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최근연재일 :
2024.09.17 17:05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40,596
추천수 :
821
글자수 :
235,932

작성
24.09.06 17:10
조회
907
추천
20
글자
12쪽

약속

DUMMY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다.

그저 구노인의 몸이 좋지 않거나, 다른 곳으로 외출을 나간 것일지도.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구노인의 약방이 문을 닫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번 생이든 저번 생이든, 어떤 이유가 있었던 간에.


저번에 보았던 구노인의 어두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임풍 교두에게 지나치게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암혼동 입구 근처에 몸을 숨긴 채 웅삼을 기다렸다.

마음이 급하다고 혼자 들어가버리면 녀석은 오갈 데 없이 이곳에 남겨지게 된다.

들키지 않고 혼자서 입구를 돌파하는 것은 아직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


녀석을 기다리며 호흡을 고르는데, 꾸벅 꾸벅 졸며 입구를 지키던 무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졸린 눈을 비비며 동굴 안쪽에서 나온 누군가와 인사한다.


“여어-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동 틀려면 아직 멀었는데?”


동굴에서 나타난 것은 임풍 교두의 직속 무인이었다. 횃불에 어른거리며 비추는 그의 얼굴 또한 졸음이 가득했다.


“몰라. 교두가 새벽부터 달달 볶아서. 본산에 서찰을 전달해야 한다더군”


“본산에? 무슨 내용인데 이 밤부터 난리야?”


“모르겠어. 요즘 그 양반, 완전히 정신이 나가있잖아”


“이거 궁금해지는데? 우리 같이 한번 슬쩍 보는 건 어떨까?”


“쓰읍– 그러다가 들키면 경을 치려고?”


“에헤이- 짜게 굴지 말고 한번 좀 보자!”


실랑이 끝에 결국 서찰을 수호해내는데 성공한 무인이 잰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이 시점에 본산에 보내는 서찰이라.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약방 문을 닫은 것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서찰의 내용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때마침 웅삼이 헥헥거리며 내가 은신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헉··· 헉···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고 가면···”


“잠시. 이곳을 지키고 있어라”


“또?”


당황한 표정의 웅삼을 뒤로 한 채, 무인을 따라 몸을 날렸다.



#



“에이 썅. 이 밤중에 이게 왠 고생이야”


어두운 숲길을 걷던 무인은 툴툴대며 연신 욕을 해댔다.

임풍 교두의 성격이 급한 것은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오밤중에 두들겨 깨워 서신을 보낼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지금 떠나야 본산에 아침에 딱 맞춰 도착할 것이 아니냐!


이게 꿈이야 생시야 눈을 껌벅이는 자신에게, 험상궂은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외치던 교두. 이제 자신은 곧 크게 승진할 것이라며, 자신과 함께 고생한 그를 본산으로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본산이 뭐 아무나 가는 곳인가?”


교두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챙겨준다고 하니 기분은 좋았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부스럭-


뒤쪽에서 들려오는 묘한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산짐승?’


잠시 멈춰서서 주변을 살폈지만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별 일 아니라 생각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부스럭-


이번에는 그의 왼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무인은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비록 암혼동 같은 곳에 쳐박힌 신세이긴 하지만, 어지간한 산짐승 정도는 단 칼에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것이 커다란 곰이나 호랑이같은 맹수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빛내던 무인은,


“이야아아아압!!!”


갑작스레 칼을 번쩍 뽑아들며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


웬만한 짐승들은- 심지어 곰과 호랑이같은 맹수라 하더라도, 방금 전의 기세와 기합에 놀라 후다닥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잘못 들은건가?”


무인은 고개를 갸우뚱한 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뽑아든 칼은 그대로 손에 쥔 채였다.


하지만 또 다시 이어진 부스럭 소리.

무인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누군가 있다.

자신을 노리고 있다.

도대체 왜? 누가?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식은땀을 흘리며 자세를 낮췄다.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며 사방을 노려보았다.


“누구냐? 나와라!!!”


그러나 달빛에 자신의 칼날만이 번뜩일 뿐,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보아도 자신 외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때, 무인은 미세하게 저 쪽 수풀 안쪽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


정체모를 상대방이 숨어있는 위치를 확신했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았다.

당황한 척 몸의 방향을 이리 저리 바꿔가며 서서히 수풀 쪽으로 접근했다.


수풀이 자신의 간격 안에 들어오기까지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마지막 한 발자국···


타닷!!!!


쾌(快).

몸을 비틀며 칼을 가로로 그었다.

자신이 한평생 휘두른 칼 중에 그 어떤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의 칼이 수풀을 대번에 두 쪽 내었지만,

허무하게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커···커컥···”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자신의 명치를 파고든 주먹.

숨이 멎어오는 충격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땅으로 털썩 쓰러지는 그의 시야에 흐릿하게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공격한 이를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누군지는 알고 죽어야 할 것 아닌가.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녀석을 알아본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녀석이다’


창백한 얼굴, 서늘한 눈빛.

검은색 무복.

아는 얼굴이다.


‘일급 사번, 그 녀석이 살아있었어’


무인의 의식이 끊겼다.



#



얼굴을 덮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어 품에 넣었다.


단지 서찰을 확인하기 위해 대뜸 교관을 죽일 수는 없다.

그가 의식을 잃기 전 희미하게 일혼의 얼굴을 알아본 듯 했으니 그정도면 충분하다.

자신을 급습한 것이 일혼이라고 확신하든, 다른 무인들에게 모지리 취급을 받든 그것은 더이상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지금 궁금한 것은 임풍이 보냈다는 서찰의 내용.

별 일이 아니라면 좋을 것이고,

만약 아니라면···


서찰을 꺼내 조심스레 봉인을 뜯었다.

혹시 다시 봉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달빛에 비추어 서찰을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찰은 내가 염려했던 내용을 모두 담고 있었다.


마화단.

구노인.

나.

그리고 오급 아이들···


촥-!!!


분노한 나의 손길에 서찰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



- 재능이 없는 아이들을 개조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 마화단을 통해 혈맥의 개통 뿐만 아니라 내공까지 빠르게 축적한 사례가 있다.

- 몇차례 더 시험을 거쳐야 하겠지만, 실험대상으로 쓸 수 있는 아이들이 이곳 암혼동에 수백이다.

- 마화단을 더 지원해준다면, 그리고 새로이 약방을 운영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준다면 확실히 성과를 낼 자신이 있다.


임풍 교두가 본산의 누군가에게 쓴 서찰의 내용이다.

그 서찰이 불러올 결과는 뻔했다.


파국(破局).


구노인.

암혼동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내가 걷고자 하는 길까지.


임풍 교두가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것은 나 또한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공을 세우고 싶은 욕망, 이곳 암혼동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

그의 욕심과 욕망을 적절히 자극함으로써, 나는 빠른 시기에 혈맥을 틔우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사태까지 불러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들어가 있어”


암혼동에 돌아온 뒤, 웅삼을 그의 숙소로 먼저 돌려보냈다.


“또 뭘 하려고? 무슨 일이 있는거지? 그렇지?”


아무런 설명없는 나에게 그가 물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곳 암혼동에 많은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어떤 변화? 구노인과 관련이 있는건가?”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지”


“꼭 너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일이야? 이번에도 내가 도울 수 있는건 없는건가?”


침묵이 대답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웅삼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의 편이라는 것을”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 나의 편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더 강해져야만 한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내가 뒤를 염려하고 돌아보는 일 없이, 오직 앞만 바라보고 달려갈 수 있도록.

그러니 지금은 그가 오직 수련에만 집중하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었다.


역시 약방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담을 넘어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사방이 온통 어지럽혀져있을 뿐 그 어디에도 구노인의 흔적은 없었다.

약방을 빠져나왔다.

짐작가는 곳이 있었다.


한참을 걸어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기관장치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뇌옥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울퉁불퉁한 바위, 습기가 찬 바닥.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만한 좁디좁은 통로를 지나자

또 다시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는 작은 동굴들과 창살이 나타났다.


아무 기척도 없이 텅 비어있는 듯 하지만,

맨 구석 작은 동굴의 창살이 굳게 닫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구노인의 초라한 몸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창살은 나에게 어떤 방해도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구노인을 조심스레 잡아 끌어 바르게 눕혔다.


아직 살아있다.


“구노인. 내가 왔소”


허덕이는 숨소리와 함께 그가 눈을 힘겹게 떴다.

초점없는 눈동자로 나를 확인한 그가 나지막하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귀를 가까이 가져가보았다.


“감히 구노인이라니. 어린노무시끼가···”


푸흐흐 웃음이 나왔지만, 내 심경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기운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미약해져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꺼져가는 노인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을 터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구노인이 힘겹게 답했다.


“너에게 썼던 마화단을 다시 만들어내라고 협박하더군. 계속 거부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어. 그것에 한 대 얻어맞았을 뿐인데··· 그 한 방에 바보같이 이 꼴이 되고 말았지”


임풍 수준의 무인이 분노에 차 휘두르는 주먹이라면, 구노인같은 쇠약한 노인에게는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아무런 치료도 없이 이곳 뇌옥에 쳐박아놓았으니, 그대로 죽여버릴 심산임에 틀림없었다.


“온 약방을 뒤져 내가 숨겨놨던 제조법을 찾아냈어. 의기양양하더군. 이것만 있으면 나 따위는 없어도 된다며···”


“바보같은 일이야.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성공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러번 강조했지. 하지만 그는 욕심에 눈과 귀가 멀었어”


그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져갔다.

전생에서는 분명 수년 뒤까지 멀쩡히 살아있던 구노인이다.

그러니 그가 지금 목숨을 잃는 것은, 오롯이 내가 바꾸고 있는 현재 때문일 것이다.

일혼의 목숨을 빼앗은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해야할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동안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구노인이었다.


묻고 싶은게 있었다.

네 꿈이 무엇이냐?


생뚱맞은 질문이다.

그에게 답했다.


나의 꿈은 높은 곳에 있소.


높다니. 얼마나 높은 곳을 이야기 하는 거지?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무맹랑하구나. 하지만 좋은 꿈이다.

너 다운 꿈이다.


내가 홍옥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녀석이나 너나 비슷해 보이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달라.

너는 근본적으로 따스한 놈이야.


나는 괜찮다.

행여 조금이라도 자책하지 마라.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하지마라.

큰 꿈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때론 비정해져야 하는 법이야.


그의 눈이 무언가를 꿈꾸기라도 하듯 몽롱하게 변했다.

단단히 붙들었던 손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마지막 내쉰 숨과 함께, 그의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답했다.


고맙소.

당신의 말을 따를 생각이오.

그러니 한번 지켜보시오.


그의 뜨여진 눈을 닫아주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나는

임풍 교두의 거처로 향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교주를 삼키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각은 오후 5시 5분입니다. 24.08.30 785 0 -
40 의지 NEW +2 9시간 전 307 18 12쪽
39 내력 시험 +2 24.09.16 493 19 14쪽
38 전생의 인연들 +2 24.09.15 610 22 14쪽
37 천무관 +2 24.09.14 603 22 14쪽
36 졸업 +2 24.09.13 618 22 14쪽
35 삼년 뒤 +2 24.09.12 694 24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738 21 14쪽
33 취조 +2 24.09.10 727 21 13쪽
32 군사(軍師) +2 24.09.09 743 21 13쪽
31 사도(司徒) +3 24.09.08 828 17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3 24.09.07 882 23 15쪽
» 약속 +2 24.09.06 908 20 12쪽
28 예감 +3 24.09.05 932 15 14쪽
27 발단 +2 24.09.04 952 15 13쪽
26 시비 +3 24.09.03 944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953 24 14쪽
24 환희 +3 24.09.01 1,007 20 12쪽
23 증명 +3 24.08.31 990 19 13쪽
22 질주 +2 24.08.30 989 20 12쪽
21 평가 +2 24.08.29 1,010 21 14쪽
20 씨앗 +3 24.08.28 1,028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033 19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010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8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6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6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6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9 17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