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최근연재일 :
2024.09.18 17:05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45,560
추천수 :
889
글자수 :
242,248

작성
24.08.10 10:20
조회
1,785
추천
33
글자
12쪽

암살

DUMMY

며칠 전.


오랜 벗이 나를 찾아왔었다.

좁디 좁은 초막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술을 들고와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연거푸 잔을 들이켰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붉어진 얼굴로 그가 말했다.


“선배는 알고 있소? 지금 교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교주가 어떻게 변해버렸는지?”


왜 모르겠는가.

교를 떠나 산 속에 틀어박힌지는 오래되었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들은 간신히 찾은 내 마음속의 평화를 무너뜨리곤 했다.


대장이 교주의 위에 오르고 머지않아 피의 숙청이 일어났다.

힘겨웠던 지난 세월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늙은 구렁이같던 장로들의 목을 쳐내고, 철옹성같이 버티던 낡은 가문들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변화를 바라던 모든 이들이 그에게 환호했다.

교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피어난 가장 찬란한 꽃.

새로운 교주의 강력한 영도력 아래,

더럽혀진 교의 명예를 회복하고 중원 곳곳에 교의 기치가 휘날리게 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교주의 칼날이 그들 자신에게 향하기 전까지는.


광기의 검이 전후좌우, 말 그대로 사방을 향해 휘둘러졌다.

이유도 분명하지 않았고, 그가 우리에게 약속한 것과도 달랐다.

그러나 그에게 반대할 사람 또한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함께하던 형제들도 이제 몇 남지 않았소. 이 피의 행진이 끝나면 도대체 누가 교에 남아있게 되는거요? 교주께서 뜻하는 바가 과연 무엇이오? ”


이대로 가면 정말 아무도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주 혼자 밖에는.


“선배. 선배가 가서 이야기해보시오. 교주가 그래도 그대의 말은 듣지 않았소?”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함께 밤새워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던 때가.


나는 그저 그가 내 말을 들어주었다는 것에,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었지.


하지만 그것도 모두 한 때의 일이다.

무심코 오른쪽 소매를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그가 흥 코웃음을 쳤다.


“그깟 팔 하나 잃었다고 배짱이 없어진거요? 당신은 더 강한 사람이었어. 그렇지 않나?”


“새로운 교의 탄생을 위해 함께 하자던 그 패기와 열정. 나는 그것이 그립소. 우리가 모시는 대장이 언젠가 정말 교주가 될 것이라는,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함께 달려가던 그 시절이”


“형님은 그렇지 않소?”


그랬지.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가 교주의 위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검댕을 손에 묻혀왔는지···

그리고 그 검댕이 나에게도 짙게 묻어있다는 사실을···

그 말은 그에게 굳이 하지 않았다.


“관두슈. 선배가 정 하지 않겠다면 내가 말해 봐야지”


“충심으로 말한다면, 교주께서도 분명 진심을 알아주실 것이오”


오랜 벗은 끝내 그 귀한 술을 혼자서 다 비워냈다.

비틀거리며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우뚝 멈춰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것 압니까? 우리끼리는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소”


“차라리 형님이 우리의 대장이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



벗의 목이 성문 앞에 높게 내걸렸다.

나는 웅성웅성 모인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장대에는 피가 말라붙고 날파리들이 들끓었다.

중간쯤 그의 죄목이 구구절절히 붙어있었다.


교주에 대한 암살시도.

그는 사실 무림맹에서 보낸 끄나풀이었으며,

오랜 세월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교주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며칠 전 피를 토할 듯 했던 그의 열변을 들어서가 아니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주의 선언을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대신 돌멩이를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벗의 시체를 모욕하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었다.


비틀거리며 나아간 내가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을 충혈된 눈으로 돌아보았다. 장대를 꺾어 부러뜨리고 그의 죄목이 붙은 방문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대전 앞을 지키던 무인들이 나를 제지하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 이놈! 감히···!”


그들을 멈춰세운 것은 무인들의 수장이었다. 한참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격이 있지. 보내줘라”


“하지만···!”


“책임은 내가 진다”


아직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나.

그의 말을 들은 무인들이 물러났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벗의 머리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한쪽 팔을 잃었던 날, 내 텅 빈 소매를 붙잡고 한참동안이나 울먹이던 벗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추모해 줄 차례였다.


나의 걸음을 따라 파도처럼 길이 갈라졌다.



#



다시 오늘.


마침내 교주가 비틀거리며 침실로 들어섰다.

짙은 술내음이 사방에 진동했다.


그가 침상에 털썩 쓰러지듯 몸을 뉘인 순간,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나의 단검이 그를 반겼다.


아무리 단단한 철갑이라도 두부처럼 파고드는 예리한 단검이지만,

교주의 몸에는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튕겨올라갈 때, 나는 발가락 끝에 연결되어있던 가느다란 끈을 잡아당겼다.

휘장에 숨겨져있던 가느다란 세침들이 마치 비가 내리듯 쏟아져내렸다. 그것들에는 그 어떤 맹수라도 단번에 잠재울 수 있는 극독이 묻어있었다.


빙글 - 교주가 몸을 회전시켰다.

열화장 熱火掌.

피가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듯 붉어진 그의 손이 세침들을 튕겨내고 내가 숨어있던 침상을 반으로 갈랐다.


화악! 검은색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시야를 비롯한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인들은 본능적으로 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공의 흔적조차 없는 나의 기척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터.


충혈된 눈으로 사방을 살피는 그의 뒤에서 내가 성큼 다가섰다.

아무런 의지없이,

무심하게,

그저 툭 하듯 검을 뻗어냈다.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살수.

하지만 끝내 교주의 몸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왁!!!!


별안간 그가 커다란 함성을 내뱉자, 그의 몸을 중심으로 둥그런 기파가 거세게 일어났다.

마치 공간 전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강력한 기운.

가구들이 조각나고 옷조각이 찢어져 흩날렸다.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 기운에 나의 칠공(七孔)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나의 위치를 파악한 그의 신형이 번뜩였다.

그의 왼손이 단번에 나의 배를 관통하고,

하나뿐인 나의 손목은 그의 오른손에 단단히 붙잡혔다.


“하하하! 너였구나. 과연 너였어!”


그가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범계, 너에게 노려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이곳의 방비는 도대체 어떻게 뚫어낸거냐. 이런 준비는 또 언제 한거고? 경비들이 허수아비인가? 大 천마신교 교주의 처소를 지키는 자들이?”


그의 손이 닿는 곳에서 치이이익- 불에 달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득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모습.

총기와 열정이 가득했던 눈동자는 온데간데 없고, 오직 광기만이 남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복수를 하러 온건가? 무엇에 대한 복수이지? 드디어 알게 된건가? 네 오른팔이 잘려나가도록 만든 것이 사실 나였다는 사실을?”


아니. 그 사실을 알게 된지는 이미 까마득하게 오래되었다.

다만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피를 나눈 형제들을 죽이지는 말았어야지.

네 녀석에게 실망하고 떠나려했다는 이유로 말이야.


하지만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복수 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나에게 부탁하지 않았나?

그대가 길을 잃고 헤메이는 날, 형제들을 배신하고, 나를 실망시키는 날.

나의 검으로 그대의 심장을 뚫어달라고.

그 약속을 지키러 왔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푸하하하. 어렸군. 어렸어! 한낱 심부름꾼 따위를 실망시켰다고 내가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목젖이 보이도록 웃던 그가 갑작스레 정색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감정변화의 폭은 확실히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지. 한낱 심부름꾼이 아니지. 범계, 그대는 나의 숨은 칼날. 밤그늘을 베어내는 올빼미···”


“내가 살면서 진심으로 탄복한 사람이 다섯도 안될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죽였고, 네가 하나 남아 있었지.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겠지만”


그의 눈에 살기가 일렁임과 함께,

나의 오장육부를 불태우는 그의 열화장이 더욱 짙어졌다.

죽음이 한발자국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내 살수행은 그가 나를 죽임으로서 완성된다는 것을.

방 안을 가득 채웠던 그의 기운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교주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이게 무슨···”


열화장의 기운을 흩어놓기 위해서는 세가지 성분이 조합되어야 한다.

오랜 벗이 홀로 비워낸 독주가 바로 그 첫번째 재료.

교주가 그를 직접 벗의 목을 잘라내어 피를 보았으니, 일차 조건은 이미 충족이 된 셈이었다.

이차 조건은 미리 바꿔치기 해놓은 침실의 향.

마지막 조건은 그의 피부에 가득 묻은 나의 피.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자 교주의 내공과 기운이 흩어졌다.

신체의 균형이 무너지고 독기가 그 자리를 빠르게 메웠다.

마비가 찾아온 그의 눈코입이 어색하게 씰룩거렸다.


얼굴을 있는 힘껏 그의 코에 들이박았다.


쾅.


비틀거리는 그에게 체중을 실으며 다리를 걸었다.

그의 신형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덜덜 떨며 땅바닥을 기어가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단검을 높게 들었다.

한 평생 그를 위해 휘둘렀던 칼날이다.

이번에는 그 칼날이 그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마비로 인해 오그라드는 손을 한사코 펴가며 그가 외쳤다.


“안···안돼. 아직은 안돼!”


푹.


검을 내리찍었지만 올바른 위치는 아니었다.


크아아아악!


간발의 차이로 즉사를 피한 녀석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나 또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의지와 집념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일지도.

더이상 손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의 위에 그대로 몸을 포갠 채 가쁜 숨을 허덕였다.

세상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홍옥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목걸이를 잡아당기는 광경이 보였다.

정확히는 그것에 달린 둥그런 구슬을 필사적으로 자신의 입을 향해 가져가고 있었다.

피와 같이 짙은 붉은색의 무늬가 물결치듯 그것의 표면에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생명을 구해내는 단약이라도 되는걸까.


“그..그래. 지금이다. 도···돌아가겠다. 돌아가겠어. 기다려봐라. 나에게도··· 나에게도 간절하게 바라던 때가 있어. 그 빛나던 시절로···”


홍옥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구슬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마지막 힘을 모아 붉은 구슬을 입으로 낚아챘다.

녀석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안돼!!”


꿀꺽 삼켰다.


“안돼! 네가 감히··· 너 따위가 감히!!!”


홍옥이 허둥지둥 나의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순식간에 녹아 없어진지 오래.

곧 목 안쪽으로부터 거대한 불길이 솟아났다.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고통.

불길이 나의 몸을 삼켰다.

홍옥의 처절한 외침이 아득하게 멀어져간다.


그리고 이어진 암전(暗轉)...



#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이미 한번 겪었지만,

완전히 달라진 삶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교주를 삼키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각은 오후 5시 5분입니다. 24.08.30 890 0 -
41 비무 시험 NEW +3 23시간 전 427 24 14쪽
40 의지 +3 24.09.17 602 20 12쪽
39 내력 시험 +2 24.09.16 646 21 14쪽
38 전생의 인연들 +3 24.09.15 739 23 14쪽
37 천무관 +2 24.09.14 716 23 14쪽
36 졸업 +3 24.09.13 721 23 14쪽
35 삼년 뒤 +3 24.09.12 800 25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838 22 14쪽
33 취조 +3 24.09.10 824 23 13쪽
32 군사(軍師) +3 24.09.09 838 23 13쪽
31 사도(司徒) +4 24.09.08 927 19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4 24.09.07 983 25 15쪽
29 약속 +3 24.09.06 1,002 22 12쪽
28 예감 +3 24.09.05 1,028 16 14쪽
27 발단 +2 24.09.04 1,045 16 13쪽
26 시비 +3 24.09.03 1,038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1,052 24 14쪽
24 환희 +3 24.09.01 1,108 21 12쪽
23 증명 +3 24.08.31 1,084 19 13쪽
22 질주 +2 24.08.30 1,086 20 12쪽
21 평가 +2 24.08.29 1,106 21 14쪽
20 씨앗 +3 24.08.28 1,125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127 20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108 21 13쪽
17 수색 +3 24.08.25 1,113 19 14쪽
16 목표 +3 24.08.24 1,132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165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156 22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189 2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