지 않으면 되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안전히 있을 은세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를 다시 품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라도 아민은 당장 자신이 봉착한 문제를 풀어내야 했다.
"곧 추국이 열릴 것이다."
아비가 살해당하였으면 몸을 감추어 숨이나 쉴 것이지 작은 계집 하나가 물고 늘어져 일을 벌이고 있었다.
왕자의 명을 받은 자가 자신의 아비를 살해하였다 하며 벽보를 붙이고 고발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아진 태자의 사람들이 승기를 잡으려 몰려들어 그간 덮어지던 문제들까지 모다 꺼내 덤벼드니 폐서 시키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었다.
"혼자 이리 일을 벌일 수 있을 리 없음이고 형님의 외숙(外)인 재상이 그 소녀의 뒤를 봐주고 있을 것이지. 그 소녀, 대사농(大)의 여식을 죽이거라. 절대로 증언할 수 없게 해야 한다. 기세를 꺾어야 해."
"대사농(大)의 여식이 죽는다 하여 쉬이 덮어지겠습니까."
"전곡(錢穀)과 금백(金帛)을 관리하던 자가 아니더냐. 재정을 맡은 자이니 문제를 만들면 만들어질 것이다. 있어야 할 것들이 빈다 하여라. 장부를 만들어 대사농(大)의 문고(文庫)방에 꽂아두고 그 집의 창고를 가득 채워 넣거라. 내 탐관을 처단코자 사람을 보낸 것이라 말할 것이니 함부로 한 것이 문제가 된다 할 것이나 저쪽에도 죄가 있다면 참작이 될 것이다. 그러니 여죄를 들추겠다 뜯어 물기 전에 증좌니 뭐니 선봉에서 들고 일어설 그 아이가 일단 없어져야 일이 쉬울 것이다. 목소리 내는 자의 머리가 잘리면 기세에 편승하려 눈치나 보던 것들은 재빨리 숨어들어 갈 것이다."
아민은 주저앉아 머리를 쉬게 하지는 않은 듯했는지 빠르게 계획들을 이어 말했다.
"저희가 자리를 비우면 저하의 옆이 비시질 않습니까. 비사를 보내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한 번 살려 준 이를 다시 죽일 성미가 아니 되질 않더냐. 권안이 없는 이상 늬들이 가주어야 할 성싶다. 비사는 당분간 궐에 얼굴을 내비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재상이 그 소녀를 숨기었다 하면 추국이 열리는 날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추국 날에는 궁으로 올 것이니 그 앞을 기다려야 할 것이군요. 그나저나, 비사가 왜 그 아이를 살려둔 것일까요. 지금껏 거스르는 일이 없질 않았습니까. 아까운 이인 것은 사실이나 저는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 속을 전연 짐작을 못 하겠습니다."
진영이 결국 비사에 대한 불만을 꺼내었다. 태준 역시 탐탁지가 않은 모냥이었다.
"비사를 계속 이리 두어도 되겠습니까."
"그 치도 사람이니 일 한 번쯤 그르칠 수도 있을 것이지. 지금껏 잘해 왔으니 너무 나무라지 말거라."
태준이 그간 말하지 않으려 했던 속내를 꺼내었다.
"비사는... 신념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도 열망도 없습니다. 애초에 그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태준에게 있어서 가고자 하는 뚜렷한 길이 없는 자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흔들리는 나룻배와의 연계 같다 간주하였다.
"여즉 그것을 모르더냐. 그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상실이다. 그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칼을 쥐는 것이지. 과거야 입을 닫아 아는 것이 없으나 힘을 가지고도 저리 홀로 나돌던 것을 보아 하면 가족이 모두 처참히 죽었을 게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애틋함을 느낀 몸뚱어리가 식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하니, 비사는 내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지. 이 내가, 그리고 늬들이 그 아이의 사람이지 않더냐."
"하오나. 그런 정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면 결국에야 돌아서는 날도 오지 않겠습니까. 의지로 머무는 자가 아니면 쉬이 사라질 것입니다."
"한 번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하는 아이다. 그런 이에게 잃는 것보다 큰 것이 무엇이 있겠더냐."
그의 눈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시금 살아날 길이 보였는지 머리를 아프게 하던 화가 다시 깊숙이 내려간 듯하였다.
물 아래 낀 이끼나 눈에 보이지 사람 속을 어찌 아느냐며 그리도 나이 든 누군가가 말해왔거늘, 아민은 비사의 어린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듯하였다.
죄를 묻기로 한 날이 밝았다. 이 아침을 긴장 속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었다. 재상(宰相)은 진영과 태준을 비롯하여 아민의 호위 무관들까지 모두 잡아들어야 한다 주청을 올렸으나 명이 내려질 때 즈음엔 이미 그들은 궐을 빠져나간 뒤였다.
밖으로 나온 이들은 궐로 가는 세 군데의 길목을 모두 지켜서고 있었다. 새벽 찬이슬이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하륜성에도 자객이 들었다 하던데 바선 종주(宗主)께서 사람을 보내주어 다행이로군요."
비탈길 풀숲 사이로 몸을 수그린 진영이 말을 꺼냈다.
"황비가 이참에 칼을 제대로 뽑아들긴 하였구나. 그러나 종주께옵선 의를 아는 분이시니 말을 뱉은 이상 끝까지 함께 하실 게다."
종주는 돈으로 사주(使嗾)한 강호인들로 죽어나간 아민 측 진영의 빈자리를 메워주었다. 태준이 자신들 옆으로 함께 몸을 숨긴 흑두건을 한 자들을 보며 말을 잇더니 자신도 천을 당겨 얼굴을 가리었다.
태준은 이 자리에 없는 비사보다도 돈으로 묶인 자들이 더 든든하다 여겨졌다.
"연기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근처의 다른 길로 들어섰는지 짜놓은 대로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몸을 감추었던 자들이 일제히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형상을 한 까마귀 떼가 하늘을 지나는 듯하였다.
- 작가의말
도과(倒戈)의 장에서는 붉은 못의 시작 부분에 나와 있었던 청금성에서의 일화가 일단락됩니다. 결말로 시작하였으니 끝을 알고 계실 것이나 즐거이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편에 비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장판타지 말고 다른 말은 없을까 고민중입니다. 의견 있으신 분~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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