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의 주인이 바뀌는 날 (3)
"후우....."
카시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에 홀린듯 로빈의 휘하로 들어갔지만, 이게 잘한 일인지 아직 확신이 없었고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군도의 미래를 바꾸려는 로빈의 결정을 따라야 했다.
"두목님 모두 모였습니다"
카시드는 자신을 부르는 부하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빈이 박살 내 버린 거실을 지나 연회장으로 향한 카시드는 이미 도착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군도의 주요 인물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바스케츠 사건 이후, 카시드 계열이든 아니든 모든 우두머리급 해적들은 카시드에게 더 없이 공손해 졌다.
카시드의 압도적인 무력은 그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긴 했다.
"앉아라"
카시드의 명령이 떨어지자 해적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가진 권력에 비해 소탈했던 카시드는 우두머리들을 호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권력에 심취했거나 떠받들여지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면 수시로 호출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항상 서열의 차이를 강조했을 것인데 카시드는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랬기에 오랜만의 호출 인데다가 카시드의 표정이 더 없이 심각하자 해적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싶어 다들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부로 해적 군도는 사라진다. 그리고 이 곳은 아드리아 왕국령 나사우 군도로 바뀐다"
"........!!"
갑작스러운 카시드의 말에 해적들은 뭐라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군도에 거주하는 모든 인원들은 아드리아 왕국으로 일단 소환된다. 추후 절차를 거쳐 군도에 건설될 항구 도시에 필요한 일부의 인력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하..... 농담이 과하십니다. 두목님"
"그렇습니다. 저희가 자주 인사 드리지 않아서 화가 나신 거라면 매주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무서운 농담은 하지 마시지요"
"인사는 지금까지도 상관 없었고, 앞으로는 더 그렇겠지. 농담 하는 거 아니다."
"아니... 갑자기 아드리아 왕국이라니... 설명이라도 해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바스케츠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2인자로 떠오른 빌리가 용기를 내 물었다.
"아드리아의 국왕 전하와 대결을 했고, 패배했다. 전하는 패배의 조건으로 군도를 넘길 것을 요구했고 나는 그에 따르는 것이다. 물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카시드는 아드리아에 군도가 넘어가는 이유를 설명한 뒤,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말하며 강조했다.
"아드리아에 투항하고 싶지 않은 자들은 각.자.의. 책.임. 하에 행동해라. 내가 너희들을 개별적으로 응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책임이라는 부분에서 해적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두목님의 저택에서 소란이 일어났던 것이 아드리아의 국왕과 전투 때문이었습니까?"
"그렇다"
"정말 두목님이 패배하셨단 말입니까? 두목님은 마스터이시지 않습니까"
평정심이 무너진 빌리는 카시드에게 따지듯 물었다.
해적들에게 카시드는 자부심 같은 존재였다. 다른 왕국에서 함부로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게 하는 든든한 방패막이기도 했다.
거기다 여러 해적단을 강압적으로 통치 하지도 않았고, 각자의 자율을 보장해 줬으며 서열을 뒤집으려 하지만 않는다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두목들을 핍박 하는 일도 없었다.
카시드의 직속 부하들과 다른 해적단 모두 같은 비율의 상납금을 바쳤고, 다른 해적단과 갈등이 생겨도 카시드는 원칙에 의해 판단하고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줬다.
다시 말해, 군도 주민들에게 없어서 안될 존재이면서 고만고만한 해적단 두목들에게는 최고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그래봐야 우물안 개구리일뿐.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나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비등하게 싸우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어떻게....."
빌리는 카시드가 패배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카시드가 오슬릿의 마스터 호이킨을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는 것은 모든 군도인들이 다 알고 있었다.
로빈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하더라도 마스터를 잡는 마스터인 카시드가 이렇게 쉽게 패배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로 패배했다고 하니.... 더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빌리의 상식에서는 치열한 전투를 거치면 훈장처럼 생기는 여러 흉터나 부상이 생겨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것 하나 없이 말끔한 카시드의 상태 때문에 그의 말이 더 거짓처럼 들렸다.
"해적이 지겨워 지셨습니까? 아드리아에서 한자리 제대로 준다고 합니까?"
빌리가 내뱉는 말의 수위가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카시드가 군도 태생이 아니라 쿠샨에서 굴러 들어온 돌이라는 것은 빌리를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원래 육지에서 살았던 사람이기에 군도의 삶에 지루함을 느끼고 아드리아 왕국에서 안정적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에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여자에도 관심 없으며, 오로지 수련에만 매달리는 카시드의 성격은 해적 군도와 어울리지 않았다.
큰 덩치와 구리빛 피부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그의 외모만이 해적과 잘 어울렸다.
'적절한 시기에 아드리아 국왕의 제의가 들어 왔겠지....'
빌리는 자신만의 가설을 거의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카시드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해적질에 관심 없다. 애초에 나는 내 몸을 숨길 곳으로 군도를 선택한 것 뿐이다. 아드리아에서 한자리를 줄지는 잘 모르겠군. 전하께서 그런 말씀은 없으셨으니"
"어떻게 이리 무책임 하십니까? 두목님만 바라보는 군도의 주민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다 자신의 업보지. 자업자득 아니겠나?"
"하! 우리는 업보에 책임을 지라 하고, 본인은 홀로 빠지시겠다?"
흥분한 빌리가 선을 넘었다.
그의 건방진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카시드는 얼굴이 붉게 변한 빌리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자업자득이라 했지 않냐?"
".......!!!"
빌리가 카시드를 향해 소리친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로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빌리는 로빈의 얼굴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아드리아의 로빈 국왕임을 알아차렸다.
"항상 본보기는 필요한 법이지"
"으읍!!"
로빈은 염력 마법으로 빌리를 끌어당겼다.
로빈의 코 앞까지 순식간에 날아온 빌리는 사일런스 마법까지 걸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꺼내 드는 것 같은데"
로빈은 오늘을 위해 챙긴 천벌을 꺼내 들었다.
천천히 날아 오른 천벌은 부들거리고 있는 빌리의 미간에 정확히 박혔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것이 이런것일까?
사일런스 마법으로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고통에 찬 빌리가 내지르는 비명이 모두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로빈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빌리를 연회장 한가운데에 띄워 두었다.
"이 친구의 모습이 좋아 보이는 놈은 나와라"
로빈의 한마디에 좌중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없나?"
재차 물었음에도 그 누구의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로빈에 대한 소문은 군도에도 파다했고 그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모두 아드리아로 송환 될 것이다. 그곳에서 부지런히 일하며 법을 지키는 평범한 국민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카시드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절망이 해적들에게 찾아왔다.
다들 곧 죽을 사람처럼 표정이 굳었고 마음 같아서는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보이는 빌리의 처참한 모습에 아무도 용기를 내지 못했다.
"너넨 사람이 되어야 해. 지금은 짐승 같은 존재들이란 말이지. 내가 살던 지역에서 말이야 짐승 놈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마늘과 쑥만 먹은 전설이 있는데 잘 참고 인내한 놈은 사람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놈은 짐승으로 남았지"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로빈의 말에 머리가 나쁜 몇 명은 '뭔 개소리야?'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은 로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한번에 알아들었다.
"낄낄.....쑥과 마늘을 먹으며 스스로가 사람으로 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로빈의 소름 끼치는 웃음과 함께 마지막 말이 해적들의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
* * *
-깡!깡!
아드리아 동부 구아노 채취장
수많은 인력들이 절벽에 붙어 구아노를 채취하고 있었다.
"씨발! 진짜 못해 먹겠네!"
그들 중 한 명인 탈타도스는 곡갱이질을 하다가 욕을 내뱉었다.
그는 해적 군도 출신이었고 카시드 휘하의 갑판장 중 한명이었다.
백병전에 능했기에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었고, 여자를 좋아해 마을을 공격한 뒤, 아녀자를 강간하는 것을 제일 즐겼던 자였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군도에서 어깨 굽힐 일 몇 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지만 갑작스런 카시드의 발표와 함께 로빈이 나타나 모든 군도 주민들을 하늘로 띄워 아드리아로 데려왔다.
군도의 주민들은 분류 작업을 통해 아드리아 각지로 흩어졌고, 탈타도스와 같은 중범죄 약탈조 해적 간부들은 대부분 구아노 채취장에 배정되었다.
어제는 영문도 모르고 구아노를 채취 했지만, 오늘 또 이 짓을 하려니 성질이 뻗쳐 올랐다.
그가 욕을 하며 곡갱이 질을 멈추자 먼 거리에서 감시하던 리자드맨 사우르스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발! 그냥 죽는 게 낫다. 어차피 살만큼 살았어'
한번 왔다 가는 인생 후회는 없었다.
이제껏 강간 했던 아녀자만 해도 수백명에 달하는 탈타도스는 즐길 만큼 즐긴 인생이라 생각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허술하게 만들어진 채취장의 안전 장치는 갑판을 넘나들며 단련된 그의 점프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쉬이이이!
그 때, 느릿느릿 움직이던 사우르스가 번개 같이 빨라지며 바닥을 향해 자유 낙하 하고 있는 탈타도스에게 날아갔다.
사우르스의 튼튼한 허벅지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몇 번의 도약 만으로 순식간에 탈타도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으응?'
딱딱한 해안 바위가 아닌 뭔가 물컹한 촉감이 머리에서 느껴지자 탈타도스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노란색으로 요사스럽게 빛나는 사우르스의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거리에서 달려와 날 잡았다고?'
탈타도스도 나름 계산을 했었다.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이 리자드맨 사우르스가 떨어져 자살하는 것을 막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고, 충분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산과는 다르게 사우르스의 거대한 손이 자신의 머리와 왼쪽 다리 허벅지를 꽉 붙잡고 그의 생명이 끊어 지는 것을 막아냈다.
-크르르르르
사우르스가 낮게 그르렁 거리며 탈타도스를 바닥에 내려다 놓았다.
그리고 허리춤에 가지고 있던 채찍을 꺼내 들어 빠르게 반원을 그리듯 휘둘러 그의 몸에 작렬 시켰다.
-챠아아악
"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날아온 채찍을 얻어 맞은 탈타도스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평생 채찍질을 하기만 했지 당해 본 적은 처음이었던 탈타도스는 아프기도 했지만,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이 뱀새끼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탈타도스는 사우르스에게 덤벼들었다.
육탄전이라면 자신 있었기에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뒤 일어서며 상대의 중심을 무너트리기 위해 중하단으로 킥을 날렸다.
-크르?
있는 힘껏 킥을 날려 사우르스의 허벅지에 자신의 정강이가 닿긴 했지만 마치 벽을 발로 차는 느낌이 들었고, 정강이에 고통이 밀려 들었다.
사우르스는 '너 뭐하냐?' 라는 표정을 지는 것과 동시에 킥을 날린 탈다도스의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꽈드득!
사우르스의 거대한 손아귀가 힘을 발휘하며 탈다도스의 발목 뼈를 박살 내 버렸다.
한 때 갑판 위에서 날뛰던 탈다도스였지만, 아예 체급이 다른 사우르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연이어 몇 번의 저항을 더 했지만 고통에 찬 탈다도스의 비명만 늘어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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