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 마카롱으로 시작하는 조선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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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야
작품등록일 :
2024.08.0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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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적응

DUMMY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동시에 모두가 망각하고 있는, 나 역시 잊고 있었던 당연한 진리.


고려시대에 떨어진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당연한 진리를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대도에서 온 숙수라 하셨슴까?”


“그렇네, 이번에 우리 집안의 손님으로 들어오신 분이니 무례를 범하지 않게 조심해주게나.”


“길쿤··· 대도에서 온 숙수···.”


“···?”


“그, 내래 실례가 많았시다. 이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덕보라고 함메.”


“아, 예에··· 이인수라고 합니다.”


“우리 어르신과 같은 성씨를 쓰시는 분이시군, 머 좋소, 중한 건 그거이 아니니. 실례가 되지 않으면 내 하나만 물어봅세다. 혹, 고기 굽는 법 좀 아시우꽈?”


“···예?”


“고기를 굽는 법 말임다. 내 풍문으로 듣자니 대도에서는 번철이나 석쇠에 고기를 지지는 것 말고도 수십 가지 방식으로 고기를 구워 먹는다 들었는데, 괜찮으시면 한번 보여 주심 아니 됨까? 막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참이라 고기는 넉넉함다.”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씨 집안의 주방장은 야만인이 아니었다.


옷차림과 생김새가 워낙 터프하긴 했지만, 그 아래에 감춰진 진면목은 어지간한 요리사들보다 더 요리사 같은.


사나운 인상을 보고 편견을 가진 것이 미안할 정도로 요리에 진심인 사람이 바로 이씨 집안의 주방장 덕보라는 사람이었다.

대화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스스로의 편협한 행동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그가 바라는 대로 내가 알고 있는 구이 기법을 몇 가지 선보였다.


“자, 양면이 비칠 정도로 얇게 썰어준 고기는 이렇게 기름에 데치듯이 살짝만 구워주면 됩니다.”


“히야아··· 뭐 닿기도 전에 익어버리는 건 첨 보네. 이거이 단순하게 고기를 얇게 썰어 굽는 단순한 방법 같은데, 왜 이전에는 이런 방법을 떠올리질 못했지···?”


“하하, 변화는 생각외로 단순한 발상에서 탄생하는 법이니까요. 다음에 보여드릴 건 중화요리의 기초적인 기법인 웍질을 응용한 방식인데, 고기 기름을 넉넉하게 먹여준 번철을 달궈준 다음··· 방금 전처럼 얇게 썬 고기를 넣어서 이렇게, 단숨에··· 기름에 살짝 데쳐 준다는 느낌으로···!”


화르륵-


“뭐, 뭐이야?! 방금 그거이 뭐였슴메?! 분명 불길이 확!! 하고 치솟았는데···!”


“말했잖습니까. 웍질을 응용한 거라고. 원랜 이런 평평한 팬이 아니라 둥근 웍(鑊)을 사용하는 기법인데, 요령만 있으면 이런 평평한 팬으로도 할 수 있지요.”


“웍? 그런 도구가 다 있슴메?”


“웍은 중국인들이 쓰는 냄비를 말합니다. 여기서 쓰는 다른 냄비들처럼 바닥이 평평하지 않고 바닥이 둥글게 되어 있는데···.”


“아, 아아 들어본 적 있슴메! 장성 너머의 한족들이 쓰는 냄비가 글케 생겼다 했었지비. 그걸 웍이라 부르는구만, 내 또 한 수 배웠수다.”


몇 가지 기법을 선보인 결과 나는 이씨 집안의 주방장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날 이후 주방장은 짬이 날 때마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방을 찾아와 내게 요리에 관한 질문들을 던져왔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한 달 정도 이어질 즈음···.


“스승님, 이거이 일케 하는 거 맞슴까?!”


“아니, 무식하게 힘으로만 들려고 하지 말라니까?! 그럼 손목 다 나간다고!!!”


“아니 이거이 몇 근이나 된다고 그리 호들갑이심까. 스승님도 잘만 돌리셨잖슴까.”


“내가 언제 그렇게 무식하게 힘으로 팬을 돌리디?! 이렇게, 자, 이렇게!!! 화구에 내려놓은 채로 당기듯 돌리는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웍질은 힘이 아니라 기술로 하는 거라니까?! 다시!!”


“끄으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씨 집안의 주방장을 제자로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당장 이 시대에 떨어져 적응하기도 바쁜 판국에 제자는 무슨 제자를 들인단 말인가.


이건 정말 어쩌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지식 교류만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이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면, 당연히 이 시대에서 통용되는 기본적인 상식은 알아 두는 것이 당연한 일.


요리에 대한 주방장의 질문에 답해주고 그 대가로 이 시대에서 통용되는 상식 등을 물어보는 식으로 교류를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이게 사흘이 나흘이 되고 나흘이 닷새가 되다 보니 뭐랄까··· 나도 모르게 불이 붙어버리더라고.


첫 며칠 동안은 원래 생각했던 대로의 건전한 교류가 이어졌었다.


그런데, 개인 연습에 쓸 재료를 자급자족해야 하는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보다 나은 실력을 얻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질문을 던져대는 주방장의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보니 옛 생각이 나지 뭔가.

그 옛날 괴팍한 영감 밑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기술을 배우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동질감이 생겨버렸다고 해야 하나 동정심이 생겨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런 동정심 비스무리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니 뭐랄까, 좀 묘한 기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런 기분 있잖나.


역량은 충분하지만 공략은 잘 알지 못하는 뉴비가 다가와 공략을 알려달라며 말을 걸어올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기분.


알려준 공략을 완전히 따라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알려주면 곧잘 따라 하는 걸 지켜보다 보면 은근히 뿌듯하고 보람이 넘치는 그런 기분 말이다.


그걸 좀··· 어떻게든 참았어야 했는데, 영 힘들더란 말이지.


크르르, 못 참겠다!


그래도 뭐··· 주방장을 제자로 들인 보람이 영 없지는 않았다.


조금 돌아가기는 했지만 처음 목표했던 대로 이 시대의 상식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이 시대의 주방도구들의 명칭부터 시작해 쌍성의 특산물, 쌍성 사람들의 식습관, 그리고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씨 가문이 쌍성에서 지니고 있는 위상과 그런 이씨 가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적대 가문.


그리고 쌍성이 어떻게 형성된 도시인지와 같은 이 시대에 필수적인 상식들을 말이다.


“그럼, 일케 하면 되는 거 아임까?”


“아니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오래 못 버틴다니까?! 자 이렇게, 이렇게!”


그렇게 나는 천천히 이 시대에 적응해 나가는 중이었다.


* * *


구름이 달을 가린 어느 저녁.


이자춘의 방.


방의 주인인 이자춘은 자신의 차남인 이성계를 통해 이인수에 대한 근황을 보고받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요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한 일이라는 게 가병들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덕보를 제자로 삼고 주방에 제 알고 있는 비방(秘訪)을 아낌없이 풀어대고 있다는 게냐 지금?”


“예, 덕보의 말로는 벌써 열댓 개가 넘는 비방을 전해 들었다 합니다. 아무래도 주방의 인원들을 회유하여 일을 꾸미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아니,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걸로 확실해졌으니.”


“확실해졌다니,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이인수, 그자 말이다.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니 조 총관이 준비한 첩자는 아닌 것 같구나.”


“···어째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덕보를 제자로 삼고 주방에 온갖 비방을 풀어대고 있다고. 조 총관이 보낸 사람이라면 덕보를 회유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게다.”


“그렇겠지요. 지금은 이러하지만 한때는 같은 식구였었으니. 당연히 우리 집안 사람들에 대해서도···.”


“당연히 잘 알고 있고말고, 우리가 조씨 집안을 알고 있는 만큼 조씨 집안도 우리 집안의 사정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을테니까,

헌데, 식구라는 말은 쓰지 말기로 하자꾸나 대체 어느 식구가 제 식구의 곤경을 틈타 집안을 통째로 삼키려 든단 말이냐?! 조소생···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승냥이 놈, 언젠가 그 뻔뻔한 면상을 찢어···”


이성계의 입에서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던 이자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절간의 사천왕들보다 더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 위로, 제 아비가 오랜 세월 묵혀온 노기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마주한 이성계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어 아버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이성계의 목소리를 들은 이자춘은 이성계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잠시 침묵하더니, 곧 표정을 추스르고 평소와 같은 표정이 되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되었다. 조소생 그놈의 얼굴이 생각나 살짝 열이 뻗친 것뿐이니까. 방금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도록 하자꾸나. 내 어디까지 했었지?”


“조 총관이 보낸 사람이라면 덕보를 회유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랬었지. 내가 이인수를 첩자라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덕보를 회유하고자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자가 자신의 비방을 우리 집안에 아낌없이 베풀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것과 첩자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그치가 덕보에게 알려준 비방이 지금까지 몇 개라 하였지?”


“열댓 개가 넘는다 하였습니다.”


“너는 일개 첩자가 음식에 대한 비방을 그리 꿰고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특별히 훈련된 첩자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 훈련된 첩자였다면 애시당초 덕보에게 접근하지도 않았었겠지, 만에 하나 무슨 속셈이 있어 덕보에게 접근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인수 그자가 정말로 첩자라면 이렇게 눈에 띄는 방식이 아니라 좀 더 신중한 방식을 사용했을 게다. 아무도 모르게 덕보에게만 비방을 알려주기로 약속한다거나 하는 그런 방식으로.”


“아···.”


“잘 기억해두거라. 언젠가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예? 아버님도 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보다 훨씬 똑똑한 원계 형님이 계신데 제가 무슨···.”


“···그래, 그러게나 말이다. 너나 원계나 참···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어.”


“어···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아버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말을 급히 얼버무린 이자춘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 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한참 동안 책상을 두드리던 이자춘의 입이 열렸다.


“역시, 그자의 재주를 써먹어야겠다. 여전히 수상한 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재주를 써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재주를 써먹으신다면··· 앞으로 끼니 준비를 시키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디 끼니뿐이겠느냐? 조만간 쌍성을 찾을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데 그 재주를 쓸 생각이다.”


“귀한 손님이라니, 그게 누굽니까?”


“범차(范嗏)라는 이름을 들어봤느냐?”


“어··· 분명 들어는 본 이름이온데···.”


다급히 말을 얼버무리는 이성계의 모습을 마주한 이자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고,


이성계를 가볍게 꾸짖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녀석아, 어떻게 오도리 만호(斡朶里豆漫)의 이름을 모를 수 있단 말이냐! 여진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들의 이름 정도는 외워두라 그리 일렀거늘···!”


“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입니다. 두만강에서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강성한 오도리 부족(斡朶里部)을 이끄는 수령의 이름을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후우, 뭐 됐다. 네놈이 그러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더냐.”


이자춘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고, 이성계의 어색한 웃음을 마주한 이자춘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엄숙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그냥 넘어가겠다만 조소생, 그 승냥이 같은 놈의 체면을 구겨 줄 귀인 앞에서 지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때는 내 너를 엄히 벌할 것이다. 그러니, 실수 없도록 미리 준비해 두거라.”


“예, 아버님!”


작가의말

용비어천가에도 언급되는 오도리투먼(斡朶里豆漫) 이라는 단어는 여진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입니다.

오도리는 두만강 일대에서 활동하던 거대 여진부족중 하나인 알타리 족을 음차한 것이고, 투먼은 여진어로 '만호'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지요.


즉 오도리투먼이란, 알타리 부족을 통치하는 만호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범차(范嗏)는 용비어천가에 언급되는 오도리만호 동맹가첩목아, 즉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의 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입니다.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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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오믈렛 +5 24.08.29 1,273 61 12쪽
5 5. 쌍성 +3 24.08.28 1,331 6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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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프롤로그 +11 24.08.27 1,821 7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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