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하러 가요 1
이어서 쪽문 안으로 들어선 보네트가 잠시 주변을 또 훑었다.
안에는 집무실보다 더욱 단출했다.
십 평 남짓한 크기에 아담한 책장이 딸린 책상이 전부였으며 책상 위에는 어린아이 얼굴 크기만 한 수정구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드르륵――
방안의 유일한 나무의자를 빼내 그 위에 앉은 보네트는 이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두 손을 수정구슬로 가져갔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와 통신을 시도할 때 주로 쓰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회색빛 수정구슬 속에서 몽실몽실 안개가 피어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내 안개가 걷히고 하나의 영상이 잡혔다.
수정구슬 속에 잡힌 영상은 사람이었다.
사오십 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제법 중후해 보이는 중년 남자.
수초 후, 영상이 더욱 뚜렷해지며 남자의 옷차림과 표정까지 세세히 수정구슬에 비치자 보네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스승님!”
스승이란다.
그녀의 이 한 마디로 상대 중년 남자가 누군지 대번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중년 남자는 바로 현 대륙에 알려진 마법사들 중 가장 고위마법사로 알려진 카페라 제국의 궁중 마법사이며 대륙 중점에 서 있는 마탑의 주인, 존바르담 스팸이었다.
존바르담의 올해 나이··· 예순이 훌쩍 넘었다고 알려졌지만, 그보다 십 년 이상은 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 오, 보네트! ≫
오랜만에 사랑하는 제자의 얼굴을 보아서일까? 보네트를 대하는 존바르담의 모습이 꽤나 반가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후 존바르담의 얼굴이 살짝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슬쩍 한 번 살펴본 뒤,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 얘야, 일은 어찌 되었느냐? 혹, 라피스가 네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냐? ≫
보네트가 홍조 띤 얼굴로 대답했다.
“기뻐하세요. 스승님께서 만드신 스크롤을 라피스에게 줬더니 굉장히 흡족해했어요.”
≪ 오! 그렇다면 내가 말한 대로 그리 행동하더냐? ≫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흠뻑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스승님, 혹시··· 황자께서 스크롤 근처를 배회라도 하신다면 그땐 어쩌죠?”
≪ 걱정 마라. 그럴 리도 없거니와 혹, 그런 일이 생겨 손해를 입으실 때를 대비해 캔슬마법이 부여된 스크롤을 녀석들에게 함께 보낼 예정이다. ≫
그제야 보네트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언제쯤 그들을 보낼 예정이신가요?”
‘그들’을 떠올리자 존바르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서리더니 이내 볼이 살짝 떨려왔다.
≪ 후훗··· 위치 추적이 성공함과 동시에 바로 보낼 게다. 이 일이 성공함과 동시에 황자를 황제로 추대하고 그의 도움으로 우리 일족이 다시 이곳 카페라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핫핫···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는 구나! ≫
존바르담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던 보네트의 입가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베어 나왔다.
그제야 보네트의 입장을 떠올린 존바르담이 웃음을 멈추고 이내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 보네트··· 얘야······. ≫
“······예, 스승님.”
≪ 조금만 참거라. 조금만 더 라피스의 옆에 있거라. 그자의 힘은 아직 우리를 능가한다.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보네트 너는, 우리 일족에 최고의 영웅이 되는 게다. ≫
활달했던 보네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슬픔이 묻어났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존바르담의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 이 못난 아비는 이 정도 말밖에 네게 해 줄 수가 없구나. 사랑한다······. ≫
“······.”
***
이설과 일행은 현재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특히··· 이설은 더욱 심했다.
한 시간 전쯤, 로빈이 통솔하는 대단원의 파티에 모건의 뺨을 때려 실랑이를 벌였던 백작 녀석, 에릭이 껴있는 것을 알았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북문을 통과하고 현 파티의 리더가 된 로빈이 기다리고 있는 무리에 합류하고부터였다.
일의 발단은 아무래도 여자인 이설과 루이스, 그리고 어린 모건이었다.
안 그래도 카이 일행에 대해 불만이 많던 로빈이다.
그는 누군가 카이 일행에 대해 불만을 말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 에릭 헤이엑이 한몫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에릭이 로빈의 곁에 붙은 뒤로 카이 일행에게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이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철저히 여행용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루이스와 모건을 발견한 에릭의 눈에 로브를 걸친 여인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그가 로빈에게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현재 그가 에릭의 감언이설에 철저히 농락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로빈이 이끄는 파티 인원수는 육십 명이었다.
마차는 이설과 카이 일행의 마차까지 모두 여덟대로 사람 수에 비해 극히 적은 수였다.
대부분이 개인 말을 끌고 왔기 때문이다.
대로엔 많은 인원으로 제법 긴 행렬이 생겨난 상태였다.
이럴 때, 가장 위험한 위치는 다름 아닌 맨 앞줄과 맨 뒷줄이다.
몬스터 중에는 습격을 좋아하는 무리가 많다.
때문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동할 땐 앞과 뒤쪽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로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가끔 예외인 경우도 있다.
흔치 않게 죄인이나 무리에서 버리는 수로 전락한 사람이 그들인데··· 주로 무리의 방패 막으로 쓰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런 치욕을 현재 이설을 비롯한 일행이 겪고 있었다.
“내 파티엔 짐만 되는 어린 소년이나 여자는 끼워줄 공간이 없소. 하지만 굳이 파티에 끼고 싶다면··· 맨 뒤에서 따라오는 것까진 허락하겠소.”
“뭐, 뭐요?”
갑작스러운 찬밥신세에 항상 차분하던 랄프마저 화를 냈다.
“미리 말하지만, 혹여, 큰일을 당하더라도 큰 도움을 바라진 마시오. 그리고··· 힘들어 이탈하는 경우가 생겨도 특별히 편의를 봐주거나 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들 따라오시오.”
“······!”
로빈의 언사에 심사가 매우 뒤틀렸으나 일행은 조용히 있었다.
솔직히 그들로선 오히려 뒤에서 따라가는 것이 더 편했다.
그저··· 누군가 이래라저래라 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과 스스로 알아서 뒤로 빠지는 것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그것도 이토록 깔보임을 당하는 것은 매우 기분 나쁘지 않은가.
화딱질 난 바이탈이 이빨을 갈며 튀어나갈 자세를 취할 때였다.
“어디 두고 보자고. 홋호호호호······.”
“······??”
스산한 마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행이 흠칫하며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한데 웃음소리의 주인공과 마주하는 순간 일행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서리?’
‘이, 이설 님?’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스산한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이설이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얼굴이 매우 평온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는 흡사,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꿀꺽.’
일행은 갑자기 로빈이란 자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따각따각······.
대단원의 파티가 오트룸을 향해 부지런히 말을 달리는 가운데······.
처음 로빈에게 파티 제의를 받았던 남자, 존이 흘깃 뒤쪽을 바라보며 로빈에게 속삭였다.
“이봐, 조금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뭐가?”
무심한 로빈의 말투에 존의 안면이 살짝 씰룩였다.
“그래도 여자와 어린아이가 낀 무린데··· 가장 후미에 배치하다니, 그러다 몬스터에게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생각보다 자상한 존의 말에 로빈이 피식 실소를 뱉어냈다.
그러자 존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뭐야? 내 말이 우습나?”
별 시답잖은 일로 일행과 티격태격하고 싶지 않은 로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이가 걱정된다면 애초에 이런 여행은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
로빈의 입가에 빈정거림이 잔뜩 묻어나왔다.
“피치 못할 사정? 하하!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줘가며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편의를 봐줄 가치가 없네.”
“자네··· 보기보다 냉정하군.”
“자네나 나나, 목숨을 걸고 이 바닥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들도 똑같이 목숨을 걸어야지. 나는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큰 피해를 보기는 싫어.”
존은 단호한 로빈의 말에 더이상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일부러 요란하게 로빈에게서 멀어졌다.
.
.
.
첫날은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로빈은 다소 이른 시각이지만 육십 명이라는 대인원을 충분히 수용할 만한 커다란 공터가 나오자마자 모두에게 야영을 준비시켰다.
하지만 여기서도 카이 일행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일이 발생했다.
로빈이 그들에게 오늘 밤 불침번을 서라 지시한 것이다.
참다못한 바우가 자신이 무기에 손을 가져가며 으르렁거렸다.
“우릴 뭐 개밥에 도토리로 아나? 차별해도 유분수지······.”
그러나 다음 흘러나온 로빈의 한마디에 바우는 무기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먼저 끝 무리부터 시작으로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설 계획이오. 당신네가 가장 끝 무리이니··· 오늘 밤은 당신들에게 부탁하는 것인데··· 싫으면 언제든지 파티에서 나가시오. 대환영이니······.”
자신의 할 말만을 끝내고 휙 돌아서 가버리는 로빈을 향해 일행이 욕설을 퍼부었다.
“밥맛없는 자식이네.”
“에라이, 똥통에 빠져 뒈질 놈 같으니라고. 카악! 퉤엣!”
“아우, 재수 없어!”
“생긴 대로 놀고 있네. 기생오라비 같은 놈.”
일행이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붓자 이설이 결국 제지했다.
“모두 그만!”
동시에 말을 멈춘 일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설을 바라본 그들은 그녀의 손이 모건의 귀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실소했다.
그러자 이설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더한 욕도 하고 싶지만, 모건을 좀 생각해주세요.”
그러면서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모건의 삼촌 카이였다.
욕설을 내뱉는 무리에 함께 동조했던 카이는 이설의 눈빛에 처음으로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
.
.
숲속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마차 안에서 모건이 편안히 잠든 것을 확인한 이설은 밤이 깊어지자 조용해진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리고 불침번을 서고 있는 일행에게로 조용히 다가갔다.
초여름을 지나 한여름 날씨로 가고 있었지만, 푸른 녹림이 우거진 숲속은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불이 꺼질세라 장작 하나를 모닥불에 던져 넣던 카이는 이설이 다가오자 조용히 속삭였다.
“모건을 보살펴줘서 고맙소.”
“······.”
모건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유독 그녀를 잘 따르는 모건이다. 그랬기에 절로 손이 갔다.
“······그렇게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소?”
일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피곤함에 지쳐 다들 잠자리에 든 상태다. 한데도 이설은 여전히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
“하아,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차였어요.”
스르륵――
순간,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에 반사돼 이설의 신비스러운 모습이 더 도드라지게 보였다.
‘흐음!’
카이는 소리 없는 신음을 토해내며 애써 시선을 모닥불로 돌렸다.
그리곤 이내 그녀에게 후드를 벗으라 권유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때 마침, 근처를 한 바퀴 돌고 루이스와 바이탈, 랄프가 돌아왔다.
“바우 영감이랑 카쿤 형님, 아이스가 안 보이네?”
“조금 전에 아이스랑 함께 주변에 알람 마법을 설치한다고 하던데··· 못 봤어?”
어느새 이들은 아이스를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풍기는 기색과 범상치 않은 분위기 덕에 이제야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됐다.
바이탈이 모닥불 한쪽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탄을 했다.
“에고고··· 오랜만에 육지를 밟았더니 긴장이 풀렸는지 피곤해 죽겠는데 꼼짝없이 날밤을 새워야 하다니··· 왠지 녀석들의 파티에 낀 게 후회되는군.”
루이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피곤하면 주무세요. 사실 불침번은 한두 명만 서도 상관없잖아요. 게다가 아이스 씨가 알람 마법까지 설치하러 간 마당에 바이탈 오빠가 잔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 없어요.”
자신을 생각해주는 루이스의 말에 바이탈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 루이스, 내가 여태 그대를 오인했었구려. 이토록 천사의 마음씨를 지녔을 줄이야!”
그때였다.
“거좀 조용조용히 좀 합시다! 무슨 불침번들이 그리 말들이 많은 거요?”
“······.”
환했던 바이탈의 얼굴이 순식간에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목소리는 극히 모기만큼 작았다.
“젠장 할, 저 녀석 얼굴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저 녀석이 불침번을 설 때 고대로 갚아 줄 테다.”
킥킥――
결국, 일행은 바이탈로 인해 숨죽이며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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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리 언니.”
“······?”
제법 늦은 시각,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설은 보던 책을 덮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루이스였다.
“······왜?”
이설이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자 루이스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들어 올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우리 요 앞에 계곡으로 목욕하러 가요.”
“······응?”
- 작가의말
이번한주도 코로나 조심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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