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해 재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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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not
작품등록일 :
2024.07.1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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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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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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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10)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DUMMY

“삐룩, 삑, 삑!”


얼굴과 배가 주황색을 띠는 작은 울새가 나무 위에 울음을 터트리곤 날아간다.


숲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 평범한 말로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대륙 중부에서 온 말들은 이런 험한 지형에 익숙해,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며 천천히 걸어 나갈 수 있었다.


헬레나는 온화한 바람과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밝은색 꽃들, 그리고 노랗게 물든 숲의 풍경을 바라보며, 울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점차 봄 같은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이, 어느 정도 서쪽에 온 모양이야.”

“굳이 이런 길을 통과해야겠어?”

“별수가 없어. 북쪽의 안도란 공국은 외지인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데스도 지금 상황에 크게 불만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숲에서 자란 아데스에게는 도시의 번화가보다 이런 어두운 숲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고, 헬레나도 도시보다 아버지를 도와 사냥했던 경험이 겹쳐 숲이 더 익숙했다.


“만약 아라고니아로 돌아갔는데, 국왕 폐하께서 다시 원정을 떠나는 걸 수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데스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잠깐 말없이 생각을 거치다 답했다.


“마물이 더 찾아오지만 않으면 레버넌트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럼 넌 어쩔 건데?

“···부모님이 기다리셔. 일단 작위부터 요구하고, 빌보의 작은 땅을 가질 거야. 그러고는 평화로운 삶을 기대해 볼 수 있겠지.”


그녀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 약간 웃으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같은 사람은 평범한 삶을 살기 힘들겠지만.”


다만 기사단의 책임과 아직 미루어 둔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미래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을 택한 것이 후회된단 거야?”

“그다지. 해야 할 수밖에 없던 일이라 생각해.”


다그닥-


철컹!


그녀는 그리 말하곤 말발굽이 돌을 밟는 순간,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만약 내가 더는 원정을 떠날 수 없게 된다면, 이 검은 돌려줄게.”


그 말에 아데스는 그녀의 검을 힐끗 바라보곤 답했다.


“단순한 선물이야. 가지고 있어.”

“그럼 땡큐지, 뭐.”


***


“에퀴테스(Equetes), 환영합니다.”

“과분한 호칭이야.”


고대 제국의 말을 타고, 선봉대를 자처하던 에퀴테스(Equetes)라는 호칭은, 아라고니아에서 용맹한 자, 본받을 자라는 뜻이었다.


겸손을 중시하던 헬레나는 과분하다며 반응했고, 뜻을 모르던 아데스는 그저 묵묵히 넘겼다.


“뭔가 많이 달라진 느낌인데.”

“폐하께서 실시한 군제개혁으로 판금 갑옷을 갬비슨(두꺼운 천 의복)과 사슬갑옷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런 철제모는 덤이고요.”


헬레나는 국경수비대의 달라진 외형에 많이 놀랄 따름이었다.


챙이 있는 철제 모자, 비싼 가격과 부족해지는 철광석으로 인해 효용성이 떨어지던 판금 갑옷을 버리고, 병사들은 대체로 검이 아닌 신식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국왕 폐하께서 바뀌신 이래로 많은 것이 우리 아라고니아의 군대는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헬레나였지만, 뭔가 이상한 것을 들었던 느낌이 들어 다시 물었다.


“···잠깐 뭐가 바뀌어?”

“아라고니아의 군대요?”

“아니, 그 전에.”

“아, 국왕 폐하요? 아, 모르셨습니까?”


병사는 그녀의 끄덕임에 달라진 휘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아, 작년에 페란도 2세 폐하께서 붕어하셨습니다. 그분의 장남이셨던 페이로넬라 왕자님은 재작년에 병사, 그리하여 차남이신 페란도 3세께서 즉위하셨습니다.”


그 말에 헬레나와 아데스는 서로를 한 번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현 국왕은 장남도 아니었기에 국왕의 공무를 따라올 일이 없었고, 검은 새 기사단과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원정을 떠난 기사단과 접점이 없는 국왕은 관심도 없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조금만 덧붙여 생각해서 현 국왕이 군제 개혁이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은, 기사에 기존의 권력을 타파하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


즉, 현 국왕이 검은 새 기사단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품을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었다.


“···폐하께서 우리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명하셨다거나, 그런 적은 없었던 것이지?”

“예, 별 지시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공적과 보고를 위해 수도에 먼저 방문할 것을 이르라 명하셨을 뿐입니다.”


헬레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우리가 정치와 관련 있는 기사들은 아니잖아. 대륙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현 국왕이 우리에 대해 모를 리는 없어.”


아데스의 말에 그나마 안심은 되었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알겠네. 알려주어 고맙네.”


그녀는 그리 인사하곤, 말 머리를 바로 돌렸다.


물론 아까 원정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될 때를 논하기야 했지만, 실제로 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마주하니 다급해진 것이었다.


헬레나가 빠르게 먼저 달려가니, 아데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신답니까?”

“헬레나님은 평민이잖아. 출세하려면 저거라도 해야 하는데, 현 폐하의 행보를 보면 그다지 기사에 호의적이질 않아.”

“아, 그러면 그러실 수 있겠네요.”


아데스는 병사들의 말을 엿듣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따라갈 뿐이었다.


***


“국왕 폐하께 아룁니다. 총원 312명의 기사가 이번 원정에 참여, 310명의 사망자와 2명이 복귀했습니다. 군단장 아홉 중 여덟을 제거, 하나를 봉인했습니다. 마왕 토벌에는 실패했습니다.”


헬레나는 어느 때보다 긴장한 모습으로 알현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보이며, 아라고니아의 새 국왕 페란도 3세에게 보고했다.


덥수룩한 수염과 갈색의 눈은 전임 국왕 페란도 2세를 쏙 빼닮았지만, 온순해 보이는 눈썹은 ‘자비의 왕자’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진 그의 형, 페이로넬라 왕자와 닮아 있었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으나, 기사단은 인류를 위협하는 군단장을 토벌하여 부분적으로 인류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아데스도 이에 거들 듯, 말했다.


“···.”


국왕은 어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헬레나만을 보고 있었고, 아데스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폐하, 이 성과는 유의미하니, 공적을 하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도 말이 없으니, 황후가 거들었다.


페란도 3세의 정실인 이사벨 황후의 말에 그는 조금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실어증인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덜컹!


침묵이 오랫동안 지속되던 끝에 페란도 3세는 벌떡 일어나 보였다.


“···폐, 폐하?”


황후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국왕은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이내 헬레나의 앞에 섰다.


“기사는 일어나라.”

“예? 아, 예, 폐하.”


헬레나는 황급히 일어났다.


“난 길게 말하지 않겠다. 크림힐드 단장은 어떻게 되었나? 그의 최후를 알고 있는가?”


국왕의 말에 그녀는 눈을 몇 번 껌뻑이고는 그날을 떠올리며, 가파른 숨결과 함께 나지막하게 답했다.


“···크림힐드 단장은 마왕과의 전투에서 선봉으로 나서셨습니다. 그는 용맹하게 전투를 치렀습니다.”


헬레나는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심장의 박동이 온몸에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비롯한 소외당하는 이들에게마저 따스하게 손을 건네고, 기사단 모두가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크림힐드 데 베르니에는 단장으로서 마지막 소명을 다했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모두의 공로를 치하하며, 제일 선봉으로 나서는 것으로 용기를 보였다.


그러나 마왕에게 닿기도 전에, 목이 잘리면서 가장 먼저 죽음에 다가갔지만.


“그런가···.”


국왕은 말을 잇지 못하는 헬레나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실례를 저지르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고, 얕은 한숨과 함께 다시 옥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헬레나와 아데스는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용히 기다릴 따름이었다.


“짐은 그대들의 업적에 수고를 보낸다. 헬레나 아테나이아, 그대는 빌보가 고향이라고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대에게 빌보의 땅 일부와 남작의 작위를 하사하노라.”


헬레나는 그 말에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공덕을 베푸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나이다.”


국왕은 그 후에 바로 옆에 있는 아데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데스 레버넌트, 그대에겐 아라고니아의 시민권을 하사하노라.”

“···공덕을 베풂에 감사를 표합니다.”


헬레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보상.


하지만 아데스가 아시타우스교도도 아니고, 아라고니아인도 아니며, 심지어 천시받는 사령술을 연구하는 자임을 생각한다면, 예상외로 후한 대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대들에게 매달 70의 금화를 제공하노라.”

“···폐하, 공덕에 감사합니다. 허나, 기사단의 활동은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헬레나는 오죽 답답하여 그대로 물었다.


이에 페란도 3세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유능한 기사들을 많이 읽었으니, 이를 다시 준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검은 새 기사단은 오늘부로 해산하고, 그대들은 영지로 돌아가라.”


그의 말에 헬레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데스는 외지인이었기에 이에 대해 어떠한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고, 헬레나도 감히 평민 주제에 국왕의 결정에 반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나지막이 대답했다.


“명령을 따르겠나이다···.”


검은 새 기사단은 그렇게 해체되었다.


312명의 단원중 310명의 사망자를 내고서.


작가의말

Je ne suis rien.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 파트리크 모디아노『어두운 상점들의 거리』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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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흰 장미 기사단 (1) : 모든 이들의 안녕을 위해서 싸워라 24.08.20 10 1 11쪽
20 태양의 악마 (7) : 나를 검신이라 부르라 24.08.15 11 1 12쪽
19 태양의 악마 (6) :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다. 24.08.13 9 1 10쪽
18 태양의 악마 (5) : 그런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24.08.07 8 1 11쪽
17 태양의 악마 (4) : 햇살은, 할 수 없이, 새로울 것 없는 것에 빛을 내였다 24.08.06 8 1 10쪽
16 태양의 악마 (3) :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 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 24.08.05 8 1 10쪽
15 태양의 악마 (2) :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4.08.03 9 1 11쪽
14 태양의 악마 (1) : 태우는 것은 즐거웠다 24.08.01 8 1 11쪽
13 아리바 공 (2) : 지난밤 다시 마계로 가는 꿈을 꾸었다 24.07.31 8 1 10쪽
12 아리바 공 (1) : 왕관을 쓴 머리는 언제 건 편안히 잠드는 법이 없어라 24.07.31 10 1 12쪽
» 귀환 (10)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24.07.28 10 1 10쪽
10 귀환 (9) :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24.07.26 8 1 10쪽
9 귀환 (8) :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24.07.25 9 1 11쪽
8 귀환 (7) :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 24.07.24 13 1 10쪽
7 귀환 (6) : 절규는 하늘을 가로질러 온다 24.07.23 12 1 11쪽
6 귀환 (5) :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24.07.23 17 2 12쪽
5 귀환 (4) :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4.07.22 20 2 12쪽
4 귀환 (3) : 이봐, 지옥으로 가는 거야! 24.07.22 18 2 11쪽
3 귀환 (2) : 숲 속 어느 마을에 사령술사들이 살고 있었다 24.07.22 25 2 13쪽
2 귀환 (1) : 국경의 긴 눈 밭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24.07.21 33 2 11쪽
1 나는 죽었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24.07.19 63 3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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