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뇽의 화신 4
「 이곳에 사랑하는 아내 아펠리아가 잠들다. 」
“······.”
토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비석에 쓰여 있는 글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뭉클함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로선 결코 유쾌한 느낌이라 할 수 없었기에 토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시선에 바닥이 갈라져 밑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들어왔다.
그를 이곳까지 이끈 미지의 기운이 그 아래에서 더욱 짙게 흘러나오고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뭐냐, 대체 뭐가 기다리고 있는 거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토토는 흘러내려 시야를 가린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계단을 향해 움직였다.
네 개의 문.
모두 열려있었지만, 토토는 첫 번째도, 두 번째 문도 모두 그냥 지나쳤다.
열린 문틈 사이로 값진 책들과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보였지만 전혀 관심이 없는 양 무심히 지나쳤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문제의 램프가 있던 곳, 마지막 문 앞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토토는 역시나 열린 문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휑하디휑한 넓은 공간.
눈동자로 주변을 쓱 훑어보던 토토의 시선이 중앙에 놓여있는 제단에서 멈추었다.
그곳엔 램프를 감쌌던 붉은 천이 아무렇게나 놓인 채, 토토를 반기고 있었다.
토토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
“당신을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뭐, 뭐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잡으며 비틀거렸다.
“나 또한 그대를 사랑할 거요.”
“내가 죽으면 옵타티오··· 당신··· 아버지를 탓하지 마세요. 그분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용서할 수 없소. 그리고 내 사랑··· 그대는 죽지 않소.”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자신과 상관없는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파편이 되어 쏙쏙 머리에 와 꽂히자 토토는 마치 꿈을 꾸듯 멍해졌다.
쿨럭.
“아펠리아!”
“······옵타티오, 먼저 가는 것을 용서해요. 쿨럭······.”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이까짓 독은 내가 해독할 수 있을 것이오.”
“힘을 낭비하지마세요. 이것은 마법으로도 소용없어요. 그보다 당신이 선물해준 드레스인데··· 피로 얼룩져서 안타까워요.”
“이까짓 옷은 앞으로 더 많이 사줄 수 있소.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말고 편히 있으시오. 곧 성수가 있는 곳에 당도하오.”
“옵타티오··· 소용없어요. 날 이대로 두고 당신만이라도··· 당신만이라도 도망치세요.”
“그럴 수 없소. 당신이 없는 세상, 나 혼자 어찌 살아가란 말이오. 아펠리아, 조금만 참으시오. 아펠리아······.”
“······사랑해요.”
“아펠리아!”
“사랑해요······.”
“아펠리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토토의 입에서 애절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몽롱했던 눈빛도, 그를 괴롭게 했던 두통도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놀란 눈으로 시선을 아래로 하니 자신의 손에 붉은 천이 들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언제······.’
활짝 펴보니 온통 붉은색으로 얼룩진 여인의 드레스였다.
이미 고통은 사라진 뒤였으나 그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었는지 토토는 붉은 핏빛의 드레스를 쥔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조금 전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처럼 떠올랐던 장면들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 통증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자 토토의 짙은 검은 눈동자가 붉은 드레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작은 상자에 꽂혔다.
지금껏 자신을 인도했던 의문의 기운이 그 속에서 강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느껴졌지만, 토토는 자신에게 일어난 의문의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의 과거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달칵.
생각보다 상자는 쉽게 열렸다.
잠시 후, 상자 속을 들여다본 토토의 두 눈이 살짝 흔들렸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황금 구슬이 들어있던 것이다.
얼핏 황금처럼 보였지만 황금빛을 띤 구슬이었다.
토토는 눈 부신 빛을 내뿜고 있는 구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것의 정체가 무언지, 쓰임새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반응으로 보아하니 크레이뇽의 화신이 맞나 보군.”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토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버 블론드 머리카락에 화려한 레이스가 잔뜩 달린 셔츠, 그 위에 새카만 연회복을 곱게 차려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토토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 채, 입구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누구냐!”
토토의 외침에 남자는 스르르 팔짱을 풀며 허리까지 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말했다.
“어둠의 황제라고나 할까······.”
자연 토토의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의문의 상황에 처해,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도 자신의 이목을 피해 이토록 가까이 다가온 자는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토토는 어둠의 황제라고 한 남자를 좀 더 자세히 뜯어보았다.
남자의 드러난 피부는 생전 햇빛 한 번 본적 없는 듯 창백했으며 얼굴은 여인처럼 곱상하니 아름다웠다.
게다가 싱긋 웃고 있는 입술은··· 굉장히 새빨갰다.
그리고 남자의 눈동자는······.
‘흐읍!’
토토는 남자의 빨려 들어갈 듯한 짙은 어둠과 같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일순, 거대한 심연의 공포가 느껴져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저런······. 이거 참으로 묘하군. 날 가둬놓은 장본인이 내게서 공포를 느끼다니 말이야. 핫하하······.”
토토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무··· 슨 말이오? 당신을 가둬놓다니? 내가? ······당신은 누구요?”
한 걸음 다가오는 남자로 인해 토토는 짙은 경계를 하며 말투를 고쳐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보다 자신이 왜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들고 있는 그 구슬은 무엇인지··· 뭐 이런 게 더 궁금한 것 아닌가?”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 남자로 인해 본의 아니게 뒷걸음질 치게 된 토토.
그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물었다.
“날 인도한 기운이 이 구슬에서 짙게 느껴지는데··· 이 구슬이 뭔지 당신은 알고 있다는 말이오?”
질문이 끝나자마자 토토는 다시 한번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더니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토토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이목까지 속일 수 있는 대단한 마법사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현 상황이 재미있는지 실실 쪼개는 얼굴로 말했다.
“바르는 네 녀석을 위해 꽤나 많은 안배를 해놓았지. 덕분에 녀석은 자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내놓아야 했지만··· 이게 모두 네 녀석의 마지막 소원 때문이야.”
“······.”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입을 쩍 벌린 남자.
“······!”
순간,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남자의 정체가 무언지 정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입술 아래로 살짝 보이는 그것은··· 송곳니가 분명했다.
“······뱀파이어!”
돌연 남자가 몸을 붕 띄어 또다시 눈 깜짝할 새에 토토의 코앞에 나타났다.
그리곤 흠칫하는 토토의 반응을 재밌어하며 살짝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다.
콰당.
덕분에 볼썽사납게 바닥에 널브러진 토토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남자··· 아니, 뱀파이어를 노려보았다.
“크핫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아무리 환생을 했다지만 천하의 대마도사 크레이뇽의 영혼을 이 내가 가지고 놀다니··· 정말 재미있어.”
그 순간, 토토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말아 올라갔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허리를 젖히며 웃느라 토토의 변화를 의식하지 못했다.
뱀파이어의 제왕, 츠베르는 한참 웃음을 흘리다 갑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웃음을 뚝 멈추었다.
“······놀랍군. 마나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인간이라니.”
상대의 정체가 뱀파이어란 것이 드러나자 토토는 한낱 마물 따위에게 조롱받았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일었다.
토토는 대륙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마나 심법을 운기 하며 온몸에 기운을 골고루 분산하기 시작했다.
곳곳의 맥을 통과한 기운들은 그대로 토토의 양손으로 흘러 들어갔다.
스르릉.
등 뒤에 꽂혀있던 쌍검을 빼 드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처음으로 뱀파이어 츠베르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금 전까지완 다른 스산한 목소리가 토토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잘됐군. 뱀파이어 슬레이어가 돼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마치 다른 사람인 양 완전히 달라진 토토의 모습에 츠베르는 딱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꿀꺽.’
척!
자신의 의지완 상관없이 토토가 쌍검을 휘두를 기세를 보이자 츠베르가 다급히 외쳤다.
“간단해! 구슬을 삼키면 모든 의문이 풀릴 거다!”
토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 가져가며 곧바로 움직일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거센 기운이 토토의 몸을 통해 츠베르의 온 전신에 와 닿았다.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최상의 마스터가 운용할 수 있는 마나의 기운을 응용한 것이다.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선 츠베르가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바르의 안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고, 제기랄! 날 죽이면 의문은 풀리다 말거다!”
“······.”
토토의 검은 눈동자가 게슴츠레해지자 츠베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해서 말했다.
“조금 장난친 것 가지고 꽁할 건 없잖아? 어서 구슬을 삼켜봐!”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토토는 시선을 슬쩍 황금 구슬로 옮겼다.
하지만 삼키라니······.
그러나 토토의 고민과 망설임은 다음에 이어진 츠베르의 말로 인해 오래가지 않았다.
“동시대에 태어나야 하는데 각기 다른 차원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바르가 정말 애를 많이 먹은 모양이더라고.”
대체 무슨 말인지 아리송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차원’ 이란 말을 꺼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토토는 이설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와 다시 돌아갈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토토는 심호흡을 한 후, 황금 구슬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제법 크긴 했으나 억지로 삼키려 한다면 못 삼킬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혀와 닿자마자 마치 자신이 알던 세계에서의 단약과도 비슷한 기능이 있는지 서서히 녹아들어 생각 보다 삼키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뱀파이어, 츠베르가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 * *
카이는 물론 그 일행은 방금 자신들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황자를 바라보았다.
현재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황자의 궁전을 떠나려다 딱 걸려(?) 황자의 부름을 받고 성안의 집무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쨌든 램프를 얻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니 그에 대한 답례라도 하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던 카이 일행.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황자의 말에 저마다 놀란 상태였다.
황자가 자신들을 황자의 친위 기사단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다.
- 작가의말
점점 흥미로와지죵? (아니라고요? 우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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