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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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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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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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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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가 오늘 왜 저러지?

DUMMY

발라리는 마지막으로 힘을 얻기 위해 그 편지지를 양 손으로 옹솔하게 잡고 가슴 속에 꼭 껴안았다. 그러면 마치 그 당시의 애처롭고 안쓰러운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여기서 뱅신같이 울고만 있으면 안 되지!'




발라리는 벌떡 일어났다. 산아래는 내다보였다. 그녀는 산길을 씰룩씰룩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는 거야. 지금쯤 다들 내가 탈출한 걸 알아채고 사방으로 사람을 보냈겠지. 다시 잡히면, 가늘롱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고사하고 큰 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생각만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달아오르는 새벽은 자꾸 속곳을 벌벌 들추었다. 소나무 뿌리와 툭 튀어나온 바윗부리가 얽힌 내리막을 걸어가던 발라리는 문 그 속에 망초 개망초 덤불을 발견하고 시기가 작년 이맘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대뜸 들었다.




마차에 타고 수녀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구경거리 보듯이 나와서 머리를 쭉 빼고 쳐다보던 그 날의 늘씬한 봄날은 어물쩡 넘어가는 여름에서 몇 개월 남지 않았었고 높은 산에는 눈이 녹아있었다. 꼬박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흘러간 것이다. 그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결혼하겠다던 남자는 소식 하나 없고 파토가 났다던지 뭐 어쩌다 누가 죽었다던지 말이라도 속 시원히 해주었으면 맘이라도 편하련만 발라리는 그간 일손이 없답시고 잡일하고 그릇만 닦았다.




다리가 아파서 잠시 쉬고 가자는 생각으로 중턱까지 내려와 바위틈에 누웠다. 그제서야 문득 이 산속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불한당이며 살쾡이같은 것들의 위험이 떠올랐다.




허나 생각해보니, 지금 자기는 몹시 졸린 것 같았다. 발라리는 마지막으로 이제껏 하루도 빠짐없이 그랬듯이 하늘에 대고 기도를 마친 후에 잠들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대도 저는 주님을 한 번도 원망해본 적이 없습니다. 참되게 살다보면 언젠가 다들 좋은 곳에 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때까지 남한테 피해 안 주면서 제 원대로 한 번 삶을 소명해볼 작정이니 그것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 번 보시고 마음가는 대로 처분해주셔요.'




아침해가 뜨자마자 발라리는 자던 중에 발각되어서 다시 잡혀들어가고 말았다. 잠결에 수상한 기척을 느끼고 점점 깨어나는 그녀의 시야에 잡힌 건 숨을 헐떡거리면서 얼굴은 찡그리고 있는 수사, 수녀들의 얼굴과 자신의 어깨를 잡고 정중하게 흔드는 손이었다. 아침바람은 청명했고, 등에 댄 바위는 차가웠다. 온몸을 부르르 떨 틈도 없이 그들은 발라리를 벌떡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곧장 걸어서 수녀원에 다시 처박아버리고 말았다.




'아, 저주스럽구나. 잠시 눈만 붙인다고 했던 게!'




그렇게 하룻밤 탈출을 기도하고 실패해버린 발라리의 처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기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녀는 독방에 갇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가장 큰 원인은 본인이 너무 많이 자버려서 그런 거겠지만 누군가 밀고했을 가능성 역시 자꾸만 고개를 들었고, 안타까운 의혹의 화살은 그날 밤 자신을 유일하게 보았던 가마욱스의 돼지치기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속상한게,




'설마 바실리쿠스 그 사람이 나와의 약속을 그리도 쉽게 깨버렸단 말인가? 아,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구나!'








바실리쿠스는 사제의 부름을 받아 교회에 갔다가 몇 가지 음식들을 받고나왔다. 그들은 잠시 그곳에서 망자와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실리쿠스는 만약 고의가 아니지만 누군가를 죽이고 말았을 때 살인자의 영혼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쿠미누스는 그런 때에 적당히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 뒤에 바실리쿠스가 또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죽은 그 사람이 아주아주 늙었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가끔 정신도 오락가락 하셨던 분이면 어던가요?"




쿠미누스는 왠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하지만 일단 대답해주었다.




"글쎄, 그렇다고 해도 그리 달라지는 게 있겠느냐? 어찌 됐든 그 자가 그 불쌍한 사람의 남은 숨통을 끊어버린 건 사실인데 말이야. 좀 염려스럽구나. 으레 늙은 사람들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인생에서 남은 건 고통 뿐이니 차라리 빨리 인생을 끝내주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도 종종 들었단다. 그렇게 말하면 노인들이 뭐가 되겠느냐? 너도 그런 사람들에게서 이상한 말을 듣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구나."




쿠미누스 본인 역시 인생의 겨울에 접어드는 나이인 만큼 그런 이야기는 듣기만 하여도 안타깝게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바실리쿠스는 속으로 곱씹어보고 또 물었다.




"그렇다면, 그 노인을 죽인 사람이요, 만약에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고 치면 어떤가요? 그러니까, 죽은 그 노인은 어차피 곧 있으면 죽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죠. 자기 이름도 가끔 까먹을 정도였으니. 그것을 목격한 한사람이 그 참사를 막으려다가 일이 안 좋게 꼬여서 실수로 그 사람의 숨통을 끊어버리게 된 겁니다. 그러면..."




쿠미누스가 대경실색하여 외쳤다.




"너 사람 죽였냐?"


"아니요?"


"인마, 왜 그리 얘기가 자세해!"


"그냥 그렇다고 치는 겁니다, 쿠미누스 사제님." 바실리쿠스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전부터 생각해왔던 주제니까요. 생각에 살을 붙이고 붙이다 보니 자잘하고 세세한 경우까지 생각해내게 된 겁니다.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한 편의 연극이 그려지는 거예요. 사제님, 너무하시네요. 오히려 칭찬해주셔야죠! 제가 언제 이런 기특한 주제를 사제님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답니까? 그런데 왜 되려 제 명예를 허물하시고 한 적... 하, 한 적도 없었던 일을 뒤집어 씌우는 겁니까!"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하다." 사제가 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하니?"


"저는 뭐 영혼에 대해 관심도 없는 놈이랍니까? 저도 그런 중요한 문제에 신경을 쓰는 놈이라구요. 저 밖에 사람들한테 한 번 물어보세요!"


"알았다, 알았어, 그래. 미안하다. 너의 명예를 허물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바실리쿠스 비스콘티야. 이제 됐느냐?"


바실리쿠스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네."


"내가 방금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야." 쿠미누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방금 든 그 예시는 며칠 전에 네가 지키려다가 죽어버렸다던 그 불쌍하고 늙은 돼지가 떠오르는데."




바실리쿠스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빽!-




"네 이놈, 역시 그랬구나!" 쿠미누스가 언성을 높히자 바실리쿠스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근처에 있던 마리에뜨도 펄쩍 뛰었다. "너 지금 고작 그런 쓸데없는 문제를 걱정해서 나를 붙잡고 이렇게 말들을 하고 있는 거란 말이냐? 너 정말 돼지가 다 되었나보구나. 들어봐라, 너는 지금 젊고, 하느님의 축복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어. 그런 것들 말고도 너는 지금 당장에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아. 그런데도 지금 고작 그 더러운 수퇘지 한 마리 때문에 마음의 정력을 헛되히 쏟고 있었다는 말이야? 내가 너를 잘못 본 게 아니다. 내가 너를 돼지인간으로 만들었던 건 잘한 일이었어!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돼지치기는 돼지 편이라 이거구나.




멀리 갈 것도 없다. 가레랑 영주님을 보아라. 그분에게 일어난 크나큰 비극을 너 역시 들어서 알고 있겠지? 그로가네 (2화에서 바실리쿠스에게 목걸이를 씌우고, 12화에서 돼지 한 마리 때문에 서로 주먹다짐을 해야 했던 그 사람. 그는 지금 산비둘기 짹짹거리는 산중에서 느른한 수색을 하고 있으며, 얼마 전 밤부크 사람들과 술자리를 하는 바람에 바실리쿠스와 터놓고 얘기할 기회를 놓쳐 안타까워하고 있다) 의 일은 어떻고? 그 녀석은 니가 본인 대신 돼지를 더 소중히 하는 바람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어. 그런데도 너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없었지. 나도, 나도, 이, 이 봐라, 나도! 내 지금까지 말은 안 하고 있었다만 사실 이 손의 상처는 길가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아니야. 저 구린내 나는 악마가 보낸 스바로치라는 놈이 어느날 나를 으슥한 대로 끌고 가서 목숨을 빼앗으려 한 일이 있었단 말이다. 그 때 내가 이 손으로 칼날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너와 나는 무덤 관짝을 사이에 둔 채 대화를 나눴어야 했다. 내가 말이나 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오냐, 이제 한 번 말해보아라, 바실리쿠스 비스콘티야, 너는 그런데도 고작 그 더러운 돼지 한 마리가 너무너무 소중해서 걱정이라 이 말이지? 영주의 딸은 사라지고 너의 친구는 모욕을 받아 기분이 나빠 있는데도 지금 네가 실수로 죽여버린 돼지 한 마리가 견딜 수 없다 이 말이지?




집어치워라! 사람이 동물을 걱정해서 뭣 하게? 니 할일이나 잘 해.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좋은 음식과 술병을 몇 잔 들고가서 그로가네와 좋은 식사를 한 자리 마련한 뒤에 눈물어린 사과와 반성, 화해를 하는 것이야. 내 말 알겠느냐 바실리쿠스? 그렇지 않겠다면 이제부터 나는 너를 정말로 돼지라고 부르는 수 밖에 없어. 왜냐하면, 사람보다 돼지를 더 신경쓰는 사람은 사람보다 돼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내 말에 어디 틀린 부분이 있느냐?"




바실리쿠스는 할 말이 없었다.




사제는 그 나이에도 머리털이 시뻘게지도록 설교를 들이부으며 삿대질을 던져댔다. 분명 꾸준한 운동과 식단관리의 덕을 본 것이다. 이 때의 위용은 마치 도시의 강단에서 육욕과 아첨의 죄에 빠진 시민, 상인, 고리대금업자들, 유대인에게 신의 천벌을 선언하는 설교가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보다 더 포동포동한) 의 이욱한 풍모와도 같았다. 듣는 사람이 말과 고함에 절여지는 건 아닐까 싶었을 정도니까.




"너 내가 준 목걸이는 어찌 했어! 설마 까먹었다고 말할 속셈은 아니겠지?"




바실리쿠스는 허둥지둥 품속에서 문제의 그 물건을 꺼내 목에다 뒤집어썼다. 사제가 부여한 돼지의 표식, 성수에 부음받은 철제 돼지목걸이다.




"음! 좋아. 이제보니 불루무스는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했어.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일은 화가 나는구만. 그때 그 대장장이는 저 멀리 내가 그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일 때부터 얼굴에 짜증이 몽창 나있었다. 내가 부탁하니 대번에 안된다고 하더구나. 어찌 그런 말이 있을 수가 있지?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이 목걸이를 쓴 순간부터 바실리쿠스 비스콘티는 돼지가 되는 것이야. 너, 그 목걸이를 벗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로가네한테 가서 내가 시킨대로 해라, 알겠냐?"




근처에 있던 마리에뜨 (얼마 전 자신을 괴롭히던 시녀들에게 울면서 한바탕 쏘아붙였던 그 사람) 가 그 모습을 흘끔 보고 지나갔다.




'쟤는 왜 또 사제님 심경을 건드렸나 몰라. 저렇게 보면 두 사람은 정말 상극이란 말야.'




"대답해 바실리쿠스!"


"예, 알겠습니다, 사제님. 그로가네 형님과 화해하겠습니다."




쿠미누스는 바실리쿠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진짜 사람 안 죽였지?"


"안 죽였어요."




바실리쿠스는 웅얼거리면서 쿠미누스가 전해준 주전부리 바구니를 맛있게 들고 교회 문간을 나가 언덕 아래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런두런 사람에게 그로가네가 어디 있는지 물고 묻는 뒷모습이 사제는 의아했다.




'쟤가 오늘 왜 저러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었나봐. 내가 이렇게까지 쏘아붙이는데도 말대꾸 한 번 없이 고분고분 듣기만 하다니. 아버지, 왜 요즘 이 고장에는 여름에도 찬바람이 부는 겁니까? 이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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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여자가 있어! 24.08.09 5 0 11쪽
50 그놈이 여기있어! 24.08.08 6 0 11쪽
49 에레디오스의 악마 (6) 24.08.08 7 0 13쪽
48 에레디오스의 악마 (5) 24.08.08 7 0 13쪽
47 에레디오스의 악마 (4) 24.08.08 8 0 12쪽
46 에레디오스의 악마 (3) 24.08.07 8 0 11쪽
45 에레디오스의 악마 (2) 24.08.07 6 0 12쪽
44 에레디오스의 악마 (1) 24.08.06 5 0 11쪽
43 한밤의 늑대소동 24.08.06 6 0 11쪽
42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2) 24.08.06 7 0 11쪽
41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1) 24.08.06 7 0 12쪽
40 돼지재판 (4) 24.08.06 6 0 11쪽
39 돼지재판(3) 24.08.05 9 0 12쪽
38 돼지재판 (2) 24.08.05 7 0 11쪽
37 돼지재판 (1) 24.08.05 7 0 11쪽
36 지금, 땅 아래에서는 (3) 24.08.05 7 0 11쪽
35 지금, 땅 아래에서는 (2) 24.08.04 7 0 11쪽
34 지금, 땅 아래에서는 (1) 24.08.04 7 0 11쪽
33 늑대한테 뼈다귀를 줘놓고 24.08.04 6 0 11쪽
32 누굴 탓합니까 24.08.03 7 0 12쪽
» 쟤가 오늘 왜 저러지? 24.08.03 8 0 12쪽
30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24.08.02 7 0 11쪽
29 콧물이 묻어서 소매로 닦아냈다 24.08.02 9 0 12쪽
28 늙은이 장례준비 (6) 24.08.02 10 0 12쪽
27 늙은이 장례준비 (5) 24.08.01 7 0 11쪽
26 늙은이 장례준비 (4) 24.08.01 4 0 12쪽
25 늙은이 장례준비 (3) +1 24.08.01 12 1 11쪽
24 늙은이 장례준비 (2) 24.08.01 7 1 12쪽
23 늙은이 장례준비 (1) 24.08.01 8 1 11쪽
22 매춘하는 개 인간 (5) 24.07.31 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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