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최근연재일 :
2024.08.22 20:35
연재수 :
81 회
조회수 :
716
추천수 :
26
글자수 :
426,357

작성
24.08.07 14:56
조회
7
추천
0
글자
12쪽

에레디오스의 악마 (2)

DUMMY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침대 밑층에는 달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눈물자국에 빛이 번지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마침내 형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제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별안간 방문이 열리더니 수어명의 사내들이 달려들어와 두 형제를 넓은 이불속에 가두어놓고 흠씬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개새끼들아 집 가니까 좋지?"


"사랑하는 형제를 빈손으로 보낼수는 없어! 내 주먹을 받아가도록 하게!"



이러면서 가져온 모래 깃털 밀가루 같은 것들을 뿌려대더니 나중에는 거칠게 끌어안고 입술을 퍼붓는다. 눈물의 전역식이었다. 형제가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한다는 소식은 평소 친하게지내던 친구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작별인사는 과격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난장판을 정리하는 시늉도 없이 한꺼번에 들어왔던 것처럼 우르르 방을 나가버렸다. 그런 뒤 곧바로 다음 방의 아이들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형제는 그날 그렇게 자그마치 22명이나 되는 친우들의 주먹을 받아내야 했다. 중간에 에레디오스가 엉덩이뼈를 맞았다고 소리치면서 이불 속을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단박에 제지당했다.



전역식은 밤이 끝난 뒤 더 깜깜한 새벽이 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형제는 난장판을 대충 정리하고 다시 침착하게 마주앉았다. 하지만 감정은 얻어맞기 전보다 훨씬 격해져있었다.



"너도 알겠지만 말이다..." 오프레드가 먼저 입을 땠다. "난 헨나프리데를 사랑하고 있어. 정말 그애를 사랑한다."


에레디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너한테 내가 얼마나 그애를 사랑하고 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예. 그렇지요, 형님. 알아요. 잘 알고 있습니다." 에레디오스는 약간의 적의까지 품은 채로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좋은 한 쌍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있을 정도로요." 에레디오스는 왜 자신도 그날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보복으로 에레디오스는 형을 향해 생애 처음으로 질긴 설교를 늘어놓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느정도... 어느정도로 두 분이 기쁜 사랑을 나누고 계시냐면요.... 형님과 헨나프리데의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깊어져도, 아무리 두분이서 격하고 끈질긴 사랑을 나누셔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는 형님이 친구들 사이에서 처신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자기들의 연인이 얼마나 화끈하고 키가 크거나, 가슴이 크거나, 엉덩이가 크거나, 집안에 돈이 많으며 어느 부위에 점이 있다는 둥의 얘기를 할 때에도, 바람을 피운 얘기라던지, 한 번에 세 여자와 함께 침대에 들었다던지, 남의 연인과 못된 장난을 벌였다는 둥의 얘기를 늘어놓을 때에도요, 물론 형님은 그 자리에서 함께 웃긴 했었지만 그래도 그 더러운 자리에서 헨나프리데의 이름을 꺼내는 법이 없었지요. 두 분의 사랑은 결코 색욕이나 탐욕의 죄악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옆에서 항상 보아왔던 제가 아닙니까? 형님은 모르셔도 저는 알아요."



오프레드는 깜짝 놀란 눈으로 에레디오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게까진 생각 안했는데 말이라도 고맙다.


"농담이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에레디오스는 자신이 울먹거리고 있는 본심을 들키지 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빌었다. "저런 개같은 놈들의 침흘리는 욕정과는 다릅니다. 형님은요! 형님은 정말로 헨나프리데와 사랑을 나눌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형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어쨌든 니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무엇이든 말하세요! 제가 혀를 깨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형님이 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내보이겠습니다." 에레디오스는 거의 연극적인 감정의 격정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이 충동이 일어났다. 어쨌든 그들은 같은 여인을 사랑했고, 똑같은 운명의 장난으로 헤어지게 되지 않았는가? 그는 형이 불쌍했고, 형이 불쌍한 만큼 자기 자신도 불쌍했다. "우리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니까요."


오프레드는 희미한 달빛에 비친 동생의 얼굴에서 닭털이며 모래 부스러기를 때주었다. "나 대신에 헨나프리데한테 가라."


에레디오스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니가 나 대신 저 성탑을 올라가서 말을 전하고 오는 거야. 장군은 우리가 작별인사할 틈도 주지 않을 거거든. 어쩌면 이번을 끝으로 영영 못 보게 될지도 몰라. 그럴 거라면 마지막 추억이라도 아름답게 남겨야 하지 않겠니. 부탁한다, 에레디오스야. 밤이 얼마 남지 않았어. 나도 하려면 할 수 있지. 하지만 내 가녀린 팔뚝을 봐라. 넌 성을 잘 오르잖아."



마지막 말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에레디오스는 여전히 헨나프리데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형의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몇 년 전부터 겉으로는 완전히 관심을 끊은 듯이 굴고 있던 터. 하지만 가슴 속에 타오르는 정염은 막을 수는 없는 것이기도 했다. 에레디오스는 어느날 미친놈처럼 탑을 올라서 헨나프리데를 보러갔다가, 그녀와 마주치면 제정신으로 돌아와서는 다른 여자아이를 보러 왔다는 식으로 둘러대곤 해왔다.



하지만 눈앞에 두고 다른 여자 손을 잡는 게 즐거울리가 없다. 그럴바에야 다른 남자아이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 더 보기 좋고 짝도 맞는 일이다. 그런 일을 몇년 반복해오는동안 에레디오스는 사내아이들을 대신해 성탑의 여자들에게 약속과 소식을 전달해주는 전령책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지독한 악수가 되고 말았다. 여러 남녀들의 치정과 더러운 속물근성을 맛보면서 다른 여자는 모두 보기싫은 잡것이고 헨나프리데야말로 깨끗한 처녀이자 숙녀라는 아집이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오프레드도 그동안 에레디오스에게 몇 번이나 그 일을 부탁했고, 동생은 군말없이 단숨에 달려갔다. 당연히 그 상대는 헨나프리데다. 형님이 그 일을 오늘도 부탁해왔다.



한번이라도 더 헨나프리데를 만날 수 있다면 그런 부탁쯤이야, 형에게 그 여자를 보내는 것쯤이야 몇번이든 넙죽 받아들었을 게 분명하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에레디오스의 지옥불에 장작이 부어졌고, 겉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올랐다.



'나를 연적으로도 생각하지도 않는 거야! 마지막 날 밤에 이런 부탁을 할 정도로, 맘편히 나를 혼자 헨나프리데한테 보낼 정도로 순진하게 믿고 있는 거야!'



에레디오스의 눈꺼풀은 사람의 다리가 벌어지듯 위아래로 크게 떠졌고, 그 속의 축축한 눈알에 붉은 상흔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어떻게 형님이 나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외로운 사내가 아니란 말인가? 한창때의 남자가 아니란 말인가?



무엇보다, 그동안 관심없는 척을 좀 했다고 해서 헨나프리데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그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라 생각될만큼, 어린 시절의 철없는 순정쯤으로 가볍게 치부되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이 치욕은 절망스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에레디오스는 바보가 아니니까. 형의 확신은 동생 에레디오스의 처신이 아닌 연인 헨나프리데와의 관계에서 발전해온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에레디오스가 헨나프리데를 안 보고 갈 리가 없다.



'가자. 날이 밝기 전에 어서 가자.'



에레디오스는 도망치듯 빠져나오며 이렇게 되뇌었다.



'마지막으로 헨나프리데를 보는 거야. 그렇게 하자!'




그날따라 성 내에 드비치는 달빛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실연의 슬픔으로 인해, 에레디오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어떻게든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싶어졌다.



지금 에레디오스가 하는 일은 아주 고귀한 짓이다. 존경하는 형님을 위해, 형님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소식과 마지막 만남의 약속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달밤 한가운데를 홀로 달려가는 것이다.



숨 쉬는 곳마다 달뜰이 확확 들어찼다. 여름밤이 싸늘한 고장이다. 누런 입김은 녘녘으로 녹았다. 톳불치는 탑의 입구는 멍실거리고 있었다. 지금 향하는 곳이 마귀들의 소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의 응달에서 에레디오스는 가죽장갑을 낀 이방인처럼 멈춰섰다.



아이들의 나이가 늘면서 서로간의 장벽을 초월하려 하는 시도가 빈번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들어 여자들의 성을 시키는 경비가 갈수록 삼엄해졌다.



에레디오스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경비 둘에게 약간의 돈과 술과 주전부리 바구니를 주고 지금까지의 사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번 한번만 눈감아주면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말까지 전한 뒤 묵직한 벽돌을 집어가며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도가 튼 에레디오스는 어떤 길로 가야 딛을 돌이 많고 빠르게 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그건 헨나프리데가 있는 방으로 직행하는 길이었다.



평소에는 중간에 다른 사내들을 만나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지만 오늘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빠르게 탑을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면서 에레디오스는 어떤 마음으로 헨나프리데를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쩌면 형보다는 그간에 표현이 서툴렀던 나를 더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내가 형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잖아. 단지 내 의중을 확신하고 못하고 단념했을 뿐이야. 내 진심을 담은 고백을 들으면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지금까지 형님의 말이야 수없이 들었겠다만, 내 마음을 듣는 건 뜻밖일 테니까.'



놀람으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건 사랑의 순수에 위배되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에레디오스는 헨나프리데가 잠드는 창문 곁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그는 창문께로 나온 사람들에 의해 향료냄새가 나는 방으로 끌어올려졌다. 코를 찌르는 정향과 세이지, 여름에 어울리는 레몬버베나, 지독한 땀의 냄새였다.



침대곁에는 이미 많은 여인들이 촛불을 들고 한 여인을 중심으로 모여있었다.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헨나프리데였다.



그녀는 에레디오스를 보자마자 담요를 벗어던지고 친애하던 남동생에게 달려들었다.



"에레디오스, 그게 정말이냐? 내일이면 그 사람이 떠난다는 게 정말이냔 말이다."



에레디오스는 잠시 후에 대꾸했다. "나도 떠납니다."


헨나프리데는 그 말에 담긴 힐난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헨나프리데는 그 말을 듣더니 이미 울고있던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다시 침대곁에 모여있는 친구들에게 달려들어 그 속에 숨어버렸다. 그리고 짐승처럼 비명같은 울음을 내질렀다. 마치 아기새가 동료들의 수북한 털 속에 뛰어드는 모습이었다. 친구들은 누구는 울고 누구는 놀리면서 다같이 얼싸안고 위로하는 한편 에레디오스에게는 공격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에레디오스야, 나는 전부터 니가 참 둔하고 속 좁은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도 그렇다. 혼자 떨떠름하게 뭐 하는 짓이냐? 어서 그 망할 녀석의 말을 전해주던지 무슨 약속이라도 있으면 알려주던지 해서 사람을 안심시켜주어야지 벙어리처럼 그래 답답하고 섰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1 여자가 있어! 24.08.09 6 0 11쪽
50 그놈이 여기있어! 24.08.08 6 0 11쪽
49 에레디오스의 악마 (6) 24.08.08 7 0 13쪽
48 에레디오스의 악마 (5) 24.08.08 7 0 13쪽
47 에레디오스의 악마 (4) 24.08.08 8 0 12쪽
46 에레디오스의 악마 (3) 24.08.07 8 0 11쪽
» 에레디오스의 악마 (2) 24.08.07 8 0 12쪽
44 에레디오스의 악마 (1) 24.08.06 5 0 11쪽
43 한밤의 늑대소동 24.08.06 7 0 11쪽
42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2) 24.08.06 8 0 11쪽
41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1) 24.08.06 7 0 12쪽
40 돼지재판 (4) 24.08.06 6 0 11쪽
39 돼지재판(3) 24.08.05 9 0 12쪽
38 돼지재판 (2) 24.08.05 7 0 11쪽
37 돼지재판 (1) 24.08.05 8 0 11쪽
36 지금, 땅 아래에서는 (3) 24.08.05 7 0 11쪽
35 지금, 땅 아래에서는 (2) 24.08.04 8 0 11쪽
34 지금, 땅 아래에서는 (1) 24.08.04 7 0 11쪽
33 늑대한테 뼈다귀를 줘놓고 24.08.04 7 0 11쪽
32 누굴 탓합니까 24.08.03 7 0 12쪽
31 쟤가 오늘 왜 저러지? 24.08.03 8 0 12쪽
30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24.08.02 7 0 11쪽
29 콧물이 묻어서 소매로 닦아냈다 24.08.02 9 0 12쪽
28 늙은이 장례준비 (6) 24.08.02 10 0 12쪽
27 늙은이 장례준비 (5) 24.08.01 7 0 11쪽
26 늙은이 장례준비 (4) 24.08.01 4 0 12쪽
25 늙은이 장례준비 (3) +1 24.08.01 12 1 11쪽
24 늙은이 장례준비 (2) 24.08.01 8 1 12쪽
23 늙은이 장례준비 (1) 24.08.01 8 1 11쪽
22 매춘하는 개 인간 (5) 24.07.31 8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