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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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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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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가 주안 스튜디오 편집실 소파에서 한껏 늘어져 있다.

한 동안 모니터와 눈싸움을 벌였더니 눈알이 뻑뻑한 느낌이다.

침침해진 눈을 껌벅껌벅 감았다 떴다.

김준우가 류지호의 다리를 툭 치며 물었다.


“여기서 놀고 있어도 돼?”

“주말에 인천 예식장 촬영지원 나가기로 했어.”

“스튜디오는 누가 보고?”

“외삼촌하고 래리 이사.”

“경영을 그 아저씨들한테 맡긴 거야?”

“응.”

“넌 뭐하고?”

“공부해야지. 대학 가려면.”

“얼마나. 당분간?”

“아니. 1년. 근데 준우야. 1년이 2년 되고, 2년이 3년 될지도 몰라.”

“왜?”

“우리 군대 가야되잖아.”

“잔머리 굴리기는.”

“대계야. 가온의 미래를 위한 심모원려. 아참!”


늘러져 있던 류지호가 자세를 바로 했다.


“너 6방이지?”

“신검도 안 받았는데 어떻게 알아?”

“바보야, 너 이대독자잖아.”

“삼대독자만 현역 안 가는 거 아냐?”

“독자는 아마 방위 갈걸? 아무튼 넌 어떻게 할래?”

“뭘?”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진학과 가면 그걸로 끝? 그대로 웨딩사진작가로 살 거야?”

“글쎄..... 웨딩사진은 그냥 직업 같아.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너처럼 유학을 고민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

“유학?”

“응. 사진부 형들이 독일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미국이 아니라 독일?”

“미국이 좀 더 전문적이고, 유행의 첨단은 더 잘 경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스토리텔링? 그 부분은 아무래도 유럽이 좋지 않을까 해.”

“독일에 사진학과가 있었나?”

“미대로 들어가서 따로 교수 밑에서 도제로 배우는 시스템이래.”

“예술사진 찍고 싶어?”

“모르겠어. 기술은 많이 찍으면 늘잖아. 나는 너나 재정이처럼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 아무래도 무식하지.”

“야 인마, 책 많이 읽는다고 유식해지고, 안 읽는다고 무식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거냐?”

“선배들이 그러던데? 무식하면 예술 못 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선배도 책 많이 안 읽었을 걸.”


김준우가 킥킥 웃고는 말을 이었다.


“사진에 이야기를 담고 싶어.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찍거나 쨍하고 선명한 인물 사진 말고.”

“재정이도 너도 유학 가고 싶으면 가. 회사차원에서 지원할게.”

“노예계약서 쓰고?”

“당연하지. 공짜가 어디 있냐.”


미래의 웨딩사진은 포토샵으로 보정을 많이 한다.

포토그래퍼가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아니라 보정을 잘하는 사람 즉 포토샵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 고치는 것이 더 커지고 중요시 되는 것이다.

류지호는 그런 미래를 알고 있다.

하지만 친구에게 섣불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 많은 것이 후반작업에서 가능해지더라도 항상 창작자에게 기본기는 중요한 것이다.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김 기사!”

“예!”


심은주의 부름에 김준우가 편집실을 나섰다.


“여기 이분 증명사진 찍고 싶으시대.”

“예약하셨어요?”

“아니요.”


김준우가 젊은 커플과 함께 온 어머니를 힐끔거렸다.

한 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한 안색이다.


“사장님은 안계세요?”

“출장 중이세요.”


젊은 부부가 난감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여보, 다른 데로 가야 할까?”

“어머님이 돌아다니시기 힘드실 텐데. 금방 병원으로 돌아가셔야 하잖아.”

“저기...”


가족의 시선이 김준우에게 모였다.


“그냥 여기서 찍으실래요? 저도 포토그래퍼에요.”


김준우의 어려보이는 외모가 믿음을 주지 못했다.

지켜보던 류지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친구도 경험이 많아요. 저쪽에 걸려있는 사진 중에 이 친구가 찍은 것도 제법 됩니다. 이 친구가 작업한 사진이 한 번도 반품 들어온 적도 없고요.”


심은주가 액자가 걸려있는 벽으로 다가가 몇 개의 사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반값으로 해드릴게요. 이 친구 실력이 모자라서 깎아드리는 게 아니라 어머님을 뵈니 집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나서 그래요.”


창백한 안색의 어머니가 딸의 손을 살며시 끌었다.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그냥 찍자. 영정사진 찍는 것 가지고 요란 떨 거 없어.”

“어, 엄마......”

“김 서방, 그렇게 해.”

“......장모님.”

“사진사 청년, 어디 앉으면 되요?”

“아, 이리로 오세요.”


김준우가 어머니를 부축해 스튜디오 중앙의 의자로 안내했다.


팟.


조명이 들어오고, 김준우가 스튜디오용 카메라의 파인더를 보며 구도와 포커스를 맞췄다.


“어머니, 턱 좀 당기시고요.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요. 됐어요. 그대로 계세요. 예쁘게 찍어드릴게요.”


찰칵! 찰칵!


김준우는 병색이 완연한 어머니를 향해 시종일관 웃으며 요구사항을 말했다.


“거기 따님하고 사위분, 어머니 양 옆으로 서보세요.”

“......?”

“가족사진 찍어드릴게요. 서비스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어머니의 양 옆으로 딸과 사위가 자리를 잡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어머니가 눈가에 글썽이는 눈물을 연신 찍으며 사과했다.


“엄마, 울지 마.”


덩달아 딸도 훌쩍거렸고, 사위는 돌아서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울음을 참아내려는 것이다.


“누나, 어머니 화장 좀 고쳐줘.”


김준우의 말에 심은주가 사무실로 들어가 화장품을 가지고 나왔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어머니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분주히 화장을 고쳤다.


“자, 찍습니다. 웃으세요. 기임 치이. 치이즈으.”


찰칵! 찰칵!


가족사진을 찍고, 영정사진을 다시 한 번 더 찍었다.

창백한 안색.

죽음이 드리운 어머니가 파인더 안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준우는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진지하게 사진촬영에 임했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조명도 세세하게 신경 쓰고, 어머니의 표정에 대해 계속해서 주문을 넣었다.

병색이 완연한 어머니는 힘들 법도 했지만, 김준우의 열정적인 모습에 선선히 따랐다.


찰칵.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맺혀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가족이 돌아가고 류지호가 심은주에게 물었다.


“영정사진 찍으러 오는 분들 많아?”

“가끔 있어. 주로 어르신들이 오시는데, 오늘처럼 암 선고 받은 분들도 혼자 오실 때가 있어.”


김준우가 손님 가족을 배웅하고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준우야 괜찮아?”

“뭐가?”

“영정사진 찍는 거.”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김준우다.

단순히 직업으로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걸로 그치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면, 자칫 김준우의 마음에 작은 동요가 일어날 수도 있다.


“작년에 칠순이 넘은 어르신이 찾아오신 적이 있어. 추리닝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오셨는데, 상의는 깔끔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자켓을 걸치고 오셨더라고. 그리고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

"내 마지막 모습 멋지게 찍어주소 하시는 거야. 내가 영정사진을 찍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내가 뭐라 요구도 하기 전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는데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사진을 찍는 그 짧은 순간 가슴이 참 먹먹하더라.“


류지호의 걱정은 지나친 기우였다.

김준우는 의젓했고, 그런 경험을 통해 공감하는 걸 알아가는 것 같았다.

류지호는 출장에서 돌아온 박상우에게 영정사진 촬영의 경험담을 들었다.


“영정사진은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좋은데,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기 쉽지 않은 사진이지. 조금 더 젊으신 모습으로 남겨놓으시지 않으면 나중에 급하게 찍게 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류지호가 심은주에게 물었다.


“할아버지·할머니 영정사진 안 찍으셨지?”

“그러고 보니 아무도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네.”

“언제 주안으로 모셔서 찍어놔야겠어. 큰외삼촌하고 외숙모도. 아니 이 기회에 어른들 모두 찍어놓자.”

“영정사진 찍는다고 하면 좋은 소리 못 들어.”

“가족사진이나 증명사진 찍을 거라고 넌지시 말씀드려야지. 곧이곧대로 말하면 당연히 좋아하실 리가 없잖아.”

“날 잡는다?”

“누나가 나서서 가족들 스케줄 정리해봐.”


류지호가 박상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상우 형님은 양로원 가서 봉사활동으로 영정사진 찍지 않아요?”

“좀 아쉬워. 약식으로 증명사진 찍는 것처럼 찍거든. 마음 같아서는 배경, 조명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신경 써서 멋지고 화려하게 찍고 싶은데.”

“맞아요. 영정사진이라고 꼭 무겁고 어두울 필요는 없잖아요.”

“포토그래퍼가 진중하고 책임감 있는 마음으로 찍어야지 영정사진의 당사자까지 진지하고 무거울 필요는 없지 싶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김준우가 끼어들었다.


"그 사람 인생의 가장 전성기 때 모습을 컨셉으로 찍어도 좋을 거 같아요.“

“그건 네가 좀 더 내공을 쌓았을 때 그렇게 해.”

“형님, 우리도 찍읍시다.”

“영정사진?”

“양로원에 제대로 장비 챙겨서 가서 찍어 봐요. 아예 돈이 없어서 결혼식 못 올리는 부부도 지원할까요? 좋은 일도 하고, 우리 가온 이미지도 좋아지고, 유학에 필요한 봉사활동 점수도 따고요.”

“이 자식이... 처음에 잘 나가다가 속물근성을 드러내내.”

“속물이면 어때요? 좋은 일을 한다는 게 중요하지.”


재능기부.

남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전문적인 재능으로 시간과 수고비라는 수익을 포기하고 남을 돕는 것이다.

기부를 목적으로 하는 자원봉사.


‘돕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모두 이익만 있지 손해가 없는 행위.’


류지호가 스튜디오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으드득.


류지호는 찌뿌듯한 몸을 풀기위해 한껏 기지개를 켰다.

문득 평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밤하늘을 길게 올려다봤다.

맑은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아름다운 수를 놓고 있다.

류지호가 옥상 난간에 걸터앉았다.

밤이 찾아오면 인간의 감성이 풍부해 진다.

류지호는 김준우와 박상우의 영정사진 촬영 경험담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지화해서 상상해봤다.


슥슥. 사각사각.


류지호가 수첩을 꺼내 뭔가를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빈종이 위로 볼펜이 미끄러지며 단어와 문장이 채워졌다.

수첩 맨 위에 적힌 타이틀.

영정사진.

또 하나의 영화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 ❉ ❉


영화작업은 예산이 가장 큰 문제다.

배우와 스태프를 꾸리는 것부터 최종적으로 영화를 상영할 극장까지.

고려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필름 시대는 단편영화라고 하더라도 선뜻 도전하기 쉽지 않다.

영화를 흔히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협업하는 것이 영화작업이다.

드라마를 표현해줄 배우, 배우들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배우들의 섬세한 내면까지 영상화해 줄 촬영기사와 조명감독, 영화적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미술과 톤 앤 매너를 잡아줄 프로덕션 디자이너, 현장의 생생한 배우의 호흡과 대사를 담아줄 동시녹음, 이 모든 전문가들을 조율하고 드라마를 완성해야할 감독.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필름을 현상소, 영상을 일관되고 규칙적일 수 있도록 이어붙이고 잘라 줄 편집기사, 화면의 색깔과 느낌을 보정해줄 색보정 전문가, 간단한 자막부터 다양한 화면효과를 넣는 옵티컬, 영상의 분위기와 드라마를 살려줄 영화음악가, 모든 청각요소를 책임질 음향 전문가.

이 밖에도 분장과 헤어 아티스트, 액션을 디자인하고 연기하는 스턴트맨, 세트를 구현하는 세트 미술, 간단한 스모그 효과부터 폭파장면까지 구현해줄 특수효과 등등.

수십 명 많게는 백여 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참여하는 것이 영화작업이다.

영화를 완성했으면 그것이 끝이 아니다.

제작자와 극장을 중간에서 연결해줘야 할 배급이 필요 하다.

영화를 관람할 관객에게 영화를 홍보해야 하고, 포스터 인쇄 업체부터 언론사 같은 각 매체까지 연관된다.

어느 것 하나 빠질 수가 없다.

그리고 빠져서도 안 된다.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소홀히 할 수 없다.


‘영화감독을 하려면 조금의 무식함이 있어야 해. 모든 것을 알고 나면 겁이 나서 못하기 때문이지.’


부담스러운 예산과 복잡하고 지난한 작업공정에 질려버리더라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영화를 찍는 목적에 겁을 집어 먹으면 시도조차 못한다.

바로 영화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다는 것.

그것은 매우 흥분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류지호는 이전의 삶에서 다양한 영화작업을 경험했다.

작업공정에 대해 질릴 이유도 겁을 먹을 이유도 없다.

겁나는 건 단 하나.


‘내 영화가 사람들에게 보여 지고 평가 받는다는 거지.‘


흔히들 말한다.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고.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다.

영화현장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감각이 떨어진다.

시나리오를 잘 쓰고, 자신의 철학이 확고한 것과 현장실무는 다르다.

일단 영화작업을 시작하면 모든 것들이 소통과 실무다.

류지호는 영화현장에서 멀어진 것이 십년에 가까웠다.


“닥치고 일단 찍자. 단편영화!”


류지호는 감각도 되살릴 겸 해서 새롭게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영화로 풀어보기로 했다.

바쁘고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영화 찍는 걸 미루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화를 찍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간 여러 아이디어를 메모 했다.

2줄짜리 로그라인도 있었고, 완성된 시나리오도 꽤 쌓였다.

그 가운데 20분 내외 분량의 단편영화 세 편을 추렸다.



택시운전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평범한 40대 가장이 있다.

개인택시면허 취득자격인 무사고 3년을 단 하루 앞두고, 그만 교통사고를 내고 만다.

그것도 인사사고다.

교통사고를 은폐하고, 차에 치인 남자를 처리하기 위해 온 가족이 똘똘 뭉친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사람이 나타나고, 그를 또 죽인다.

연쇄살인으로까지 사건이 커지게 된다.

사람이 실종되자 경찰이 찾아오고, 사건은 점입가경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사고 난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며 반전이 일어난다.


가벼운 가족코미디, 소동극이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한다.

잔혹극이면서 블랙코미디 시나리오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달동네들이 강제철거 되었다.

그 가운데 한 달동네에 난데없이 좀비가 출몰 한다.

공무원이 용역깡패들을 대동하고 달동네 주민대표와 협상을 하러갔다가 좀비로 변해 아수라장이 된다.

미군 PX에서 몰래 빼돌렸다는 건강음료를 얻어 마신 공무원이 최초 좀비 감염자다.

이 사건을 정부는 달동네 주민들의 폭동으로 규정해 군대를 투입한다.

하지만 좀비가 된 것은 공무원 무리와 용역깡패들이었고, 진압에 나섰던 경찰들도 감염된다.

동네주민들은 똘똘 뭉쳐 좀비에 대항하며 끝까지 무사했고, 군대는 진압작전을 망설인다.

달동네 주민이 좀비여야 했다.

그들이 폭동의 주범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군대가 주민들을 살해할 명분이 생기니까.


B급 영화 향기 물씬 풍기는 좀비 소동극이다.

작업은 재미있을 것 같았다.

다만 예산과 특수분장, 이 당시의 B급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 등등.

고민스러운 점이 많은 시나리오다.



대를 이어 동네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가족이 있다.

칠순의 노인은 아침부터 양복을 꺼내 입고, 넥타이를 고르는 등 분주하다.

평생 일터였고 현재는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사진관에서 노인이 영정사진을 찍는다.

아들도 며느리도 노인이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고 있다.

오로지 손자만이 모를 뿐이다.

영정사진을 시작으로 삶을 정리하는 노인과 그를 떠나보내는 가족 구성원들.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가족 누구도 내색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변을 정리한 노인은 영원한 수면에 빠지고, 손자는 슬퍼한다.

떠난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소년은 씩씩하게 자신의 시간 위를 걸어간다.


류지호가 가장 최근에 쓴 단편영화 시나리오다.

잔잔한 휴먼드라마다.

삶과 죽음.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인생과 삶에 대한 무겁고 진지한 주제의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는 가족들의 이별을 따뜻하고 담담하게 담아낸 시나리오다.


류지호는 세 편의 시나리오를 놓고 고민했다.

각기 작업에 있어서 장단점이 있다.

시나리오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단편은 장편영화와 호흡이 달라 쉽게 나쁘다 좋다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민되면 모니터링을 해보면 된다.

류지호는 먼저 친구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유치하게 좀비가 뭐야?”


황재정은 좀비가 등장하는 시나리오에 대해 싸구려 B급 영화 취급을 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친구도 존재했다.


“이거 재밌어.”

“뭐가 재밌는데?”


류지호가 궁금한 얼굴로 고우찬의 감상에 귀를 기울였다.


“달동네 사는 불쌍한 사람들은 힘을 합쳐 서로 도우면서 좀비가 안 되고, 힘 있고 잘난 놈들은 병신 같이 좀비에 물려서 바보 같잖아. 제대로 엿 먹이는데? 이거 찍으면 웃길 거 같아.”

“달동네 사람들이 불쌍해?”

“불쌍한데 또 웃겨. 통장인가 반장인가 하는 사람도 착한 사람으로 만들면 안 돼? 그 사람도 달동네 주민인데 이웃들 배신하는 건 아닌 거 같아.”


고우찬이 언급한 극중 통장은 군대의 편에 서는 것으로 주민들을 배신한다.

어린 아이를 좀비에게 던져주려는 못 된 마음을 품게 되고, 좀비에게 물린 아이를 주민들에게 보냄으로 해서 달동네 주민 모두를 좀비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는 인물이다.

그래야 군인들이 좀비 퇴치와 함께 달동네 주민들까지 청소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근데 이거 찍으면 잡혀가는 거 아니냐?”

“왜?”

“광주에서 군인들이 사람 막 쏴 죽인 거 돌려 까는 거 아냐? 여기 대머리 혹시 저번 대통령?”


하하하.


놀란 눈으로 고우찬을 바라보는 친구들을 보며 류지호가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답.”


황재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미친놈아!”


김준우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지호야, 이 시나리오는 아닌 거 같아. 네가 민주투사도 아니잖아. 그냥 처음에 보여 준 택시운전사가 교통사고 내고 우당탕탕 하는 코미디 영화 찍어. 난 그게 제일 재밌는 거 같다.”


황재정은 다른 영화를 밀었다.


“아냐. 영정사진 그걸로 해. 거기 대사 조금 현학적인 몇 마디 넣으면 꽤 그럴듯할 거 같아.”


고우찬은 좀비영화를 강력하게 밀었다.


“난 반대. 영정사진 찍는 영화는 고등학생이 어른 흉내 내는 거 같잖아. 깡패하고 경찰 엿 먹이는 거 얼마나 통쾌 하냐?”

“난 좀비 나오는 것만 아니면 둘 중 아무거나 찬성.”

“왜 겁을 먹고 그래. 그 대머리 군인만 빼면 되잖아.”

“알았어. 그만.”


류지호가 친구들이 서로 주장을 내놓으며 과열되자 이를 제지했다.

진심이 담긴 비평은 작가의 자산이지만, 듣기 매우 힘들다.

불친절한 평가는 그저 방해가 될 뿐이다.

류지호는 박상우와 심은주에게도 물었다.


“형님은 어떤 게 마음에 들어요?”

“난 영정사진. 왠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은주 누나는?”

“나도 영정사진 찍는 할아버지 이야기.”


대체적으로 각자 성격과 취향에 따라 의견이 갈렸다.

뭔가 압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끌리는 소재나 내용이 아닌 걸까?

류지호는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 시켜보았다.

자신이 관객이라면?

혹은 자신이 영화제 심사위원이라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장르는?


‘현실적인 걸 따지면 좀비물은 일단 제쳐 둬야 해. 제작비를 줄여서 짜치게 찍어봐야 지금의 관객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저급하다고 할지도 몰라. 음... 개인택시 이야기는 코미디인데.......“


류지호가 가장 자신 없었던 장르가 코미디다.

아무리 좋은 코미디 시나리오라도 감독이 그 쪽 방면의 재능이 없으면 쉽게 연출하지 못하는 장르다.


“에이. 그냥 세 편 다 찍을까?”


황재정이 무리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잘못하면 생돈 길거리에 뿌리는 꼴이 돼 버릴 텐데도?”


고우찬이 천하태평하게 말했다.


“다 찍어 그냥. 하나 말아먹으면 또 찍어. 너는 돈 걱정 없잖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심혈을 기울여 한편의 영화를 완성시켜도 관객들에게 외면받기 십상이다.

영화 찍는 것은 연습이란 게 없다.

필름 시대에는 특히나.

류지호는 고민을 접었다.

찍어보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배우고, 모자란 것이 있으면 채우면 된다.


“두 편은 비디오로 찍어서 아네모네에서 틀어도 되고, 신포고 방송제 때 특별 상영을 해도 되고.”

“WaW의 첫 영화가 되는 건가?”


듣고 보니 그랬다.

굳이 개인작업을 할 것이 아니라 영화사 차원에서 작업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이야. 나중에 한 편 더 찍어서 옴니버스로 묶어도 되겠다. 그렇게 비디오로 출시해도 되고.”


황재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옴니버스 비디오? 이야기가 다 제각각인데? 주제나 소재가 다 다르잖아.”

“묶을 수 있어. 1988, 인천 이런 식으로 장소나 시간을 타이틀로 달면 돼.”

“망하는 거 아냐? 누가 봐?”

“당장 출시하겠다는 게 아냐. 콘텐츠는 어떤 식으로든 쓸 데가 있어.”


짝!


류지호의 양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쳤다.

그런 류지호를 친구들이 쳐다봤다.


“졸려서 그래. 잠 깨려고.”

“실없는 놈.”


설레고, 긴장되고, 불안하고...

류지호는 영화를 다시 찍을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삼류감독이었는데, 죽다 살아났다고 천재감독이 되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영화 찍는 걸 포기해야 할까.

천만에.

자신의 꿈을 직업으로서 평생을 영위하려면 필요한 건 단 두 가지뿐.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지구력이다.

황재정처럼 삐딱한 친구는 대번에 반박할 것이다.

한 번 망한 놈이 다시 시도 한다고 성공하겠냐고.

그에 대한 류지호의 대답은 별 것 없다.

실패한 인생에서 했던 대로 안하면 된다.

혹은 그 반대로 하면 된다.

게으름 대신 부지런함을.

똥고집 대신 소통을.

부족한 교양 대신 독서와 사색 그리고 다양한 경험을.

외골수 대신 풍부한 인맥을.

그 외에 무수히 많은 실패를 유발했던 것들을 지워버리면 된다.


‘이전 삶의 나 자신을 이기는 일.’


어떤 한계를 뛰어넘는다던가, 깨달음을 얻는다던가, 무협지에서 말하는 경지를 허물어버리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다.

고루한 생각의 틀을 깨트리고 성숙해지는 것이면 충분하다.

류지호에게 남과 비교하며 자학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 시간에 반 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뻔뻔함.

경쟁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난 할 수 있다!’


류지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전의를 불태웠다.

그때.


“망할 류 대표 어디 있습니까?!”


래리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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