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자의 두번째 소원 2
존바르담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힘없고 연약한 어린 인간의 아이가 되는··· 저주마법을 걸었사옵니다.”
“······!”
“고로, 현재 신은 완벽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
곧바로 하이엘프들 속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일족의 발전을 위해 희생한 존바르담의 종족 애는 하이엘프 사회에서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신은, 천년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의 수명을 포기했지만, 후회는 없사옵니다. 제 한 몸 희생하여 하이엘프들이 카페라 제국에 다시금 뿌리를 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주라고 볼 수 없겠지만 존바르담의 말처럼 천년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들의 입장에선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게 바라는 것은 제국에 하이엘프들을 예전처럼 받아달라는 말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존바르담이 천천히, 힘을 주어 말했다.
“전하께서 황제가 되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겠사옵니다. 스팸 가 뿐만 아니라, 하이엘프들 또한 전하의 편에 설 것이옵니다. 전하께선 황위에 오르신 후에 도움을 준 하이엘프 몇몇을 제국의 요직에 앉혀 주기만 하시면 되옵니다.”
존바르담의 말에 조용히 있던 안토니가 한마디 했다.
“엘프들이 인간 사회의 권력을 탐하는 게요?”
살짝 가시가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존바르담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권력을 탐하려는 것이 아니요. 경께서도 알다시피 우리 엘프들이 인간 사회에서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소. 특히, 마도사 크레이뇽의 저주로 인해 이곳 카페라 제국은 물론, 다른 왕국에서 조차 엘프들을 거의 볼 수가 없소.”
“······.”
간혹 인간 사회를 동경한 엘프들이 호기심에 상경하면 인간들의 좋은 사냥감으로 전락하곤 했다.
그들의 외향은 독특한 머리카락 색과 빼어난 미모로 인해 성적인 노리개로 최고였기 때문이다.
또한, 늙지도 않아 노예로 부려먹다 싫증이 나면 되팔아도 되었기에 귀족들은 엘프를 최고의 상품으로 여겼다.
존바르담의 말에 이어 처음으로 하이엘프 지젤이 입을 열었다.
“숲의 아들 지젤이라고 하옵니다.”
“······.”
“황자시여,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구하기 위해선 우리 엘프들이 인간 사회에 개입하여 직접 권력을 사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물론, 남용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수백 년 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우리 엘프들도 인간들과 어울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이엘프일족들은 그때로 되돌아가길 희망합니다.”
오래 생각하고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미 아담은 존바르담이 자신을 도와 이곳으로 온 순간부터 그의 바람이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은가.
그가 자신을 돕는다면 오히려 그동안 중립을 지키던 스팸 가와 하이엘프 일족은 물론, 마탑에 존재하는 많은 마법사들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러자 기쁨도 잠시, 그동안 쭉 생각하고 걱정했던 부담감과 무게감이 어깨를 깊이 눌러왔다.
이 많은 사람들을 등에 업고서도 황위에 오르지 못한다면 어찌 될까······.
깊이 누르는 압박감에 아담이 어두운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아직도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과 다른 파벌로 나뉜 귀족들이 많아요. 나는··· 솔직히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곧바로 안토니의 쓴소리가 튀어나왔다.
“전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이옵니다! 그런 나약한 말씀을 하시면 적들을 부추기는 꼴밖에 되지 않음을 진작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그때였다.
가만히 있던 이설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황자여, 그대에겐 내가 있다. 아직 두 가지 소원이 남아있으니 이참에 두 번째 소원을 말하겠는가.”
“······!”
이설의 말에 잠시 잊고 있었다는 양,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뭔가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때, 존바르담이 속삭였다.
“전하, 원하는 바를 말씀하시오소서.”
“······.”
잠시 홀 안에 침묵이 흘렀다.
긴장되기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설은 하루라도 빨리 황자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고 홀가분한 상태가 되고 싶었다.
.
.
.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한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자 아담이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사히 황제가 되게 해 주시오.”
오오!
사람들의 탄성을 뒤로하고 아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설의 몸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악―――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은 그대로 홀 안을 빠르게 한 바퀴 돌며 모두의 시선을 받은 채, 천천히 황자와 이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지금까지 들어주었던 소원과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는 모습에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뭐야 이건?’
급기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밝은 황금빛이 아담의 눈과 귀, 코와 입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설은 결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오오오!
당황한 그녀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과 엘프들의 입에선 놀라운 탄성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스르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빛이 아담의 몸으로 흡수됐다.
그러자 잠시 후, 두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아담을 향해 무슨 일인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이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자여, 그대의 소원은······.”
이설의 말에 모두가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뒷말은 전설에서도 나왔듯,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놔 진짜, 썅!’
무슨 일인지 그녀는 말을 천천히 내뱉으며 속으로 잔뜩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대의 소원은······.”
조금 뜸 들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모두들 여전히 얼굴에 기대감을 잔뜩 품고 이설을 응시했다.
결국 이설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
‘음?’
‘이루어질 것이다.’ 라니······.
왠지 단어선택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이는 안토니였다.
처음 소원을 들어줬을 당시, 이설이 했던 말은 ‘소원은 이루어졌다.’ 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그때였다.
“나 참, 이런 웃기는 제약이라니! 소원을 들어주면 들어주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들어는 주되, 지니가 알아서 하라니? 이게 말이 돼? ······아 시팍 승질나네!”
“······!”
지금껏 램프의 정령으로서 꽤나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였다.
헌데 그랬던 그녀가 잔뜩 짜증 나고 귀찮다는 얼굴로 너무나 터프한 언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황자는 물론, 하이엘프까지 모두 이 변화무쌍한 이설의 행동에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실제로 대단히 짜증나고 화난 상태였다.
황금빛이 몸을 감싸는 짧은 순간에 이번 소원에 걸린 제약이 그녀의 머리에 흡수되며 저절로 알게 된 것이다.
이번에 황자가 빈 소원은 지니가 옆에서 그리되도록 도와야 하는 소원이었다.
만약 황자가 ‘내가 무사히 황제가 되게 해 주시오.’라는 말 대신, ‘지금 당장 황제가 되게 해주시오.’라고 했다면 소원은 곧바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헌데 황자는 무사히 황제가 되게 해달라고 했다.
이는, 정석대로 즉위식 날짜가 잡히고 황제의 자리에 완벽히 오를 때까지 황자를 보필하며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원이라는 말이다.
귀찮다고 소원을 다른 거로 물려달랄 수도 없다.
한번 내뱉은 소원은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곤 절대로 정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로선 대단히 귀찮은 소원이 황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니 짜증이 나지 않고 배기겠는가.
‘세계정복을 꿈꾸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 * *
거의 다 잡아놓았는데, 모두 죽일 수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진 존바르담과 하이엘프로 인해 토토의 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불편했다.
그런 토토가 복면도 벗어 던지고 크레이뇽의 무덤 주변만 왔다 갔다 하자 동료의 상처를 살피던 붉은 전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전사 각자 본인들은 돌아갈 때를 대비해 지니고 온 귀환 스크롤이 한 장씩 있었다.
현재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라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품속에 갈무리한 스크롤을 만지작거리던 전사는 돌연 고개를 휙 돌려 자신을 쏘아보는 토토의 시선에 흠칫 몸을 떨었다.
전사의 마음을 다 아는 듯 토토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너희나 나나 어쩌면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
“······.”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붉은 전사들은 저마다 침묵했다.
“적어도 비싼 스크롤 값은 하고 돌아가야 그나마 목숨은 건지겠지.”
사실 토토 자신은 목숨을 아까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한때 라피스에 의해 목숨을 구원받았던 그였기에 억울할 것은 없었다.
누구의 밑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로선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목숨값을 갚고자 라피스의 수하로 살아가던 그였다.
그런 자신이 단지 목숨 하나 때문에 이렇듯 고민하고 있다?
절대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기엔 무언가 찜찜했다.
문득 토토의 시선이 크레이뇽의 무덤 입구로 향했다.
“······.”
존바르담과 하이엘프들이 사라진 지 벌써 한 시간여가 지났지만, 안에선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혹, 램프를 손에 넣은 아이스가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능력을 개방해 틈틈이 주변 기운도 점검했다.
아이스는 물론, 그 일행과 황자까지 이미 오트룸을 빠져나간 사실을 모르는 토토는 이제나저제나 누군가 모습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
.
.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무심코 하늘을 보니 곧 어둠이 들이닥칠 것처럼 보였다.
결국,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육포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전사들을 향해 토토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너희들은 먼저 귀환하라.”
“······.”
“돌아가는 즉시, 존바르담과 하이엘프를 만난 사실을 주군께 알려라. 그리고 내 소식을 묻거든······.”
붉은 전사들은 다음 토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저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너희들이 떠난 즉시, 크레이뇽의 무덤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
“저들이 나오지 않으니 내가 직접 들어갈 수밖에.”
“······.”
* * *
붉은 전사들이 아직 귀환하기 전, 라피스는 황자가 기거하는 뉴마 궁전에 심어놓았던 세작에 의해 황자 일행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쾅!
여지없이 앉아 있던 팔걸이가 커다란 굉음을 토하며 부서져 나갔다.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황자 일행이 돌아왔다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느냐?”
보고를 올리던 서기관은 은연중에 피어나는 라피스의 살기에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곧바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 황자께서 기거하시는 뉴마 궁전에 심어놓은 모든 세작의 말이 모두 일치하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시간 전쯤, 정확히 뉴마 궁전의 정원에 황자를 비롯해 일단의 무리들이 공간이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옵니다.”
“아이스는! 아이스의 소식은 모르느냐?”
“송구하옵니다만··· 아이스 님의 소식은 들은 바가··· 어, 없사옵니다. 다만 무리 중에 마탑의 마스터이신 스팸 공작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고 하옵니다.”
쾅――
- 작가의말
제 판타지소설 ‘아포칼립스 이방인’이 네이버에 런칭됐습니다. 오늘 ^^*
이 소설도 많이들 봐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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