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하러 가요 2
목욕? 조금은 반가운 말이었다.
숲속의 바람이 제법 시원해 덥지는 않았지만, 낮 동안 씻지를 못해 조금 찝찝하던 차였다.
이설은 흘깃 주변을 살폈다.
모닥불의 불빛을 이용해 자신처럼 책을 보고 있는 아이스와 한쪽에서 대자로 뻗어 자는 바우가 보였다.
반대쪽을 살펴보니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이와 랄프, 카쿤의 모습도 보였다.
바이탈은··· 아예 침낭을 꺼내 코까지 골며 자고 있다.
이설은 잔뜩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는 루이스를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벌떡!
“하! 미치겠군.”
몇 시간째 침낭에 몸을 누여 잠을 청하던 존.
끝끝내 잠님이 오시질 않자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잠을 좀 자둬야 내일 행군에 지장이 없을 텐데······.’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정신없이 코를 골며 잠든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드르렁 쿠울―――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존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이를 갈았다.
“이 자식들, 콧구멍을 확 꿰매버릴까······.”
잠시 악담을 퍼붓던 존은 이번엔 불침번을 서는 자들에게로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후··· 적어도 저들보단 내 처지가 훨 낫군.”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존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끙··· 차라리 계곡에 몸을 좀 담그고 와야겠다.”
.
.
.
‘꿀꺽!’
존은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행운에 믿기지 않은 듯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정면을 응시했다.
때마침 은은한 달빛이 계곡에 투영돼 맑은 계곡물이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찰박찰박―――
“꺄! 서리 언니 반칙이에요!”
“후훗··· 그러니까 나처럼 완전히 몸을 담그라고.”
까르르―――
정확히 두 명의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계곡물에서 서로 장난을 치며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꿀꺽.’
존은 행여 들킬세라, 몸을 더더욱 낮추며 수풀 사이로 고개만 내민 채 시선은 뚫어지라 여인들에게 고정했다.
찰랑대는 물결을 타고 보일 듯 말 듯 심장을 죄여오는 여인들의 새하얀 살갗은 만년 총각인 존의 남심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머리까지 담그려는지 물속으로 쏙 하고 사라졌다.
그리곤 수초 후, 물을 잔뜩 머금은 머리카락을 위로 철썩! 휘날리며 유유히 수중위로 몸을 드러냈다.
그 순간! 투명한 물방울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오옷!’
존은 숨소리가 새어날까 두려워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본능적으로 틀어막았다.
‘아, 아름답다!’
새하얀 피부 위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이마 위로 쓸어 올리는 동작 하며··· 여인의 들어 올린 팔로 인해 살짝 시야에 비친 젖가슴은··· 과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무언가가 존의 가슴에 사정없이 매다 꽂혔다.
그녀 외에 다른 여인도 있었지만, 존의 눈엔 오직 신비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만 보였다.
이설.
오랜만의 목욕을 즐기러 계곡으로 나왔지만, 존은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후드를 벗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현재 처지를 망각하고 정신없이 이설을 훔쳐보던 존은 미처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
카이는 잠시 랄프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이설과 루이스가 자리에 없는 것을 눈치채고 잠시 그녀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둘 다 나타나지 않자, 왠지 모를 불안감에 그녀들을 찾아 나섰다.
가장 먼저 그가 걸음을 옮긴 곳은 계곡이 있는 곳이었다.
늦은 시각이라 어두웠지만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덕분에 제법 시야가 확보된 상태다.
첨벙첨벙―――
인위적인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계곡물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카이는 조심스레 계곡으로 한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생소한 뒷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카이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건장한 남자의 뒷모습.
남자는 제법 울창한 수풀 속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계곡 쪽을 엿보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카이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추리할 수 있었다.
존은 카이가 바짝 다가왔음에도 온통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걸 어찌할까··· 고민하던 카이의 시선이 무심코 존이 향하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잠시 후, 카이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보기보다 풍만한 젖가슴을 흔들어대며 루이스가 목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당황하여 시선을 돌린 카이의 두 눈이··· 이번엔 완전히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짜고 있던 이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한데··· 마침 그녀가 살짝 몸을 일으키며 아슬아슬하게 배꼽 위까지의 반라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꿀꺽.’
카이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
여자의 나신이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질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문득, 자신보다 더 심한 떨림으로 온몸을 떨어대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한데 자세히 살피니··· 코피까지 흘리고 있다?
순간, 카이는 강한 살기를 발산했다.
녀석이 정신없이 훔쳐보고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가 루이스라 할지라도 가만둘 생각은 없었다.
와락――
“크아악!”
갑자기 뒷목을 잡힌 존은 심장마비에 걸린 사람마냥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괴성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달밤의 목욕을 즐기던 이설과 루이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꺄아――
“뭐, 뭐예요!”
이설의 날카로운 외침에 카이는 자신은 절대 잘못이 없다는 듯, 존의 멱살을 바꿔 쥐며 잡아먹을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이 녀석이 당신들을 훔쳐보고 있었소!”
“꺄! 변태새끼!”
물속으로 몸을 숨긴 루이스가 손에 잡힌 돌을 움켜쥐고 존을 향해 던졌다.
따악――
“큿!”
정말이지 놀라운 명중률이었다.
루이스의 분노에 의한 질책은 어둠도, 물속도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너 같은 놈은 남자들의 수치야!”
퍼억――
“크악!”
턱까지 카이에게 가격당했다.
존은 몰려오는 고통과 수치심에 정신이 없었다.
“카이 아저씨! 그 자식 꼭 붙잡고 있어요!”
루이스가 옷을 벗어둔 곳으로 철벅 철벅 뛰어가며 빽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옷은 수풀이 무성한 바위 위에 벗어놓은 상태다.
반면에 이설은 난감했다.
그녀는 루이스와 다소 떨어진 넓은 바위 위에 옷을 벗어둔 상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옷을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존으로 인해 분을 애써 삭이고 있는 루이스는 정신이 그쪽으로 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옷이 젖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대충 챙겨 입고는 곧바로 씩씩대며 가버렸다.
“야!”
퍽――
“크아악! 자,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정강이를 걷어차인 존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애원했다.
맘 같아선 당장 실력으로 제압해 상대를 누르고 싶었으나, 어디까지나 자신이 먼저 잘못하지 않았던가.
“듣긴 뭘 들어? 치한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또다시 루이스가 한쪽 발을 들어 치려 하자, 존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나, 나도! 하도 더워서 목욕이라도 하려고 온 거요!”
“······.”
존은 루이스가 자신의 말에 잠시 주춤하자 이에 힘을 얻어 계속해서 빠르게 말했다.
“그러다 다, 당신의 모습이 너, 너무나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소!”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사람만 틀릴 뿐이지 반은 맞는 소리 아니냐.’
존은 어떻게든 현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하려면 확실히 하자.
“한눈에 반했소. 내 이름은 존 버나드요. 귀족은 아니지만··· 한때 기사직을 하사받은 적이 있어 버나드란 성을 지금껏 사용하고 있소.”
“······!”
“시, 실례지만 그대의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겠소? 부, 부탁이오.”
이왕이면 저쪽 여자분의 이름을 알고 싶었지만, 현재는 이쪽이 더 무섭다.
그런데···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
루이스는 몽롱한 눈빛으로 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에 반했소.’
이 얼마나 멋진 말이던가!
여자의 몸으로 험한 일을 하면서도 늘 버리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운명 같은 사랑이었다.
루이스는 조금 전 상황은 그새 까먹은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존을 바라보았다.
.
.
그 모습을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카이.
문득, 아직껏 이설이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그녀가 있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설?”
“······.”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카이는 눈에 힘을 주어 이설의 옷가지가 놓여 있던 곳을 살폈다.
“······!”
옷은 그대로였다.
“이설!”
물가를 향해 외치는 카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루이스와 존이 다가왔다.
“왜 그래요?”
“이설이 없어졌소!”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언니는 분명 저쪽에······.”
없었다.
루이스는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폈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하자 루이스를 비롯해 카이와 존 또한 분주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그때······.
부스럭――
뒤쪽에서 들리는 소음에 세 사람이 일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니?”
“이설!”
어느새 말끔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이설이 한 손에 랜턴까지 들고 여유 있게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 다들 뭐 하는 거에요?”
능청스러운 이설의 모습에 순간, 카이가 화를 버럭 냈다.
“옷은 여기다 벗어두고 대체 어디로 사라졌던 거요! 기척이라도 내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니오!”
카이의 말에 이설이 콧방귀를 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기척을 팍팍 내고 알몸으로 당신 앞에 섰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무, 무슨! 아, 아니··· 그보다 이 짧은 시간에 언제 사라졌다 언제 옷을 갈아입고 나타······.”
카이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설이 어느새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한데··· 머리카락이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아 낮과는 다른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조금 전 그녀의 눈부신 알몸이 떠올랐다.
‘뭐, 뭐야! 왜 하필 지금 그 생각이 나는 거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행히 달빛에 동화돼 자연히 표정을 감출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한데 그때, 카이에게 가까이 다가간 이설이 랜턴을 위로 치켜들며 카이의 얼굴을 비추었다.
“······?”
순간 눈 주변이 환해지자 카이의 눈살이 자연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설이 까치발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카이의 얼굴로 바짝 가져가 나직이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내 알몸을 본 대가는 꼭 갚아야 할 거예요.”
‘흠칫!’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르 멀어지는 이설.
카이는 그 순간 자신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는 그녀를 발견했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카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이설은 마차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가 물 밖으로 튀어나가고 모두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향할 때,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능력을 사용해 바로 마차로 돌아왔다.
다행히 모건은 세상모르게 곤히 자고 있었다.
재빨리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문득, 갑자기 사라진 자신 때문에 카이와 루이스가 찾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녀는 곧바로 랜턴을 들고 계곡으로 다시 향했다.
때마침 계곡 쪽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일의 전말을 묻는 카이의 질문에 당황한 그녀.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 이설은 오히려 강하게 나가는 걸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카이를 놀리는 것이 꽤 재밌다?
이설은 언제까지 통할지 모르지만 당분간 이 방법을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