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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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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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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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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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DUMMY


첫번째 삶에서는 당연하게도, 이곳 암혼동을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훈련을 버티지 못한 몇몇 녀석들이 무모한 시도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금새 붙잡혀 반시체가 될 때까지 두들겨맞거나, 아니면 정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었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다짜고짜 움직이기보단 어느 정도 동굴을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힌 다음,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몇몇 아이들의 그르렁 그르렁 코고는 소리일 뿐.


오등급 아이들이 머무는 숙소를 빠져나와 동굴 속을 홀로 거닐었다. 지키는 무인은 아무도 없다. 어차피 출구 한 군데만 지키면 되니, 동굴 안의 방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훈련생들간에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넓은 동굴 이곳 저곳을 조사하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드넓은 동굴의 천장에는 자연광이 들어오는 자그마한 틈이 곳곳에 있다. 워낙 작은 틈이기에 몸을 빼낼 생각을 하기에는 어려워보이지만, 지금처럼 작은 아이의 몸이라면 도전해볼만한 구멍이 몇 군데 있었다. 동굴 벽을 지지하기 위해 받쳐놓은 기둥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천장까지 올라가기만 한다면 방법이 있을 것처럼 보였다.


동굴에서 나오는 각종 오물들을 버리는 구멍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깊고 낭떠러지같은 곳이기 때문에, 지금의 몸으로는 오히려 위험부담이 더 컸다.


이곳에 들어올 때 이용했던 출입구. 그곳은 의외로 무인들 두셋 정도가 교대로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그 입구에 달하기까지 무려 이백개에 달하는 좁고 긴 계단을 올라가야하는 것이 문제이다. 다른 출구를 찾지 못했을 때는 부득이 그곳을 돌파할 수 밖엔 없다.


어떤 방식으로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면 며칠 정도가 더 걸릴 것 같았다.


널빤지 숙소로 거의 돌아왔을 때였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생각한 이 밤, 동굴 속을 산책하듯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또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나고 있는 말소리. 우뚝 멈춰서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교두님. 이곳은 여전하군요. 이번 기수도 교육 방식은 모두 동일한가보죠?”


“너희 때랑 딱히 달라질게 뭐가 있겠느냐? 한군데 때려박고 열심히 굴리다보면, 어디선가 특출난 재능을 갖춘 녀석이 튀어나오게 마련이지. 바로 너처럼 말이야”


하하하. 소년의 웃음소리가 밝게 울려퍼졌다.

이곳, 암혼동에는 어울리지 않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이곳을 다시 찾아온 녀석은 네 녀석이 처음이다. 내 교두 인생을 통틀어서 말이다”


“그럴리가요? 교두님께 감사인사를 하러 돌아왔던 훈련생이 지금껏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까?”


“천만에. 네 녀석이 단연코 처음이다. 아마 마지막이기도 하겠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네가 특이한 것이다”


기척을 숨긴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괄괄한 성인의 목소리는 이곳 암혼동을 총괄하고 있는 교두 임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 소년은 누구일까. 듣자하니 이곳 암혼동의 기초 교육을 이미 마친 녀석같은데, 굳이 이 오밤중에 임풍 교두를 찾아온 것을 보니 보통 녀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삭막한 곳에서 이런 친화력이라니. 교두의 인척이라도 되는 것일까.


“천무관(天武館)에서의 수련은 어떠하냐?”


“견제가 심합니다. 아무래도 저의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그럴 것이다. 천무관이라면 교에서 날고 긴다 하는 녀석들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 아니냐? 팔대가문 출신만 해도 절반 이상이겠지. 녀석들은 어렸을 때부터 온갖 영약을 다 쳐먹었으니,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몇대 두들겨 맞고는 얌전해지는 것은 이곳이나 그곳이나 똑같더군요”


아이와 어른이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나의 손이 떨려왔다.

마치 몸 전체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


암혼동 출신으로 천무관이라.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앳되긴 하지만,

이 목소리는.

그리고 이 말투는···


“교두님. 이곳에는 얼마나 계실 예정입니까? 교두님 같은 분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음?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네가 어려서 뭘 잘 모르나본데, 이곳 암혼동의 교두자리도 은근히 꿀보직이다. 이 자리를 눈 독 들이는 녀석들도 많다고”


“하지만 일선이라 보기에는 거리가 있지요”


“......”


“교두님. 언젠가 제가 높이 올라가면 말입니다. 제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저를 어릴 때부터 보아왔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요”


“푸핫!”


임풍 교두가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 미친 놈. 설마 너, 나를 꼬시려 온 것이냐? 네 놈 나이가 도대체 몇이냐?”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얼마나 높이 바라보느냐가 중요하지요”


높이 바라본다.

가슴이 울컥 해오는 말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말.


나도 모르게 한걸음 발자국을 내딛어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얼굴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기 위해.


“누구냐!”


인기척을 느낀 임풍 교두가 고개를 훽 돌렸다.

헐렁헐렁한 잿빛 무복을 본 임풍 교두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훈련생이었군. 왜 이 밤중에 돌아다니는 거지? 함부로 돌아다니면 엄벌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도대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 거냐?”


그가 뭐라하든 나의 시선은 소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대장이자 나의 원수,

먼 미래의 마교 교주,

홍옥이었다.



#



끓는 피가 질주한다.

쾅쾅거리는 소리가 머리를 때렸다.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해냈다.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밑바닥 출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아름다운 외모.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소년.

가슴에는 천마신교의 대표적인 인재 양성기관인 천무관을 상징하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고, 오른편에는 검을 차고 있는 것이 어엿한 무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어리다.

아직 한참 어렸다.

내가 전생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보다.


고작해야 열 서너살 정도 되었을까.

아직 완성되어있지 않은 무인이고, 열화장을 익히기 전의 홍옥이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젓가락을 부러뜨리듯이 가볍게 죽일 수 있을만한 상태였다.

마음 속에 살심이 요동쳤다.


죽이자.

죽여야 한다.


하지만 문득 내 자신의 몸 또한 한없이 어리다는 것을 떠올렸다.

덩치 조장 같은 녀석을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게다가 그 옆에 있는 임풍 교두라는 존재.

비록 이곳 암혼동의 교두 자리에만 수년째 머물고 있지만, 그의 실력 또한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다. 나중에는 실제로 홍옥의 수하가 되어 수년간 활약했다고 들었다. 비록 내가 홍옥에게 합류하기 직전 목숨을 잃긴 했지만.

그나저나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대던 그 노력은 이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었던 것인가.


“네 이놈! 내가 묻지 않았느냐?”


돌풍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임풍이 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거친 그의 손아귀로 우악스럽게 내 몸을 압박한다.


“교두님. 그냥 놔두시지요. 저희가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린 홍옥이 임풍 교두를 말렸다.

임풍은 마치 말 잘 듣는 수하처럼 더이상 나를 압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 뼈를 부숴버릴듯이.


아무런 준비가 안된 상태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작전은 보류한다.

일단은.


얼굴 가득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꼬았다.


“팔이 욱신거려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혹시 의원이 있을까 하여···”


그제서야 내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발견한 임풍이 얼굴을 구겼다.


“들어올 때부터 이랬나? 팔이 이 지경인데 어떻게 등급판정을 통과했지? 교관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게야?”


지금 나의 대답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 곳을 벗어나는 경우의 수가 생긴다. 등급외 판정을 받고 이곳 동굴을 벗어나는 것이다. 하인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직종으로 빠진다면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아까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습니다. 조장이 되보려고 싸우다가 어깨를 삐끗했는데···”


나를 차근히 살피던 임풍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침이 되면 바로 약방 노인네에게 가볼 수 있도록. 며칠 내로 호전이 되지 않을 경우엔 등급외 판정을 받은 녀석들이 가는 곳으로 쫓아내겠다”


“예”


얌전히 머리를 조아리자, 유심히 나를 바라보던 홍옥이 예의 그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눈빛을 가졌더군요. 그냥 허드렛일이나 시키기에는 아까워보입니다. 혹시 압니까? 이 친구도 교두님 밑에서 숨겨있던 재능을 꽃피울지도 모르지요”


“너는 참···”


듣는 이 모두를 기분좋게 하는 화법.

그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한 과거가 아니었다면, 저 말에 홀딱 넘어가 뜬 눈으로 밤을 세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면경에 나의 눈빛을 몇번씩이나 비춰보며 말이다.


그의 아부에 기분이 좋아진 임풍이 헤벌쭉 웃음지었다.

홍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군?”


삐쭉.

살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수십년간 수없이 반복되었던 수련을 무용지물로 만들만큼 거대한 살심이.


어쩌면 내가 과거로 돌아올 때,

이 녀석도 함께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니까.

이 녀석이 굳이 오늘 이곳을 찾은 것은,

내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소리장도(笑裏藏刀).

슬쩍 웃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품 안에는 조금 전 임풍에게서 훔쳐낸 단검을 감춘 채.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쩌면 전생의 인연이 닿아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뭐? 전생?”


임풍과 홍옥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지더니, 곧 푸하하 떠들썩한 웃음을 터뜨렸다. 곤히 잠들어있는 훈련생들을 깨우지 않을까 걱정될만큼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꼬마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입을 번드르르하게 놀리는구나. 홍옥, 이번에는 네가 당한 것으로 해야겠다”


나는 홍옥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만약 그 또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돌아온 것이라면, 조금 전 나의 말에 반응을 안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내가 너를 기억하마”


“교육생에게 무슨 이름이 있어? 네 번호표나 내놔봐라”


임풍이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가슴 속의 나무패를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사백이십삼번··· 오급이로군”


홍옥은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를 오랜 세월 보아왔던 나는 알 수 있었다.


명백히 실망하는 표정.

이급이나 삼급도 아닌 오급 따위, 영원히 자신에게 도움될 일은 없다고 생각하겠지.


무슨 충동인지 모르겠지만, 불쑥 그에게 나의 이름을 밝혔다.

본디 이 시점에는 당연히 없었을 나의 이름을.


“범계(汎界)”


“응?”


“범계입니다. 저의 본 이름은”


임풍이 크게 콧바람을 냈다.

이곳에 들어올만큼 궁벽했던 처지의 아이가 거창한 이름까지 있는 것이 황당한 모양이었다.


“특이한 이름이군. 영역을 넘나드는 자라···”


내 이름을 중얼거리던 홍옥이 물었다.


“부모가 지어줄 수 있는 이름은 아닌 것 같아. 따로 모시던 스승이나 주인이 있었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이 이름을 지어준 이는 너에게서 무궁한 가능성을 보았던 모양이야”



#



그렇다. 그랬다.

이 이름은 이전 삶에서 그대, 홍옥이

나에게 지어주었던 이름이었다.


홍옥과 임풍이 떠나고,

나는 조용히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 뒤로도 난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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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전생의 인연들 +3 24.09.15 739 23 14쪽
37 천무관 +2 24.09.14 716 23 14쪽
36 졸업 +3 24.09.13 720 23 14쪽
35 삼년 뒤 +3 24.09.12 800 25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838 22 14쪽
33 취조 +3 24.09.10 822 23 13쪽
32 군사(軍師) +3 24.09.09 837 23 13쪽
31 사도(司徒) +4 24.09.08 925 19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4 24.09.07 980 25 15쪽
29 약속 +3 24.09.06 1,001 22 12쪽
28 예감 +3 24.09.05 1,027 16 14쪽
27 발단 +2 24.09.04 1,044 16 13쪽
26 시비 +3 24.09.03 1,038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1,052 24 14쪽
24 환희 +3 24.09.01 1,107 21 12쪽
23 증명 +3 24.08.31 1,084 19 13쪽
22 질주 +2 24.08.30 1,085 20 12쪽
21 평가 +2 24.08.29 1,106 21 14쪽
20 씨앗 +3 24.08.28 1,125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127 20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108 21 13쪽
17 수색 +3 24.08.25 1,113 19 14쪽
16 목표 +3 24.08.24 1,131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165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156 22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188 2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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