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펠리아의 화신 4
“천하의 뱀파이어의 제왕께서 또다시 크레이뇽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게 생겼군.”
문득, 과거 크레이뇽의 손에 잡혀 그의 밑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올랐다.
크게 나쁜 기억은 아니지만 뱀파이어 중에서도 고귀한 혈통을 자랑하던 자신이 한낱 인간 따위의 명령을 받으며 지냈다는 사실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영원의 안식을 취하던 자신을 깨운 크레이뇽의 흑마력은 대단했다.
단숨에 자신의 자아를 휘어잡고 권위의 카리스마를 이용해 자신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데 너무 쉽게 성공했던 것이다.
츠베르는 수만 년을 살아오면서 생전 처음으로 눈앞의 존재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꼈다.
이 순간 그는 이번 임무를 마지막으로 크레이뇽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바르를 한없이 저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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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쿵――
“······!”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울리는 소음에 츠베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리의 근원이 토토에게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기야 토토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가 싶더니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그의 주변을 회오리치듯 둘러싸고 있었다.
왠지 이대로 있다가는 그 기운에 자신 또한 휘말릴 듯싶어 츠베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피할 준비를 했다.
쩌쩌적――
기운의 여파로 무덤 주변에 균열이 가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콰콰쾅―――
‘젠장!’
눈 깜짝할 새에 츠베르의 몸이 파편과 함께 사라졌다.
그 순간에도 토토는 여전히 무아지경에 빠진 듯 허공에 붕 뜬 상태로 두 눈과 입술을 굳게 닫은 채였다.
그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거칠게 휘몰아쳤던 기운의 여파로 거대한 크레이뇽의 무덤이 파괴되는 순간, 토토의 육신에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누에가 나비로 변하듯, 뱀이 허물을 벗듯! 마치··· 기존의 육체를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몇 단계 발단된 뛰어난 육체로 탈바꿈하듯··· 그의 육신이 완전히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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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궁――
열심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보물들을 챙기고 있던 이설은 갑자기 무너져 내릴 듯한 진동과 함께 들려오는 굉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왜······.”
푸스스······.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자 그녀는 얼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설은 남아있던 보물들을 황급히, 한꺼번에 싹쓸이한 후, 서둘러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능력을 사용하기도 전에 천장이 먼저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꺅!”
워낙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이설은 이동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보호했다.
우루루루―――
콰콰쾅쾅――――
크레이뇽의 무덤이 내려앉으며 완전히 무너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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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십 여분 후.
자신으로 인해 무덤이 무너져 내린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토토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이제 폐허가 된 무덤의 한복판.
주체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이 온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자 토토는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넘쳐나는 힘과 무아지경 속에서 각성한 영혼의 기억으로 인해 마치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 온몸을 전율케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처음보다 어딘지 많이 변해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비롯해 외향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구릿빛으로 빛나던 피부는 마치 곱디고운 여인의 피부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부드러운 우윳빛의 살결로 변해있었다.
게다가 새카만 눈동자는 무한한 기운이 숨어있는 듯 깊고 깊게 느껴졌으며 전보다 강인한 기운이 그의 온몸에서 피어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열린 그의 입가에서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회가 새롭군.”
주변을 훑어보는 그의 두 눈에서 황금빛이 살짝 새어 나왔으나 한번 깜빡임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문득 토토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슬쩍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린 그가 나직이 무어라 중얼거리자 발끝에서 시커먼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토토의 온몸을 감싸며 어느새 검은 무복이 형성됐던 것이다.
투투툭······.
“······!”
갑자기 들려오는 소음에 토토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무너진 돌덩어리들 틈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묘한 광경에 토토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호오!”
잠시 후, 드러난 정체에 토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스톤 골렘이 잔뜩 웅크렸던 몸을, 마치 기지개를 켜듯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인간 남녀 한 쌍이 보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알렉스와 멜라니였다.
자신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을 지키라고 했던 명령을 골렘이 끝까지 지켰던 것이다.
골렘은 크레이뇽 시절, 무덤을 지킬 가디언으로 삼기 위해 만든 존재들이었다.
토토는 각성한 지금에서야 골렘들이 자신을 보자마자 주인으로 인식했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각성하기 전,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알렉스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토토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알렉스와 멜라니를 향한 토토의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법은 일절 쓰지 않고 오로지 토토 본신의 무공만으로 가볍게 폐허를 뛰어넘던 그의 감각에 또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들썩들썩······.
“······?”
한 무더기의 돌덩어리들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마물인가? 그렇다면 생명력이 대단하군.’
뱀파이어 츠베르는 이미 멀찌감치 피했을 테니 마물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토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콜록콜록······.”
온통 돌 부스러기로 이루어진 하얀 먼지를 뒤집어쓴 존재.
들썩이는 돌덩어리들이 주르르 좌우로 쏟아져 내리며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희멀건 존재는 연방 기침을 해대는 폼이 십 중 팔구, 인간이 분명해 보였다.
토토는 무덤 안에 알렉스와 멜라니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방 기침을 해대던 이설.
그녀는 곧이어 완전히 돌무덤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용을 쓰며 투덜거렸다.
“아 진짜, 갑자기 웬 지진이야? 적어도 달아날 시간은 주고 무너지든가!”
말은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으나 사실 한편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였다.
조금만 자신이 늦게 왔더라면 어찌 됐을까 생각하니 아찔해졌던 것이다.
아마 무너진 무덤 앞에 우둑하니 서서 그대로 사장됐을 보물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손가락만 쪽쪽 빨아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다행히도 그 찰나의 순간에도 보석들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설은 연신 투덜거리는 상황 속에서도 보물을 떠올리니 다시금 입이 절로 찢어지는 것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히죽-―
입꼬리가 귀에까지 걸린 그녀는 흡족해하는 모습 그대로 주변을 쓱 훑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
“······!”
이설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 또한 자신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런 곳에 자신 말고도 누군가 또 있었다니··· 놀라웠지만, 그보다 이 남자!
눈부시게 하얀 피부는 그렇다 치고, 쌍꺼풀 하나 없는 두 눈에 새카만 눈동자······, 길고 탐스러운 새카만 머리카락······.
결코, 상대가 미남자여서가 아니었다. (그런 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선이 분명한 얼굴 윤곽과 강인한 모습이 인상적인 남자는··· 자신이 익히 보던 스타일의, 너무나 친숙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동양인!”
남자는 이곳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볼 수 없던 동양인.
즉, 자신이 살던 세계의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계통의 친근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괴에엥장한 미남!(역시!)
다다다다다······.
토토는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존재가 갑자기 쏜살같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자신이 있던 장소가 딱히 단단하고 정갈한 바닥이 아닌 들쑥날쑥하면서도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에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여인이 어느새 코앞에 당도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면 놀라지도 않았다.
다가온 그녀가 갑자기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반응이었다.
충분히 상대방의 행동을 막거나 뿌리칠 수 있었음에도 무슨 일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이에, 토토는 속으로 대단히 놀랐다.
상대가 여인이서일까?
아니면 환골탈태를 겪으며 자신의 성격이 관대하게 바뀐 것일까?
제아무리 두꺼운 로브로 칭칭 감싸고 온통 하얀 석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 해도 상대가 여인이란 사실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정말 검은 눈동자에 머리카락도 검고··· 생김새가 딱 동양인이야! 정말 반가워요. 이름이 뭐예요?”
급기야 자신의 머리카락과 어깨까지 살짝 건드려보는 여인의 행동이 웬일인지 토토는 싫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가 어여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왜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신기한 눈으로 만져보고 바라보는 여인에게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느껴진다.
“······아펠리아?”
나직이 옛 연인의 이름을 속삭인 토토는 스르르 멀어지는 이설의 모습에 두 눈을 아련하게 뜨며 아쉬워했다.
반면에 이설은 조금 전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취한 행동을 되새기며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가 미쳤나 봐! 아무리 반갑다고, 처음 보는 남자에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실제로 그러진 않았지만, 얼굴까지 만질 뻔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러웠다.
‘쪽팔려!’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하는 마음에 이설은 마지못해 남자를 향해 슬쩍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남자가 자신을 향해 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냥 다가오기만 하면 다행이겠지만 왠지 남자의 얼굴이 온통 새빨간 것이 마치 조금 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보였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남자의 뒤를 거대한 골렘이 바짝 뒤쫓고 있다는 사실이다.
쿵, 쿵······!
그리고 그보다 더, 더더더 경악스러운 사실은, 골렘의 어깨에 떡하니 앉아있는 두 사람이 자신이 익히 아는 얼굴이라는 점이다.
‘멜라니! 애꾸눈!’
낯선 남자의 존재는 멜라니와 애꾸눈에 의해 싹 사라졌다.
애꾸눈은 어떨지 몰라도 멜라니는 자신에게 있어 결코 선한 상대가 아니지 않은가.
카이일행도, 아무도 없는 이때 저들과 결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엮이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설은 자신을 향해 무서운(?) 얼굴로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짧게 외마디를 외친 후, 곧바로 뉴마 궁전을 떠올렸다.
“죄송해요!”
스파파팟――
“아펠리아!”
토토는 눈부신 황금빛에 둘러싸여 순식간에 사라지는 여인을 향해 애절한 목소리로 아펠리아의 이름을 외쳤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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