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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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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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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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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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땅 아래에서는 (1)

DUMMY

바실리쿠스는 대답 대신에 잘 보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뼛조각을 꺼내들었다. 적당히 쥐고 잡기 좋아보이는 돼지 정강이뼈에 구멍이 몇 개 뚫려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니?"




늑대소녀가 인간의 악기를 알 리가 없다.




"피리야."


"피리?"


"피리를 모르는구나."




바실리쿠스는 벌써 솜씨좋게 뼛속에 기둥구멍을 뚫어놓았다.




"소리를 내는 물건이지. 잘 봐라."




늑대들이 들판에서 뛰어노는 걸 보면서 굵은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조금씩 깎아냈던 것이다. 허공에 대고 솜씨좋게 불자 어설프게 공기 빠지는 소리만 났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피리구나. 그런데 어디다 쓰는 물건이지?' 했다.




"그게 피리에요?"


"아직 완성이 다 안 되서 그래." 바실리쿠스는 급하게 뼈피리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완성이 다 되면 제법 그럴듯한 소리가 날 거야."




바실리쿠스는 죽은 사람이 남기고 간 건 낭비해서는 안된다며 그걸로 무엇이든 만들어서 살림살이로 써보라고 하였다. 아이가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았냐고 해서 누가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던지 보다가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돌아오면서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었던지 궁리하다가 물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잔치도 슬슬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이미 조용히 뼛마디를 잡고 골똘히 깎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생전 고인과 그리 가깝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제는 여전히 중앙에 앉아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아마 본인도 이제는 잊어버렸을) 하다가 이제는 모두가 알아듣는 소리로 위령문을 읊으면서 투박한 손으로 애들을 잡고 톳불이 타는 중앙을 몇 번씩 돌고 따뜻한 불을 쬐게 하고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서 불장난을 하라고 했다. 회색 법복에 색띠를 두르고 있었다. 몇명은 취하고 이미 돌아간 듯 하다. 고인이 생전에 성사도 못 하고 갔다며 다들 슬퍼했다.




남은 사람들끼리 대충 흐느적흐느적 절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다가 장례식이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고인이 생전 입던 옷들을 한 데 모아 군불에 태우고 땅에 묻었다. 뼈를 깎고 남은 가루는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뿌리면서 갔다. 사제는 장로들과 작별하고 이사람 저사람 붙잡아 덕담도 하고 남은 떡이나 식은 고기를 좀 싸들고 야금야금 먹으면서 본인들이 온 곳으로 돌아갔다. 제자는 뒤에서 조용히 따라갔다. 저 여자는 못 보던 여잔데 눈빛이 여간 사납지 않다고 말들이 많았다. 공터는 조용해지고 까먹은 보자기나 빵쪼가리가 있고 불 피운 냄새며 차가운 음식 냄새만 남아있을 때 늑대들이 조용히 몰려와 남은 자리를 청소해먹고 이제 진짜로 자리가 끝이 났다. 바실리쿠스는 취해서 잠에 들었고 다음날 아침에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동안 사람들의 이런 행사같은 것에 초대받지도 못하고 속상해서 애먼 주위사람만 박박 긁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쿡시 성의 성벽은 유난히 두꺼운데 대대로 그 속에 대대로 굴땅을 파고 사는 족속들이 있었다. 사람이 좀 더 헐벗고 다니던 시절에 비밀스러운 예배 사원으로 쓰였다던 이 땅굴은 누가 팠는지 언제 생겼는지 언제부터 사람이 살게 되었는지 자세한 걸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흐물텅거리는 옛 전승이나 이빨빠진 혓속으로 우물대는 노인들이 시궁창 쥐들과 함께 골목길 구석을 돌아다닐 뿐이다. 그런 노인들도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들에게 똑같이 우물거리는 볼입으로 어렴풋이 들어온 내용을 태초부터 그래왔듯이 대대로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 세기에 걸쳐 땅속의 사람들은 신전의 벽을 허물어 땅굴을 서서히 확장해나갔고, 곳곳에 자기들의 건물과 집들을 짓고 한 때는 왕처럼 살았다. 누군가 입구를 막고 안의 사람들이 전부 익사할 때까지 큰 물을 들이붓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물을 쏟아부은 사람들이 입구를 큰 돌로 막고 잊어버렸기에 옛날에 자주 쓰이던 그 통로는 지금도 발견되지 않고 그 위에 흙이 덮혀서 밭이 되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다 짐승들이 찾아와 살기 시작했고, 이곳에 에릴돈나 (22화에서 깁요슨을 죽인 테시데리우스와 함께 테레사를 납치하고 성벽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던 그 사람) 가 있었다. 에릴돈나는 최근들어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고, 나갈 때도 오래 있지 않고 금방 돌아왔다. 최근에는 그녀가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고 밖에서 미움을 받아 그저 사람들이 없는 어둠을 찾아온 이들마저도 꺼림칙해 마지 않는다는, 저 오래된 땅속의 구석까지 갔다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이 좁디좁은 땅속 마을에 돌고 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지만 땅속 마을은 근처의 어둠을 경계로 삼은 땅이기에, 지난 수백년간 아무도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으로도 에릴돈나는 눈총을 받는다. 거기다 오늘은 밖에 큰 장례식이 있었는데 다들 노래를 부르고 잔치를 했다고 한다. 초대 받지 못한 건 서러웠다. 팍팍 욕지기를 하면서 횃불을 들고 오래된 사원을 겁에 질린 채 희떠보던 에릴돈나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팍 무릎을 꿇고 울면서 왜 자기 신세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치를 떨었다. 잠시 후 눈물을 닦고 뻥 뚫린 석상 아치 입구로 다가가 그 속에 횃불을 들이댔다. 안쪽이 조금 환해지더니 겁에 질려 헉 하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축축한 통로를 따라 쥐처럼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에릴돈나는 무언가가 쩔컥,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고 생각해서 안쪽으로 노엽게 뛰어가 주춤거리는 테레사 (22화에서 납치당한 가레랑의 딸. 지금 위쪽에서는 며칠간의 수색에도 진전이 없어 점점 가망이 없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불에 태우고 땅에 묻은 옷조각이 발견되자 다들 누군가가 아이를 살해하고 옷을 태우다가 그냥 땅에 묻은 것이라며 입을 모았다.) 를 벽으로 몰았다.




"이거 뭐야. 왜 차꼬가 이렇게까지 헐렁해진 것이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소녀의 머리에 얼굴을 들이댔다. "혹여나 밖으로 나가려다 걸리기만 해 봐라. 애초에 차꼬를 찰 필요도 없이 팔다리를 분질러 줄 테니까."




테레사는 바닥을 쳐다보면서 그러지 않겠다는 말만 했다. 에릴돈나는 소근거리면서 신경질을 냈다. 그녀는 이렇게 나올 때도 예쁘고 기분좋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화장도 하고 털관리도 하고 향주머니도 차고있었다. 의심을 놓지 않고 몇 분이나 차꼬다리를 이리로저리로 뜯어본 뒤에 놔주었다. 바닥에 죽그릇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다가 분해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지금 내가 이 꼴이 된 건 너 때문이라고 니가 지금 해놓은 짓을 보라고 울면서 막 소리를 질러댔다. 주먹을 때리고 머리채를 잡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바닥에 주저앉고 쪼그려 앉고 가져온 물통도 던져서 깨트려버리고 제 혼자 울면서 집에 갔다. 혼자 남은 테레사는 어둠 속에서 하늘에 대고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이것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이 때, 이 음습한 석굴방의 어딘가에서 작디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여자는 갔소이다. 울음소리를 내도록 하시오."




다리에 묶인 차꼬가 앞으로 텅 튀어올랐다. 소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는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보이지 않기에 더 예민해진 후각이 썩은 곰팡이와 식은 죽, 깨진 접시와 어지러운 향주머니 사이로 새롭게 끼어든, 낮선 짐승의 냄새를 어렴풋이 잡아냈다. 그녀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목소리가 감탄했다.




"감각이 예민하군. 지금 그대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나의 방향을 간파하였소. 경험 많은 어쌔신도 버거워하는 일이지."




"누구세요?" 테레사가 멘 목으로 겨우 소리를 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거기 누구 계세요?"


"안심하시오, 가여운 소녀여, 우리는 그대를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니오. 그대를 도와주러 온 것이오."




한참동안 소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은 한 명이 아니었다. 테레사는 덜컥 겁이 났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온몸을 쭈그리고 차가운 돌바닥과 축축한 이끼가 핀 서늘구석에 짱박혀 기다렸다. 누군가가 의심스러운 눈을 치뜨는가 하면 또 누군가가 이를 질책하면서 꽤나 오랫동안 논의를 하는 듯했다. 흥미가 돋은 테레사는 청각을 집중했지만 목소리를 죽이면서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기술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목소리의 주인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느므딘의 어쌔신들은 그대가 이곳에 떨어진 첫날부터 어둠 속에 숨은 채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소.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 합의점을 찾을 수도 있을 듯 하군. 우리가 당신을 도와주겠소.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말이오."


"이 세상에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강하고 위대하신 분은 또 없으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는 선생께선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 전에 소녀는 물음에 대답해야 하오. 이 세상에 수지맞는 장사는 없소. 우리가 그대를 돕는다면 그대 역시 우리를 도와야 하오. 미리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를 이 어둠 속에 방치한 채로 그저 떠나버릴 수 있소이다. 그러니 그대가 도움의 대가로 해내야 할 일은 우리가 정하도록 하겠소. 이에 동의하시오?"


"그럼요, 무슨 일이든!" 테레사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당하고 또 당하겠다 한들 지금의 이 지경보다는 백 배 천 배 났지 않겠는가! "제발 저를 이곳에 버리고 가지만 말아주세요, 정직한 선생님들!"




목소리의 주인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우리가 여럿이라는 것은 언제 알았소?"




테레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몇 명인지 맞춰볼 수 있겠소?"


"다서... 아니 열 명? 열 한 명? 열 둘...."




숫자는 점점 커지다가 열 넷에서 멈췄다. 목소리는 그게 확실하냐고 다시 물었다. 그녀가 확실하다고 대답하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니 알겠소. 설명은 천천히 하기로 하고, 일단 이곳에서 벗어납시다. 그 미친 여자는 다시 이곳에 왔을 때 그대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오."




바닥에서 칙칙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철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손톱 두 개가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비릿한 연기 냄새가 나더니, 주위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이제부터 나를 마스터 우굴이라 부르도록 하시오. 이것만이 그대에게 주어질 가장 무거운 규율이오. 나머지 규율 역시 천천히 알려드리겠소."




한 손에 횃불을 들고 어둠속에서 기어나온 남자가 드디어 엄숙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두 발로 일어선 쥐의 모습이었다.




"이제부터 너는 느므딘 어쌔신의 수련자이니 그에 걸맞은 행동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마스터의 뒤로 수많은 쥐들의 석상처럼 차가운 윤곽이 한 박자 늦게 번뜩였다. 그들은 석상처럼 도열해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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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그놈이 여기있어! 24.08.08 6 0 11쪽
49 에레디오스의 악마 (6) 24.08.08 7 0 13쪽
48 에레디오스의 악마 (5) 24.08.08 7 0 13쪽
47 에레디오스의 악마 (4) 24.08.08 8 0 12쪽
46 에레디오스의 악마 (3) 24.08.07 8 0 11쪽
45 에레디오스의 악마 (2) 24.08.07 6 0 12쪽
44 에레디오스의 악마 (1) 24.08.06 5 0 11쪽
43 한밤의 늑대소동 24.08.06 5 0 11쪽
42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2) 24.08.06 7 0 11쪽
41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1) 24.08.06 7 0 12쪽
40 돼지재판 (4) 24.08.06 6 0 11쪽
39 돼지재판(3) 24.08.05 8 0 12쪽
38 돼지재판 (2) 24.08.05 7 0 11쪽
37 돼지재판 (1) 24.08.05 7 0 11쪽
36 지금, 땅 아래에서는 (3) 24.08.05 7 0 11쪽
35 지금, 땅 아래에서는 (2) 24.08.04 7 0 11쪽
» 지금, 땅 아래에서는 (1) 24.08.04 7 0 11쪽
33 늑대한테 뼈다귀를 줘놓고 24.08.04 6 0 11쪽
32 누굴 탓합니까 24.08.03 7 0 12쪽
31 쟤가 오늘 왜 저러지? 24.08.03 7 0 12쪽
30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24.08.02 6 0 11쪽
29 콧물이 묻어서 소매로 닦아냈다 24.08.02 9 0 12쪽
28 늙은이 장례준비 (6) 24.08.02 10 0 12쪽
27 늙은이 장례준비 (5) 24.08.01 7 0 11쪽
26 늙은이 장례준비 (4) 24.08.01 4 0 12쪽
25 늙은이 장례준비 (3) +1 24.08.01 12 1 11쪽
24 늙은이 장례준비 (2) 24.08.01 6 1 12쪽
23 늙은이 장례준비 (1) 24.08.01 8 1 11쪽
22 매춘하는 개 인간 (5) 24.07.31 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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