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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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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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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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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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만남

DUMMY

침을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칼이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아쉬운 대로 이것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해야할 일은 매우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일이니.


일혼의 시체를 바로 눕혔다.

창백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

다행히 얼굴 부위에는 딱히 눈에 띌만한 손상이 없었다.

그의 얼굴 가장자리 선을 따라 촘촘하게 침을 박아 넣었다.

얼굴과 목 선을 따라 작업하는 데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윤곽을 잡는 작업을 마친 뒤, 거죽 아래로 깊게 침을 찔러넣어 조심스럽게 얼굴 피부를 들어냈다.

인내와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다.

한참 동안 열중하고 있으려니 땀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인피면구(人皮面具).

지금 벗겨낸 것은 일혼의 얼굴이지만, 손질하기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얇게 떠낸 가죽이 완전히 분리되고 난 뒤, 밤 사이 새나 다른 들짐승이 낚아채지 않도록 잘 숨겨두었다. 이것은 재료에 불과할 뿐, 아직 제대로 된 인피면구가 갖춰지려면 멀었다.

건조와 재가공, 반영구화 시키는 과정에는 수많은 재료들, 그리고 후작업이 필요하다.

언제 어디서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갖춰두면 여러모로 좋은 수단이 될 터.


작업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밤의 한 중간이었다.

잠자리로 만들어 놓은 곳으로 돌아가니 덩치 조장이 아직도 잠못들고 눈을 꿈벅이고 있었다.


“왜 자지 않았지?”


“어떻게 잠들겠어? 넌 무엇을 하고 온거야?”


“알 것 없다”


그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무리 덩치가 좋다 하더라도 아직 십대 초반의 어린 나이다.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 했고,

죽음에 거의 한발자국 앞까지 다녀왔으며,

누군가 죽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리고 이곳은 깊은 산 속에 마련된 어설픈 잠자리이다.

암혼동의 어설픈 숙소가 그리워질 정도로.


“우리 조 녀석들은 뭐하고 있을까? 설마 우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자고 있는 것 아냐?”


동굴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으니 그럴리는 없다.

쓰레기 구덩이 옆의 흔적들을 보며 누군가가 격투를 벌인 것을, 끝내 구덩이로 떨어졌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인원을 점검하면 누가 함께 사라졌는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고.


“그 녀석은 정말··· 정말 우리를 죽이려고 한 것 맞지?”


“죽어도 싼 녀석이야. 취미가 살인이지. 뇌옥에서 만났을 땐 이미 다른 일급 녀석을 죽인 다음이었다고 하더군”


덩치 조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천마신교에는 저런 녀석들이 드글드글 한건가? 저런 놈들 사이에서 경쟁해야 하는거야?”


“도망치려면 도망쳐도 좋아”


“....!”


두려움이 가득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를 못본 것으로 이야기해두지. 아마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할거야. 따로 찾거나 추격하지는 않을거다”


손을 들어 유난히 별이 반짝이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 별을 따라서 약 보름 정도를 걸어가면 꽤 커다란 마을이 나올거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깨끗한 물 잘 챙겨마시고, 열매같은 것을 채집하거나 작은 동물같은 것들을 사냥할 수 있다면 버틸 수 있을거야”


덩치가 멍하니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다시 시선을 돌린 그가 물었다.


“너는?”


“나는 다시 돌아가야지”


“도대체 왜?”


덩치가 물었다.


“너는 왜 굳이 동굴로 돌아가려는거야? 내가 볼때 너는 이곳에 있을 녀석이 아니야. 말로는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이야기하지만, 결국 이곳은 그저 하급 무인을 키우는 곳이잖아. 너는 훨씬 더 대단하고, 이곳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이야기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이전 삶에서 홍옥이 나를 주목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다.


“목표한 것이 있으니까”


“그것이 뭔데?”


아직은 대답할 수 없다.

녀석은 나의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힘겹게 참아왔던 질문을 와르르 쏟아냈다.


“말해봐. 왜 너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거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거야? 도대체 뭘 목표로 하고 있길래?”


“나는 그냥 알아”


“어떻게? 나에게 말했잖아. 너 고작 열 살 아냐? 이게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


“그만. 여기까지”


싸늘한 내 말투에 덩치의 입이 비로소 다물어졌다.


“더이상 나에게 뭔가를 더 묻거나 하면 그냥 이곳에 버리고 가겠다. 죽일 수도 있고. 이건 농담이 아니야”

“선택해. 앞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따를지, 아니면 이곳에서 헤어질지”

“나는 해야할 것이 있어. 이 삶에서 내가 이뤄내야 할 목표가 있다고. 내가 알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너의 사소한 궁금증을 다 풀어주면서 움직일 수는 없어”


그저 인연이 닿았기에,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에 살렸을 뿐,

녀석을 반드시 품어야 할 의무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 제거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져야한다.

내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너무나도 멀고 험난하니까.


냉정한 나의 말에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한참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덩치녀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무림맹의 첩자같은 건가?”


이 녀석이 끝까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가 첩자면 굳이 너를 구하겠··· 휴. 됐다. 아무래도 너는···”


“아냐 아냐! 아니야! 농담이었다!”


덩치가 두 손을 황급히 휘젓더니,

그만 균형을 잃고 땅으로 꽈당, 떨어지고 말았다.

상처 가득한 몸에 꽤나 충격이 클텐데 나무를 잡고 벌떡 몸을 일으킨다.

역시 맷집 하나는 대단한 친구.


“고마워.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였어”

“너는 이미 나를 한번 살려주었지. 그것만으로도 사실 충분해”

“하지만 그것에 더하자면··· 아까도 이야기한 것 같지만, 너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단순히 아이들 뿐이 아니라 교관들도, 그리고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사람들과도 다른”

“크고 대단한 무언가”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 네가 첩자든 뭐든, 어떤 존재이든, 어떤 꿈을 꾸고 있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건 간에···”


녀석의 말은 두서가 없고 장황했다.

하지만 이어진 마지막 말은,


“나는 너를 따라갈거야. 그 앞에 어떤 것이 기다리든, 도망치지 않을거라고”


무언가 거대한 것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다.

홍옥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듯이.

녀석이 지금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내가 홍옥에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나뭇가지 위에 누워있는 나를 향해 녀석이 한 손을 내밀었다.

눈빛에 굳은 의지가 가득했다.


“내 이름은 웅삼이다”


그것이 녀석의 선택이었다.

내밀어진 손을 잡아끌어 나무 위로 오르게 도와주었다.


“범계. 내 이름이다”



#



며칠간 숲속에서의 생활이 이어졌다.


일혼의 시체는 일부러 짐승이 뜯어먹은 것처럼 훼손시켜놓았었는데,

다음날 보니 이미 몇몇 조각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얼굴 가죽을 벗겨낸 흔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왕 나온 김에 암혼동 주변 숲을 차근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전생에서는 이곳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한번 외출했으니 다음에는 더 쉽지 않겠는가.

숲에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게 있을지 모르니 잘 파악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울창했고, 갖가지 생명이 풍성하게 넘쳐 흘렀다.

나무가지를 다듬어 물고기를 사냥하고, 새알을 채집하고,

덫을 만들어 작은 토끼나 설치류 등을 잡아들였다.

웅삼은 다행히 회복이 빨랐고, 이런 저런 잔기술을 배우는 것은 더 빨랐다.


녀석은 약속한 대로,

내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배우는 데 최선을 다할 뿐.

의욕이 넘치는 녀석 덕분에 먹을 것은 끊김이 없었다.


“이야··· 이대로 그냥 산에서 살아도 되겠어. 동굴에서보다 훨씬 더 잘먹고 있는 것 같은데?”


웅삼이 불쑥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담에는 조금 더 큰 사냥감에 도전해볼까?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것은 못잡으려나?”


“도구만 잘 챙겨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사실 일혼에게서 빼앗은 밧줄이 있으니, 올가미를 이용하면 커다란 짐승도 충분히 사냥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은 암혼동과 멀지 않은 위치. 언제든 다른 무인들과 맞닥드릴 가능성을 생각해야하니, 너무 거창하게 일을 벌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다음에 또 나오자고? 그 구덩이에서 또 떨어지고 싶지는 않다”


웅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돌아가보는게 좋지 않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마화단 복용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슬슬 준비를 해야할 시간.


숲에 머물렀던 흔적들을 정리했다.

마차가 지나다닌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해내고, 그것을 따라가다보니 암혼동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말로는 쉬운 일이지만, 이곳은 까마득한 깊은 산 속.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는 첩첩산중이다. 그 높은 곳에서 추락하고도 둘 다 멀쩡히 살아남은 것도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거니와, 특히 이 거대한 산맥 한 귀퉁이에 위치한 암혼동을 제대로 찾아낸다는 것은 꼬맹이들의 재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때문에 나는 우리의 행색을 더 초라하고 거지같이 만드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끼니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듯한 모습.

이제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암혼동 입구에 쓰러지는 일만 남겨놓았을 때였다.


[잠깐]


나의 수신호에 웅삼이 발걸음을 멈췄다.

숲 속에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암혼동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입구를 지키던 무인들과 살가운 인사를 나누는 아이.

암혼동이 마치 자기 집인 것마냥 편안하고 즐거운 모습.


아무리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못 알아 볼 수 없는 인물.


홍옥이었다.



#



[누구지?]


웅삼이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손짓을 보내며 가만히 홍옥을 바라보았다.


회귀한 뒤 벌써 두번째 만남이다.

이곳 암혼동에 처음 들어온 날 밤 그를 만났으니, 마지막으로 그를 마주한 것으로부터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

천무관의 수련생임을 상징하는 단정한 무복을 차려입었고, 하얗고 고운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다. 마치 여인처럼 붉은 입술에는 옅은 미소를 띄었고, 눈은 생기로 가득차 반짝반짝 빛났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무인들도 저절로 미소를 띄게 만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건만,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당황, 불신,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거칠게 타올랐다면,

지금은 보다 냉철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사실 본래의 나다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마음 속에 드는 의문은 단 하나.

그가 이렇게 자주 이곳을 들락날락할 이유가 있을까.


‘임풍 교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이다. 여러모로 꽤나 수완이 좋은 무인이자 행정가이며, 암혼동을 오랜기간 맡으면서 수많은 훈련생들의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니 단순한 무력을 떠나 생각하더라도 임풍 교두의 가치는 홍옥에게 매우 높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이렇게 수 번을 들락날락할 만한 가치까지 임풍에게 있다고 볼 수 없었다.

한창 천무관 수련에만 집중해야할 시기일텐데, 굳이 없는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그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더 치밀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더욱.


‘혹시···’


한가지 가능성이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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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도(司徒) +3 24.09.08 827 1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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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예감 +3 24.09.05 931 15 14쪽
27 발단 +2 24.09.04 952 15 13쪽
26 시비 +3 24.09.03 944 2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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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환희 +3 24.09.01 1,007 20 12쪽
23 증명 +3 24.08.31 990 19 13쪽
22 질주 +2 24.08.30 989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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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실험 +3 24.08.27 1,032 19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009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8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6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6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5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8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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