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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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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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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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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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軍師)

DUMMY

임풍 교두가 죽었다는 소문은 훈련생들 사이에도 금방 퍼져나갔다.

사건 이후 정상적인 훈련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교관들이 술렁이니 아이들의 혼란도 극에 달했다.

오직 나만을 제외하고.


구노인을 위한 애도는 임풍을 죽이는 것으로 끝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외딴 공터에서 홀로 구슬땀을 흘리며 체력훈련을 하고 있는데,

십삼번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며 쫑알거렸다.


“본산에서 높은 사람이 내려왔대. 지금 교관들도 모두 한명 한명 조사를 받고 있다던데? 이러다가 이곳이 폐쇄되는 것 아닌지 몰라”


“...그럴리가”


“그나저나 너는 이 와중에 혼자서 훈련을 할 생각이 드냐? 이런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죽은게 아니잖아”


십삼번이 혀를 내둘렀다.


“...무시무시한 놈. 너처럼 강해지려면 감정도 없어야 하는 건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땀을 훔치며 그에게 손짓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이리 내려와. 한판 붙게”


십삼번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녀석의 팔은 나에게 부러진 뒤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계속 대나무를 고정시킨 상태였다.


“난 환자인데?”


“각법을 수련할거다. 서로 발만을 써서 상대하는거야. 이 정도면 할 수 있겠지?”


십삼번이 눈을 빛냈다.


“좋아. 재밌겠는걸”


녀석이 바위 위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두 팔이 다친 것은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로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두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그 반동을 이용하여 곧장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타닷–


“각오해야 할거다!”


성큼 몇 발자국 만에 그와 나의 공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가 각법이랄 것도 없이 긴 다리를 쭉 뻗었다.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날카롭고 예리한 공격이었다.


그와의 공간을 계산하여 딱 그만큼만 뒤로 물러났다가, 내밀어진 발이 회수되는 순간을 파악하여 파고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어느새 빠르게 회전하며 뒷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휭- 그의 뒤꿈치가 나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아래쪽으로 붙은 내가 축이 되는 발을 걷어찼지만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

어느새 무게 중심을 옮기고 연이어 다리를 휘두르는 녀석.

빙글 몸을 회전하는 것이 마치 곡예를 부리는 것만 같다.


‘재밌군’


주변에 지켜보는 이가 없으니, 녀석도 실력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붙고 있었다.

이것은- 저번에 처음 맞붙었을 때, 그 이상의 수준이다.

흥미로운 녀석.

이만한 녀석이 왜 암혼동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이곳의 교육을 마친 뒤에 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지도.


십삼번이 나에게 계속 붙어있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녀석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언젠가는 알아내야 할 테니까.


팟팟팟–


발과 발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녀석이 두 다리를 정신없이 연달아 뻗어냈다.

각법만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은 나에게는 꽤나 불리한 조건이다.

공간을 줄이는 것과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해내야 하니,

짧은 다리의 한계가 더 부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방법은 있는 법.

그의 연이은 공격을 발바닥으로 받아내며 공중으로 몸을 띄워올려 빙글 회전하니-


나의 뒤꿈치가 날아드는 곳에,

경악으로 동그랗게 눈을 뜬 십삼번 녀석의 얼굴이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녀석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어이!!!”


십칠번 덩치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리를 접고 땅에 사뿐히 착지했다.

십삼번이 몸을 굳힌 채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방금 나 진짜 저 세상으로 보내버릴려고···”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답했다.


“연습은 실전같이”


그 사이 정신없이 달려온 십칠번이 숨을 허덕이며 말했다.


“사백이십삼번, 여기 있었구나! 교관들이 널 찾고 있어”


“나를?”


“응. 조사를 받아야 한대”


의외였지만 예상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조사야 받으면 되는거지.

어차피 누가 조사를 하든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을테니.


땀을 닦아낸 천쪼가리를 십삼번에게 던졌다.

얼굴로 착 달라붙은 천을 십삼번이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



십삼번은 태연하게 조사를 받으러가는 꼬맹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멍청한 표정을 본 십칠번이 물었다.


“뭔 일 있어?”


“아냐. 아무것도”


사실 무슨 일이 있다.

일번을 제압했을 때는 제법이라 생각했고,

자신의 팔을 부러뜨렸을 때는 엄청난 괴물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니 완전히 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신의 어줍잖은 변명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각법만으로 겨룬다면 절대 질리가 없다고 생각했것만, 결론은 완벽한 패배.

그것도 자신의 모든 역량을 처음부터 모조리 쏟아부었음에도.


“저 녀석, 혹시 정말 교두를 죽인 범인은 아니겠지?”


그의 중얼거림에 십칠번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 아무리 쎄도, 어떻게 교두를 죽였을라고?”


“저 녀석은 진짜 가능할지도 몰라. 마음만 먹으면”


조금 전, 자신의 턱을 향해 쏘아지던 발길질.

그리고 어깨 너머 쏘아진 눈빛을 떠올린 십삼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암혼동 생활은 좀처럼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



교관들을 따라 임풍 교두의 집무실로 향했다.


웅성웅성 몰려있는 교관들은 모두 경직되어 있었고 표정도 좋지 않았다.

자신들의 수장을 잃었으니 충격에 휩쌓여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그들 모두가 유달리 더 조심스러웠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끼는 듯한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사람이 왔나보군’


아무리 하부조직이라 하더라도 책임자가 죽은 사건이니, 본산에서 즉시 조사관을 파견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왔는지는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구노인이든, 임풍교두이든,

그들이 죽는 것은 전생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 그대로 엎어져 있는 임풍 교두의 시신이었다.

의자에 앉은 채 시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뒤통수가 보였다.

교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도님. 사백이십삼번을 데려왔습니다”


‘사도?’


솔직히 조금 놀랐다.

꽤 높은 직급이다.

천마신교 본산에서 일하는 사무관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문 닫고 나가보게”


카랑카랑한 목소리.

생각보다 젊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전생에서 연이 있었음에 분명한데, 누구인지는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교관이 문을 닫고 나가자, 남은 것은 뒤통수 사내와 나, 그리고 임풍의 시체 뿐이었다.

한참동안 시체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빙글 돌아앉았다.


“.....!!!!!”


멍하니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정말 놀랐다.

생각보다 많이.


이 사내를 이곳에서,

그것도 이 시점에서 만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커다란 머리.

제멋대로 박혀있는 눈 코 입.

섬광같이 빛나는 눈빛.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다.


천마신교의 군사(軍師). 육영.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



전생에서의 그를 똑똑히 기억한다.


콧대는 높고, 할 말은 꼭 해야만 하는 성격인데다,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유달리 적이 많았다.

팔가(八家) 중 한 두 가문도 아니고 여러 가문과 공개적으로 마찰을 빚었음에도 어찌 어찌 끝까지 살아 남았다. 때문에 그가 문사로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군사의 지위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대(前代) 군사 허도가 교주에게 그를 다음 군사로 추천하며 한 말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였으니.

‘승진을 시켜서 높은 자리로 올려놓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곧 맞아 죽을 것만 같아서’ 라던가.

그만큼 그를 아끼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는 말이겠지.


그가 군사 자리에 오르기 전,

한창 세력을 부풀려가던 홍옥이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매우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육영은 쉽사리 홍옥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주지도 않았다.


홍옥을 대신해 따로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전까지 단 한번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각보다 흔쾌히 나를 만나주었다.


넌지시 대장을 따로 만나볼 것을 권해보았으나 그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범계. 자네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내야”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군요. 하지만 저희 대장은 더 흥미로운 분이십니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알고 있어. 그 유명한 홍옥을 내가 왜 모르겠나?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 그 인기가 대단하다지”


“그런데 만남조차 거부하시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글쎄. 그가 너무 아름다운 존재라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의 말문이 막혔다.


“나의 얼굴을 좀 보게. 이렇게 생겨먹은 내가 그 예쁘장한 사내의 옆에 서 있으면 어떻겠는가. 나의 못생김이 더 두드러지지 않겠는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나의 대답을 재촉했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이런 유형의 인물에게는 어떻게 대응해야 맞는 것일까.

머리를 굴리려다가, 그냥 솔직하게 내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글쎄요. 총관께서 그 누구 옆에 서 있다 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만”


푸하하하.

육영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다행히 내 솔직함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을 껄껄대며 웃던 그가 뚝 웃음을 그쳤다.

그 섬광같은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게. 그에게 전할지 말지는 범계, 그대가 판단해도 좋아. 나는 항상 그래왔듯,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니까”


“사실 나는 일전에 홍옥을 만난 적이 있어. 사정이 있어 잠시 천무관에 교관으로 간 적이 있었지. 전략과 전술에 관한 수업을 진행했었는데··· 매우 인상적인 아이였지. 똑똑하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그에게서 발견한 것은··· 거대한 욕망. 그것 뿐이었어”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가 개혁의 상징, 새 시대의 물결인 것처럼 이야기하더군. 하지만 내가 볼 땐 그 또한 다른 욕망덩어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입장을 바꾸어서, 만약 그가 암혼동 출신이 아니라 팔대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면 어떨까? 그 경우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그를 특별하다고 여길까?”


“사람들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 영웅적인 성장 과정, 그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성과를 바라보고 열광하지. 하지만 그 또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거나, 손잡지 말아야할 적에게 손을 내밀고, 때론 암살까지 해가며 원하는 바를 쟁취해내지. 내 말이 틀린가?”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그 어둠 속의 일들이 대부분 나를 통해 행해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본질은 욕망이야. 자신만을 위한 욕망.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니 틀릴 수도 있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는 진정으로 주변인이나 신교를 위하는 인물은 아니었어”


“그러니 나로서는 딱히 홍옥만을 더 응원하거나 편들 일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 내가 보기엔 결국 다 고만고만한 놈들이라 이 말일세”


조용히 그의 말을 곱씹는 나를 내버려 둔 채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당시 천마신교에서 홍옥이라는 존재를 진실로 꿰뚫어본 자는 오직 그 하나 뿐이라는 것을.


그의 이야기가 홍옥에게 전달될 일은 없었다.

그 뒤로 각자 서로의 위치에서 서로의 일을 해나갔을 뿐.


육영은 군사가 되었고,

홍옥은 마침내 다른 경쟁자를 제쳐내고 유일한 차기 교주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나의 팔이 잘리고, 홍옥에게 배신당해 내팽겨쳐진 것은 바로 그 뒤의 일이다.


그 뒤의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홍옥이 교주가 된 직후, 육영이 군사 자리에서 파면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파면이었을지, 아니면 스스로 물러난 것이었을지.


그가 그대로 있었다면 또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타고난 두뇌를 가진 그를 홍옥이 제대로 품을 수 있었다면,

무림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르니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내가 만들어낸 시체가 그대로 남겨져있는 임풍 교두의 집무실.


훗날 천마신교의 군사가 되는 사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두번째 첫만남.

그가 나에게 건넨 첫마디는 이러했다.


“임풍 교두. 네가 죽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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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천무관 +2 24.09.14 603 22 14쪽
36 졸업 +2 24.09.13 618 22 14쪽
35 삼년 뒤 +2 24.09.12 694 24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737 21 14쪽
33 취조 +2 24.09.10 727 21 13쪽
» 군사(軍師) +2 24.09.09 743 21 13쪽
31 사도(司徒) +3 24.09.08 827 17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3 24.09.07 881 23 15쪽
29 약속 +2 24.09.06 906 20 12쪽
28 예감 +3 24.09.05 930 15 14쪽
27 발단 +2 24.09.04 951 15 13쪽
26 시비 +3 24.09.03 943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953 24 14쪽
24 환희 +3 24.09.01 1,007 20 12쪽
23 증명 +3 24.08.31 990 19 13쪽
22 질주 +2 24.08.30 988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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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씨앗 +3 24.08.28 1,027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032 19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009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7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5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4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4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8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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