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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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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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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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8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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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디오스의 악마 (4)

DUMMY

"에, 명예는 얼어죽을. 내가 맞춰볼까?" 헨나프리데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너는 지금 거짓말을 지어내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생각해봐. 내가 이 성에서 산 지가 몇 년인데 여기 사람들의 연애사정을 모르겠니. 여자애들 입에서 네 이름이 나오는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거기다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둥 자고 있다는 둥....


그거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다. 너는 사랑을 전혀 모르는구나! 그것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어찌 너는 깨닫지 못할까? 만약 그런 여자애가 진짜로 있다 치고 네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 백번 양보해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그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그냥 가지고 노는 거야. 생각해보렴. 백번이든 만번이든 충분하겠어?"



"그러는 누님은 왜 여기 계십니까?" 에레디오스가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말과 행동이 모순을 이루는군요. 누님은 형님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에잇, 됐어요! 맞습니다, 다 제가 지어낸 말이에요. 언제 아니라고 했나요? 뭔가 문젭니까? 저는 철없이 여자 뒤꽁무니나 쫒아다니고 그런 사람 아니에요!"


"믿을 수 없이 오만하군! 지금 그 몇 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 모욕했는지 니가 알아야 할 텐데." 헨나프리데는 몇 걸음 물러나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 철없는 사람중엔 네 형뿐만 아니라 나까지 포함된다는 걸 알고 말한 거지?"


"아니요." 그가 고개를 숙였다. "몰랐습니다. 모르고 한 말이에요." 허나 마음 속의 지옥에서 또 한 번 그 뜨거운 불길이 몰아쳤다. "왜냐하면 저는 그런 성스럽지 못한 일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



말하는 중간에서야 에레디오스는 왜 본인이 이렇게까지 심한 말들을 내뱉고있는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간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척 헨나프리데를 보러 갔던 일들이 모두 그녀의 앞에서 '병신짓거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를 부정하기 위해, 혹은 지금 눈앞에 마주보고 선 이 순간만이라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들을 지워버리기 위해 에레디오스는 필사적으로 입안에 가시들을 세웠다. 가시는 입안을 찌르는 나머지 경멸이 섞인 조소로 보일 수도 있는, 기괴하고 일그러진 표정을 만들었다.



"부탁이니 저를 여러분 같은 선남선녀들과 똑같이 보지 말아주십시오. 어릴 때부터 그런 건 정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더러움이라던가, 여자, 남자, 여자와 남자.... 그런 것들이요. 시간이 지나고, 늙어 자빠지면 사라질 것들이죠."


"꽤나 사제처럼 말하는구나." 이번에는 그녀 역시 깊은 경멸을 담고 있었다. "아예 수도원에 들어가지 그랬니."


"바로 그겁니다!" 에레디오스는 좋은 변명거리를 듣고 얼른 언성을 높혔다. "왜 지금껏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차라리 그러는 게 나았을 걸! 그래요. 이렇게 고통받을 바에야 차라리 수도원에 들어가서 정수리를 박박 밀고 탁발이나 하렵니다. 인간은 찰나에 죽고 먼지가 되지만 신은 영원하죠.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분에 비하면 당신이나 나나... 헨나프리데님,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왜 진작 그런 조언을 해주지 않았냐고 원망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요!"


"에레디오스 넌 지금 내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네 나름대로 결론을 얻었다면 나는 됐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다니 우리랑은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다만 그것도 됐어. 하지만 에레디오스, 네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겠다면, 같은 하나님의 손으로 빗어서 나온 사람 대 사람으로, 그리고 함께 지낸 세월들을 생각해서, 예의를 지키렴. 내가 아무리 싫어도. 그게 우선이야."



헨나프리데는 양 손으로 앞으로 내밀었다. "이리 와라."



에레디오스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작별의 입맛춤이라도 나누자는 표시였다.



"중간에 이야기를 끊어서 미안하네, 에레디오스. 설마 그게 자네의 죄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훗날 그의 고백을 듣고 있던 고해수사가 중간에 말을 가로챈 일이 있었다. 에레디오스가 속세를 떠나 성직에 의탁하고 몇년, 가문의 위세와 본인의 재능으로 수도원의 요직까지 올랐을때였다. "핵심적인 내용부터 듣고 싶은데. 자네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롭네만 도통 그 '악마' 라는 놈이 언제 등장할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구만."


선배 수사인 갈랑드 수사는 그때에도 이미 여든은 넘은 고령이라 귀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날따라 에레디오스가 하는 말들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 머리 위에서는 가문비나무가 아래로 낙엽을 떨어뜨리면서 벤치에 앉은 두 수사의 머리칼을 살며시 두드리고 있었다.


에레디오스는 어차피 늙은 수사인데다 귀도 먹었으니 고해로 죄책감도 덜고 말동무도 해드리는 겸 그날의 괴이한 경험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고 했다.


"수사 어른께 미리 사죄드리지만 아직 이야기는 좀 많이 남았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가 고백하고 싶은 건 그날부터 또 몇년은 더 지난 뒤의 일입니다. 저는 그 일이 있은 후에도 혼자서 곰곰히 생각해보았지요. 사실 그날부터 이미 저의 영혼을 홀리고 있었던 이 망측한 악마는 그날의 이별을 계기로 단단히 뿌리내리고 말았다는 것이 저의 중론입니다. 제 고해를 이해하시려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태가 어떻게 진전되는지 짚어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솔직히 자네의 동기와 전후사정은 내 알바가 아니라네. 이보게, 나 여든 둘이야. 너무 피곤해서 자고싶거든. 자네같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들었는지 아나? 용서는 하느님이 해주시는 거야. 나는 들을 뿐이지."


"그러면 마저 들어주십시오. 어찌 그리 무책임한 말을 하십니까? 여기서 중간에 이야기를 끊어버리면 저는 뭐가 되겠어요."



그들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레디오스와 헨나프리데는 서로의 볼에 대고 간단하고 무정하게 입술소리를 나눈 다음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그날 아침 오프레드와 헨나프리데가 눈물을 흘리며 작별할 때 에레디오스는 마차에 앉아서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프레드가 나와서 같이 인사하자고 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떨어져 지내면서 어느정도는 그녀를 잊을 수 있었다. 아예 장군 시절의 이야기를 깡그리 잊어먹고 어린 시절의 철없는 추억, 이따금 옛 지인을 만날 때나 시시콜콜하게 꺼내드는 액자 속 풍경으로 전락해버린 그곳에서 마녀들이 사는 성탑과 들벼머리 헨나프리데의 망울진 형상은 그저 달내 나는 음몽, 아스라히 피어나는 잔불처럼 환락의 나날속에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에레디오스는 집을 나와 어느 유명한 기사의 수련생이 되었고, 여러 해를 지나면서 무훈이라 할 만한 것들을 세울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래를 촉망받는 젊은이 에레디오스는 장차 훌륭한 기사, 어쩌면 종자, 무훈을 세운다면 어엿한 성의 주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에레디오스는 평소 알고 지내던 시내의 두 여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본가에서 보내온 시종을 만나고 서로 안부를 물었다. 다름아니라 그 시종 역시 에레디오스를 찾아오는 길이었다.



"우선 축하의 말부터 드리겠습니다. 제가 찾아온 건 형님의 일 때문입니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광장의 우체국까지 오라 하셨으니 일단 함께 가시지요. 그 전까지는 괜한 말은 한 마디도 말라는 엄명이십니다."


에레디오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괜히 승아리부터 냈다. "아니, 그 망할 자식은 여전히 내 위에 서서 옛날처럼 대장 노릇을 하려 든단 말이냐? 그래 그 경사 뭐길레 이리 사람을 오라가라 하는지 내 그것부터 알아야겠다."


허나 시종이 방긋 웃으면서 여전히 재촉하니 그도 별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 정말 예상치못하게 형님을 만난 것이다. 기껏해야 대리인이나 편지쪼가리쯤 보게 될 줄 알았던 에레디오스는 그 면상을 보자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서로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긴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던 와중에 오프레드가 어릴 적 알고지내던 헨나프리데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오래 전의 그 감정이 다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무슨 협잡이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형을 따라서 고향에 돌아가보니 과연 어머니의 옆에(아버지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헨나프리데가 교양있게 앉아서 시부모님을 모시듯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은 한 달을 앞두고 있었다.



"이게 예법이 아닌 줄은 알지만 이 아이의 사정이 딱하게 되어 부모가 일찍이 병으로 죽고 친척 중에는 서로 관심도 없으면서 땅과 재산만 빼앗아 먹으려는 잡놈만 남았더구나. 마침 오프레드 녀석이 그 사정을 알고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으면서 결혼을 제발 허락해달라고 하기에 나도 이런 좋은 혼사 자리를 거부할 마음이 없었다. 네 아버지도 죽고 성을 지킬 사람이 바뀌었으니 얘도 얼른 후사를 보고 가정을 꾸려 가문을 튼튼하게 보강해야지."



어머니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아비가 아들을 두고 '짐승같은 놈' 이라고 했던 건 기억하기도 싫을 뿐더러 이미 장성하고 의젓하게 자라난 아들이 아닌가?




"그래... 그리고...." 고해수사가 말을 가로챘다. "맞아, 그 이야긴 전에 들었어. 오랫동안 태기가 없었다지?"


"이야기를 상당히 건너뛰셨지만,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흥청망청한 결혼식을 올렸고, 우리들은, 상당히 많은 하객들이 왔었죠. 어릴 적 친구들도 있었어요. 장군의 성에서 살던 시절의 친구들이요. 모두 형과 헨나프리데가 부른 겁니다. 제가 형을 어깨에 들쳐매고 달렸는데, 그 뒤로 그 친구들이 따라왔습니다. 반대편을 보니 신부쪽 들러리들이 있었죠. 옛날에 같은 방을 쓰던 여자들이었어요.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두 사람을 침실에 던져놓고 문을 닫았죠. 다들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댔어요.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납니다. 아마 홀로 내려가서 술만 마셔댄 거 같아요. 다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죠. 그게 뭔지 아십니까, 갈랑드 수사님? 말씀드렸다시피 집에 돌아온 날부터 결혼식까지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곁에서 형님과 헨나프리데의 애정행각을 수도 없이 목격해야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주 껴안고, 입술을 맞추고, 밀회를 즐겼죠. 그때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버지가 말했듯이 저는 짐승같은 놈이 아닙니까? 형이든 부모든 모두 잡아먹을 놈, 짐승이 짐승짓을 하는데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저는 이미 하루에도 수십번 형을 잡아죽이려는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죽여야 해! 오프레드를 죽여버릴 거야! 이번에야말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놈을 없애버릴거야!' 몰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라니, 자네 그런 생각을 한 게 처음이 아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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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여자가 있어! 24.08.09 4 0 11쪽
50 그놈이 여기있어! 24.08.08 6 0 11쪽
49 에레디오스의 악마 (6) 24.08.08 7 0 13쪽
48 에레디오스의 악마 (5) 24.08.08 7 0 13쪽
» 에레디오스의 악마 (4) 24.08.08 8 0 12쪽
46 에레디오스의 악마 (3) 24.08.07 8 0 11쪽
45 에레디오스의 악마 (2) 24.08.07 6 0 12쪽
44 에레디오스의 악마 (1) 24.08.06 4 0 11쪽
43 한밤의 늑대소동 24.08.06 5 0 11쪽
42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2) 24.08.06 7 0 11쪽
41 원장의 지저분한 속내 (1) 24.08.06 7 0 12쪽
40 돼지재판 (4) 24.08.06 6 0 11쪽
39 돼지재판(3) 24.08.05 8 0 12쪽
38 돼지재판 (2) 24.08.05 7 0 11쪽
37 돼지재판 (1) 24.08.05 7 0 11쪽
36 지금, 땅 아래에서는 (3) 24.08.05 7 0 11쪽
35 지금, 땅 아래에서는 (2) 24.08.04 7 0 11쪽
34 지금, 땅 아래에서는 (1) 24.08.04 6 0 11쪽
33 늑대한테 뼈다귀를 줘놓고 24.08.04 6 0 11쪽
32 누굴 탓합니까 24.08.03 7 0 12쪽
31 쟤가 오늘 왜 저러지? 24.08.03 7 0 12쪽
30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24.08.02 6 0 11쪽
29 콧물이 묻어서 소매로 닦아냈다 24.08.02 9 0 12쪽
28 늙은이 장례준비 (6) 24.08.02 10 0 12쪽
27 늙은이 장례준비 (5) 24.08.01 7 0 11쪽
26 늙은이 장례준비 (4) 24.08.01 3 0 12쪽
25 늙은이 장례준비 (3) +1 24.08.01 11 1 11쪽
24 늙은이 장례준비 (2) 24.08.01 6 1 12쪽
23 늙은이 장례준비 (1) 24.08.01 8 1 11쪽
22 매춘하는 개 인간 (5) 24.07.31 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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