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최근연재일 :
2024.09.17 17:05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40,599
추천수 :
821
글자수 :
235,932

작성
24.09.01 00:21
조회
1,007
추천
20
글자
12쪽

환희

DUMMY

구노인이 작업실의 문을 닫고 나오자,

마당에 먼저 나와 기다리던 임풍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고생이 많소”


“별 말씀을”


잠깐의 형식적인 인사 뒤에 긴 침묵이 흘렀다.

둘 간의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본래도 어색했던 사이였지만, 얼마전 임풍이 구노인을 겁박했던 이후로는 더더욱 서먹한 관계가 되어있었다. 만약 사백이십삼번에게 실행한 실험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들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사실...”


오랜 침묵 끝에 서로 동시에 말을 꺼낸 구노인과 임풍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구노인이 임풍에게 먼저 말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임풍이 말했다.


“그나저나 말이야. 내가 생각을 좀 해봤소. 사백이십삼번에게 한 실험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조금만 더 투약량을 줄여서 배합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가 따로 불러낸 목적이 결국 개조된 마화단이라는 것을 알게된 구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는 도대체 만족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 사백이십삼번의 경우가 매우 특수한 경우이며, 성공할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위험한 실험이었음을 여러번 강조했음에도.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


“왜 그렇지?”


구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마화단을 제조할 때 이독제독의 원리를 썼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은 기존에 쓰던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 마화단의 독성에 버금가면서도 더 빠르게 작용하는 독소를 이용하여 체내의 기와 혈의 불균형을 일부러 만들어 내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불균형을 또 다시 뒤집는 것이 마화단의 역할이란 말이오. 각기 다른 작용을 하는 성분들의 분량과 활성시간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가 없는 것이 이번 배합의 요체요”


임풍은 구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어찌됬든 그 어려운 것을 해낸 것이 그대 아니오?”


“그것이 사실···”


무언가를 말하려던 구노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새로운 마화단의 배합을 완성한 것이 과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곰곰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막히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준 것은 옆에서 그를 돕던 사백이십삼번이었다.


‘어쩌면 그 녀석은 독에 있어서는 나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구노인은 알 수 없었다.


본디 그는 임풍교두에게 사백이십삼번을 자신의 제자로 들이게 해달라는 요청을 할 생각이었다.

이 험난한 천마신교에서, 언제 칼맞을지 모르는 무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소년이니까.

자신의 연줄을 모두 동원한다면 명경관(明經館)이나 지문관(知文館)같은 문사들을 위한 기관으로 옮겨주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노인은 이 사실을 이 야망과 욕심으로 가득찬 교두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마화단의 배합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그는 평생 이곳에 갇혀서 마화단이나 만드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사후에도 쭉.


“설령 제대로 된 조합을 다시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사백이십삼번같이 아직 혈맥이 굳지 않을 정도로 어려야만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생각해보시오. 아무리 마화단의 독기를 낮춘다 한들, 열 살 정도의 아이가 그런 고통을 어찌 견뎌낼 수 있겠소?”


임풍이 퉁명스레 말했다.


“저 녀석은 버텨냈잖소?”


“그건–!”


벌컥 화를 내려던 구노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임풍 교두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서 납득시킨다 한들,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만 앵무새처럼 되풀이 할 뿐이었다.


또 한번 긴 침묵이 흘렀다.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돌아선 임풍 교두가 약방문을 쾅- 닫으며 말했다.


“아무튼 좀 더 고민해보시오. 사람이 발전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



숙소에 다녀온 웅삼이 품에서 조심히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둘둘 말린 천을 걷어내자, 뿌리가 흙에 뒤덮혀있는 보라빛 자령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말라붙거나 상태가 변질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꽤 오랜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완벽에 가깝다.


놀란 눈으로 웅삼을 바라보자, 그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열흘 동안이나 밤을 새가며 찾던 거잖아. 중요한 것 같아서 특별히 신경 좀 썼지”


“이렇게 보관하는 법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웅삼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구노인에게 약재나 식물을 잘 보관하는 비결에 대하여 물어봤지. 물론 당연히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순수하게 궁금한 것처럼 슬쩍 물어봤지. 쓸데없는 말이 많다고 몇 대 두들겨 맞긴 했지만···”


솔직히, 웅삼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저 덩치 크고 의욕만 넘치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내가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자, 녀석이 그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말했다.


“너는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머리를 잘 쓰지 않냐? 나도 너라면 어떻게 했을지를 고민해 봤을 뿐이야”


“알겠으니까 얼굴은 붉히지 말아다오”


자령화를 받아들어 품 속에 챙겨넣었다.

구노인이 잠든 밤시간을 이용해 따로 조용히 복용할 생각이었다.

웅삼이 머뭇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그것, 그런거지? 내공을 늘려주는 영약같은···”


“왜. 관심있어?”


웅삼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솔직히 관심있지. 하지만 그 꽃을 탐내는 것은 아니야. 그것은 분명히 너의 물건이니까”


자령화가 내공의 증진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무작정 빼돌리거나 챙기지 않고 나에게 가져온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내공을 증진시키는데 효과가 있는 영약이 맞아. 하지만 혈맥이 어느 정도 트여있어야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전의 나처럼 혈맥이 꽉 막혀있었다면 큰 도움이 안되었을거야”


웅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무작정 안먹길 잘했군”


···먹어볼까 고민을 하긴 했었다는건가.

하긴 딱봐도 귀해보이는 약초인데,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네가 오랜 기간 앓아누웠던 것은 그 혈맥을 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보군?”


“그렇지”


“나는 어떨까?”


웅삼이 물었다.


“네가 보기에 나는 어때? 내가 지금에서 더 발전하려면, 너의 곁에 서지는 못하더라도 많이 뒤쳐지지 않으려면, 내가 어떤 방법을 써야할까?”

“나는 강해지고 싶어. 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네가 목표한 바가 무엇이든, 그것을 위해 함께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의 마지막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일전에 암혼동 밖 숲 속에서 그가 나를 따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긴 했지만.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손을”


웅삼의 손목을 잡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혈맥이 어떠한지를 파악해보려는 것.

단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나 자신의 혈맥이 트인 지금은 왠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내 몸 안에 휘도는 기운을 웅삼의 손목을 통해 흘려넣어보았다.

전혀 저항하거나 막히는 것 없이 쭉 들어가는 기운.

웅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지긋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커다란 희망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조급해하지마라. 넌 이미 한번 스스로를 증명했잖아. 이제 삼급 아냐?”


“하지만 너는–”


“나랑 네가 같냐?”


“......”


“우선은 열심히 먹고, 열심히 자고, 열심히 수련하는 것에 정신을 집중해라. 이제 훈련은 더욱 더 격해질거야. 이제부터는 수련을 못 버틴 아이들이 훈련에서 죽어나가는 일도 부지기수일거다. 이건 농담이 아니야”


죽음이란 말을 들었음에도 녀석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너의 의지라면, 이런 것들은 가뿐히 버텨낼 수 있어야겠지. 성장해서 다음에는 꼭 일급으로 올라올 수 있게 해보라고. 너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거다. 그리고 내공에 대한 것은···”


웅삼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분명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기대감으로.

녀석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


남은 마화단을 어떻게 사용할지 정한 것 같으니.



#



깊은 밤.


자령화를 다시 꺼냈다.

은은하게 빛나는 보라색 꽃잎.

원래대로라면 홍옥이 섭취했어야 할 영약이다.

그러니 내가 이것을 오롯이 흡수해 낼 수 있다면,

그와 나의 간격은 두 발자국 좁혀지게 되는 셈이었다.


그가 자령화를 언제쯤 찾으러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허탕을 치고 돌아갔을지도.

문득 절벽 위에 묶은 밧줄을 그대로 놓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만약 홍옥이 현장을 살펴보게 된다면, 누군가 이미 자령화를 채취해갔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이곳 산맥을 들락날락했던 것일텐데, 꽤나 열이 받겠군”


범인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 헤멜지도.

하지만 그것이 나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는 아직 암혼동이라는 작은 세상에 묶여있는 티끌만한 존재일 뿐이니까.


‘자. 이제···’


개조된 마화단으로 닫혀있던 혈맥을 뚫고 내공의 씨앗을 품었으니,

이제는 이 씨앗을 부풀려나갈 차례이다.

내공이 갑작스레 늘어난 것을 알게되면 주변에서 의혹의 시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눈치를 보며 성장의 속도를 조절할 여유는 없었다.

귀한 자령화를 언제까지 숨겨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조심스레 흙을 털어내고, 보라색 꽃잎부터 차근차근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당연히 맛있을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쓰고 떫었다. 지금껏 먹어본 그 어떤 약초보다도.

마치 수백개의 쓴 약초가 한꺼번에 입안에 퍼지는 듯한 느낌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구멍을 태우는 듯한 느낌을 주며 천천히 식도로 넘어가는 자령화.


그것이 위장으로 넘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단전 쪽에서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이 밀려왔다. 마치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화단을 복용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그 불길을 신중하게 인도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미 잘 닦여지고 넓혀진 길을 따라 불길이 번져나갔다.

곧 온 몸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가는 그 온기.


‘.....!!!!’


짜릿하다.

내력의 운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내력의 운기 자체도 짜릿한 일이지만, 나 자신에게는 특히 그 감상이 남달랐다.

뇌리에 박히도록 이론으로만 외우던 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된 것 아닌가.

기나긴 고통에 대한 보상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흥분을 가까스로 제어했지만 환희는 계속되었다.

몸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를 반복했다.

그 격렬함에 취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달콤함에 취해 아득해지는 정신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붙들었다.

단 한방울의 기운도 놓치지 않고 흡수해야 하기 때문에.


운기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일주천, 이주천, 삼주천···

작고 귀여웠던 나의 씨앗이 점차 커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마화단의 충격과 달리기의 후유증으로 상처받았던 육신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잠을 전혀 자지 않았음에도 온 몸에는 상쾌한 활력이 넘쳤다.


어느덧 새벽.


문득 눈을 뜨고

가늘게 들어오는 햇살에 두 손을 비추어보았다.

까맣게 메마르고, 거칠게 갈라졌던 피부껍질 사이에서

뽀얀 피부가 새로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교주를 삼키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각은 오후 5시 5분입니다. 24.08.30 785 0 -
40 의지 NEW +2 9시간 전 307 18 12쪽
39 내력 시험 +2 24.09.16 493 19 14쪽
38 전생의 인연들 +2 24.09.15 610 22 14쪽
37 천무관 +2 24.09.14 603 22 14쪽
36 졸업 +2 24.09.13 618 22 14쪽
35 삼년 뒤 +2 24.09.12 694 24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738 21 14쪽
33 취조 +2 24.09.10 727 21 13쪽
32 군사(軍師) +2 24.09.09 743 21 13쪽
31 사도(司徒) +3 24.09.08 828 17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3 24.09.07 883 23 15쪽
29 약속 +2 24.09.06 908 20 12쪽
28 예감 +3 24.09.05 932 15 14쪽
27 발단 +2 24.09.04 952 15 13쪽
26 시비 +3 24.09.03 944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953 24 14쪽
» 환희 +3 24.09.01 1,008 20 12쪽
23 증명 +3 24.08.31 990 19 13쪽
22 질주 +2 24.08.30 989 20 12쪽
21 평가 +2 24.08.29 1,010 21 14쪽
20 씨앗 +3 24.08.28 1,028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033 19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010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8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7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6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6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9 17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