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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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최근연재일 :
2024.09.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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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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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조

DUMMY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그가 나를 위아래로 차근히 살폈다.

나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항상 그랬다.

전생에서도 그는 언제나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말을 던지고 그 반응을 살피곤 했다.


“시체를 보고 놀라지도 않는군. 그럴만도 해. 네가 만들어낸 시체니까. 그렇지?”

“원래 성격이 이렇습니다. 그리고 교두께서 죽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한지라”


육영이 빙그레 웃었다.


“참으로 침착한 대답이야. 역시 예상대로군”


훗날 군사 자리에까지 오를 인물이 하필 내가 만들어낸 사건을 맡아 나를 취조하고 있다.

그가 원래 이곳 암혼동까지 흘러올 일이 있었던가?

본래대로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임풍 교두를 죽임으로서 역사가 바뀌게 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를 포섭하기는 어려울테지만, 적으로 돌려서는 안될 인물이다.

첫 만남이 이런 식이래서야 참으로 곤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나를 관찰하던 그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발을 까닥거렸다.


“사백이십삼번. 전적이 화려해”


“......”


“암혼동에 들어온지 단 며칠만에 오급 아이들 전체를 휘어잡았더군. 훈련에 관해서는 웬만해서는 고집을 꺾지 않는 임풍교두를 설득해 훈련 방식과 배식 방식도 바꾸게 했어. 성적도 인상적이야. 결과가 아니라 성장하는 속도가”

“심지어 얼마 전에는 시험 한번만으로 일급으로 올라왔어. 교관들의 말에 따르면 다른 일급아이들도 네 앞에서는 기를 못핀다고 하더군. 너는 단순한 꼬맹이가 아니야”

“너는 약방 구선생과 특히 가까운 사이였지. 너의 혈맥을 틔워준 것도 구선생이고, 계속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것도 구선생이었으니까”

“매일 약방에 드나들었으니 약재에 대한 이해도도 높을테고, 수련생 중에 이 마화단의 부작용이나 고통에 대하여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네녀석 뿐이지. 직접 그 고통을 겪어봤을테니 말이야”

“너지? 네가 임풍 교두를 죽였지? 임풍 교두가 구선생을 때려죽인 것에 앙심을 품은거야. 그렇지않나?”


여전히 놀라운 사람이다.

그가 이곳 암혼동에 도착한지 채 두시진도 되지 않았을 터.

어떻게 그 짧은 시간만에 이곳 암혼동이 돌아가는 사정에 대하여 파악하고,

용의자를 좁히고 나에 대하여 낱낱히 조사한 뒤,

이렇게 빠르게 진실에 가깝게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편견없이 사고를 확장한 덕분에 이를 수 있는 그만의 결론이지만,

육영이 늘어놓는 것들은 모두 심증과 정황일 뿐이다.

말 몇마디, 증거 몇 개에 와르르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는.


“구 어르신이··· 죽었습니까?”


가늘게 떨려나오는 목소리.

육영의 눈이 나의 눈빛을, 목젖을, 피부의 떨림을 관찰하고 있다.


“교두가 그 분을 죽였다구요? 언제? 도대체 왜?”


잠깐의 떨림을 멈추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다시 처음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온 내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쉬운 일이군요. 이제는 나에게 복수할 기회가 남아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


육영의 눈이 여전히 날카롭게 나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속아넘어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꺼내든 것은 ‘가장된 솔직함’이라는 무기.

육영이 아무리 빼어난 인물이라 하더라도 아직 한참 젊고 경험이 부족한 나이이다.

전생에서 이미 수없이 많은 일을 겪고 헤쳐온 노련한 여우를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나.

그것도 그 여우가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있다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이리 가까이 와봐라”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카랑카랑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어투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한결 부드러워졌음을.

나의 연기에, 위장된 솔직함에 어느 정도 넘어간 것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임풍교두의 몸을 덮고 있던 천을 걷어올렸다.

옆구리에 나 있는 선명하게 박힌 검붉은색 주먹자국.

성인의 것이라 보기엔 매우 작은 주먹이다.


그가 주먹자국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아무 말 없이 주먹을 내밀어 임풍의 옆구리에 난 흔적에 내 주먹을 갖다댔다.


작았다.

내 앙증맞은 주먹은,

임풍의 옆구리에 난 자국보다도 손가락 하나만큼은 작았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미래의 군사가 입을 쩝 다셨다.


이런 일이 있을 줄 내가 왜 예상하지 못했겠는가.

현장을 떠나기 전, 임풍의 몸에 남은 흔적들을 원하는 대로 조작해놓았다.

아무리 다른 증거가 충분하다 하더라도, 빼어난 수사관이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육영 정도의 거물이 오게된 것은 나의 예측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눈 앞의 꼬맹이가 어떤 전생을 가졌는지.

지난 평생 어떤 일을 해왔는지.


영문없는 시체를 만들고, 흔적을 절묘하게 조작해내는 일.

엉뚱한 증거로 사람들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시간과 심력을 소비하게 하는 일.


결국 육영 또한 내가 설계해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보거라”


그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씌여진 혐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육영이 나를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의 못생긴 얼굴을 마주보고 있자,

그가 곧 입술을 씰룩이더니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기억하는 웃음이었다.

전생에서 그를 만났을 때와 같은 웃음.


“내가 이런 말을 하게될 줄은 몰랐군. 그래. 다짜고짜 몰아붙였던 것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비로소 그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임풍의 집무실을 나서기 전, 그가 다시 나를 멈춰세웠다.


“만약에 너라면 어떨 것 같나?”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좋아.

위기가 기회로 바뀌었다.

단순한 조사대상에서 벗어나,

그가 흥미를 가지고 계속 지켜보는 대상으로 발돋움할 기회.

하물며 그것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판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떻게 죽일 것인지를 말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어떻게 범인을 찾아낼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우선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해보도록 해봐라”


임풍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같은 훈련생에게까지 수사대상을 넓히게 된 것은 아마 이 흔적 때문이겠지만, 이 주먹자국은 직접적인 사인(死因)이라 보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를 결정적인 죽음으로 몰고간 것은 역시 마화단의 과다복용일 가능성이 높아보이는군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겪어본 임풍 교두는 편하게 공을 세우고 승진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었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마화단을 복용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나의 대답이 육영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탁자 위에 올렸던 발을 내리고 몸을 바짝 기울였다.


“계속 이야기 해 봐라”

“두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이 당할 것을 미리 알고있던 구 어르신께서 무언가 장치를 해놓으셨거나, 아니면 또다른 외부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던 거겠죠. 하지만 첫번째 가설로는 저 주먹자국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체구가 성인보다는 작으면서도 살인에 능숙한 누군가가 누군가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게 누구지?”


어깨를 으쓱했다.

육영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나도 그저 이곳 암혼동의 수련생 신분일 뿐이야.

이 이상 얼마나 더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한단 말이냐?

나를 잡아갑쇼 할 수도 없고.


그때,


“사도님! 한번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무인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새벽에 임풍 교두의 지시를 받고 본산으로 갔던 무인이 연락이 두절됬었는데···”


교관의 설명을 듣던 육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집무실에 나를 내버려두고 떠나기 전, 육영이 나를 흘깃 돌아보았다.

교차하는 눈빛.

그에게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참으로 절묘한 순간,

내가 만들어낸 모든 장치들이 맞물려 떨어졌다.


인피면구를 쓴 나를 일혼이라 착각한 무인이 발견되었다.

일혼은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전력이 있는데다,

아무리 그를 찾아 헤멘다 한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용의자이다.

죄를 덮어씌우기엔 최고의 존재.

중간 중간 얼기가 안맞는 부분은 사람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메꾸겠지.


덩그러니 남겨진 임풍 교두의 시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차피 수년 뒤에 홍옥을 위해 싸우다 죽을 운명이긴 했지만,

그릇된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었을텐데.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머지않아 천마신교를 포함한 온 무림은 격랑에 휩싸이게 될 것이니.


준비해야한다.

쉼없이 전진해야한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홍옥이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순간,

그의 옆에서 함께 날아오르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겉으로는 티내지도 못하고 남몰래 얼굴을 일그러뜨릴 홍옥을 생각하자

온몸이 짜릿하게 불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참으로 기대되는 미래이다.



#



어두운 밤.

어깨를 짚는 손길에 웅삼은 퍼뜩 눈을 떴다.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킨 그는

조용히 자신을 깨운 이를 따라 나섰다.


사백이십삼번.

불가사의한 소년.

한 달만에 본 그의 뒷모습이 무언가 어색하다.

그 짧은 사이에도 소년의 키가 꽤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냥 허약하고 왜소해보였던 그의 몸이 점차 단단해지고 있다.


한참을 걷던 사백이십삼번이 동굴 으슥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웅삼은 단 한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


몸을 돌린 소년의 얼굴을 본 웅삼은 반갑게 미소지었다.

흉터가 가득했던 소년의 얼굴이 거의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와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피부는 더 광택이 나는 듯 했고,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


“수련은 열심히 하고 있겠지?”

“그럼!”


웅삼이 가슴을 일부러 크게 부풀렸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왠지 사백이십삼번 앞에서는 자신이 없어졌다.


“오늘은 동굴 밖으로 안나가는건가?”

“교관들의 경비가 대폭 강화됬어. 새로온 교두가 워낙 깐깐해서 말이야”

“아, 그 임시교두 말하는거지? 그 분은 혹시 얼마나 이곳에 계실 예정인지 알아?”

“글쎄. 언제든 본산에서 부르면 떠나야 한다고는 하던데. 왜?”

“솔직히 그 분이 계속 여기 계셨으면 좋겠어. 최근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거든. 밥도, 가르쳐주는 것도, 교육하는 방식도···”


사백이십삼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에 유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나 중요한 일이지”

“그나저나 너무 아쉬운데? 바위 위에서 뜯는 토끼고기가 기가 막힌데 말이지”


소년이 아무 말없이 씨익 미소지었다.

그러고보니 그의 품 안이 불쑥하다.


“어라? 혹시···”


사백이십삼번이 품에서 커다란 나뭇잎에 쌓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토끼구이였다.


“어제 밤 혼자 산책 좀 나갔다 왔지”

“하지만 경비가 강화··· 아···!”


웅삼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암혼동의 경비가 강화된 것은 자신에게나 걸림돌이라는 것을.


반갑게 토끼구이를 뜯으려던 웅삼은 또 한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토끼구이를 받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자그마한 단약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마화단이다.


“일단은 마화단이 우선이다. 토끼구이는 그 다음에”


웅삼은 입을 쩝 다시며 가부좌를 틀었다.

허리를 쭉 피고, 눈을 감은 뒤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마화단을 입에 넣기 직전 눈을 살짝 뜨니,

소년이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가 참으로 참 보기좋다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은 그가 잘 알고 있을테니까.


구노인, 그리고 임풍 교두의 죽음.

암혼동 전체가 혼란에 빠졌을 때에도 웅삼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백이십삼번이 얘기해줬으니까.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강해지는 것임을.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른다.

웅삼은 눈을 감고 그 기운을 다스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저번에 마화단을 경험해보았음에도,

이번에 느껴지는 것은 그 기운의 세기가 무척 달랐다.


‘뭔가··· 뭔가 잘못됬어’


비틀-

강력한 기운에 그의 몸이 흔들릴 때,


“가만히. 나를 믿어라”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등에 와닿는 소년의 손바닥을 느꼈다.


작가의말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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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내력 시험 +2 24.09.16 493 19 14쪽
38 전생의 인연들 +2 24.09.15 610 22 14쪽
37 천무관 +2 24.09.14 603 22 14쪽
36 졸업 +2 24.09.13 618 22 14쪽
35 삼년 뒤 +2 24.09.12 694 24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737 21 14쪽
» 취조 +2 24.09.10 727 21 13쪽
32 군사(軍師) +2 24.09.09 742 21 13쪽
31 사도(司徒) +3 24.09.08 827 17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3 24.09.07 881 23 15쪽
29 약속 +2 24.09.06 906 20 12쪽
28 예감 +3 24.09.05 929 15 14쪽
27 발단 +2 24.09.04 950 15 13쪽
26 시비 +3 24.09.03 943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952 24 14쪽
24 환희 +3 24.09.01 1,007 20 12쪽
23 증명 +3 24.08.31 990 19 13쪽
22 질주 +2 24.08.30 988 20 12쪽
21 평가 +2 24.08.29 1,010 21 14쪽
20 씨앗 +3 24.08.28 1,027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032 19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009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7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5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4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4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7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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