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캐스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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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릉 – 심연의 어둠에서 내리치는 번개 한 줄기.
거대한 감시원 청사 건물을 가리키듯 뻗치다 사라진다.
건물 내부, 영혼 없는 얼굴로 앞에 놓인 감시용 모니터들을 멍하니 보고 있는 검은 머리 남자.
모든 인간들을 감시해 완전무결의 사회를 만드는 미래의 SF 세계관 속.
감시실 직원인 그의 이름은 김주헌이다.
한 구석의 모니터 화면이 잠시 검어지더니 로딩 창이 뜬다.
오류가 난 건지, 삭제되는 중인 건지.
확인을 위해 김주헌이 마우스에 손을 올린다.
고개를 까딱하고는 삭제되기 전 파일을 복구해본다.
딸깍-
마치 눌러서는 안 될 버튼처럼 손가락 마디 근육이 뻐근해지는 것 같은데.
복구된 감시 카메라 화면 속에서 갑자기 팍 – 튀기는 검붉은 피.
뒤로 들리는 카랑카랑한 여성의 비명.
화들짝 놀란 김주헌이 숨을 거칠게 들이쉰다.
“뭐지?”
뒤에서는 검은 수트를 입은 상사가 터벅터벅 다가온다.
무거운 발소리에, 김주헌은 얼른 음소거 후 모니터 화면을 끈다.
“오셨습니까.”
자연스럽게 일어난 김주헌이 허리를 숙였다.
“어. 상부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한 자료가 하나 있는데, 혹시 확인했나?”
김주헌은 조금 전의 영상이 잠깐 떠올랐음에도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인 못 했습니다.”
“그래? 알아서 지워질 거긴 한데, 혹시 확인하면 건들지 말고 완전히 삭제 시켜.”
“네.”
“괜히 들춰보지 말고, 별거 없다.”
“알겠습니다.”
말은 순응했지만, 의심스럽다.
지금껏 의심스러운 순간들은 많았다.
몇몇 자료들이 원인 모르게 삭제되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확인했다.
물론, 그것에 의문을 갖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김주헌의 의무였지만.
‘감시자’는 그런 자리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남다른 호기심이 타올랐다.
‘분명 피였어. 비명이었고.’
상사가 감시실에서 나간 후, 김주헌은 혼자서 삭제된 파일을 복구해본다.
삭제된 자료 속에는 얼마 전 사망한 중년의 유명 여배우 선가희가 있다.
수많은 검은 복면들에 의해 그녀가 처참하게 끌려간다.
‘어디로 가는 거지?’
납치된 그녀의 행적이 담긴 감시 자료를 죄다 틀어본다.
끌려간 곳은 어느 대저택.
선가희는 발악하며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누군가에 의해 목이 졸린다.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저항하고 발악하지만...
탕 -
총소리가 나며 피가 화면에 튀긴다.
김주헌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살인사건이잖아. 그런데 이걸 은폐한다?’
여태 흘려보낸 많은 삭제 파일들에 의문이 불어난다.
왜냐면...
선가희, 그 여배우의 사인은 얼마 전 자살로 밝혀졌었으니까.
심지어 자살하기 직전의 영상이 나돌았었고 유서도 발견되었기에.
대중들은 모두 숙연히 받아들이며 아름다웠던 그녀를 추모했었다.
그게... 조작된 영상이었다?
평소 정의감은 없는 김주헌이나, 본능인지, 그녀를 추적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혈류가 꿈틀꿈틀 뜨겁게 꿀렁인다.
그녀는 왜 죽었는가.
왜 진실은 묻혀지는가.
그녀의 세월이 담긴 파일들을 전부 복원시켜 살피다가,
“씨발.”
아주 오래전, 그녀가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생아가 김주헌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몰래 후원하던 보육원도 김주헌이 살던 곳이었다.
프로그램으로 유전자를 대조하자, ‘99.9%’가 나온다.
혼돈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고아라 믿고 살아온 가치관이 부정되는 순간.
TV만 틀어도 나오는 선가희가 내 어머니라고?
비참하고 허무하게 살해당한 뒤 거짓으로 포장되었다고?
김주헌의 시야는 핏빛으로 물들었고, 그는 돌아버렸다.
내게 엄마라는 존재가 있었고,
그녀는 유명한 여배우였으며,
살해당했다.
난 그녀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니. 유일했던 아들.
그녀가 마지막으로 외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이때부터 그의 반항적인 비밀 행보가 시작된다.
우선 삭제된 파일들을 모두 복원시킨 김주헌은 감시자 윗선들의 민낯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모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살인과 은폐를 서슴지 않았다.
맨 꼭대기 층에는 무슨 이유인지 끔찍한 고문도 자행되는 상황.
자신의 엄마, 선가희를 죽음으로 이끈 주축을 찾아야 한다.
이 감시 청사에서 끔찍하게 더러운 냄새가 풍기고 있다.
*
감시자 윗선의 회의장.
김주헌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회의장에 잠입한다.
가면을 쓴 상부 인간들 사이, 자신도 똑같은 가면을 쓴 김주헌.
독가스가 나오는 장치를 들고 협박을 시작한다.
연녹색 독가스로 물들어가는 매케한 회의장에서 김주헌의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선가희의 죽음에 관련된 이를 찾는다.”
무채색의 삶 속,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김주헌은 뵈는 것이 없다.
직선의 길로, 엄마 선가희의 진실을 쫓기 시작한다.
상부의 비밀회의에는 진실 은폐의 협력자들이 가득했다.
“살려주세요... 집에 애 둘이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저, 저희도 지시를 받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너 누구야!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애원하고, 남 탓하고, 되려 김주헌을 협박하는 이들.
모두 선가희의 죽음을 묻고는, 자신만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자비?
그런 건 신 정도는 되어야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것.
그는 감시실의 일개 직원에 불과했다.
살해당한 엄마를 위해 알량한 복수심을 품은 인간일 뿐이다.
김주헌은 회의장에서 윗선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그리고 자신의 기록을 삭제한다.
감시자였던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었으니까.
그들이 했던 짓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테러를 은폐했다.
공공연한 테러였다.
이후 몸을 숨긴 김주헌은 비밀 조직, 시크릿 단으로 향한다.
신분이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을 이끌던 여장부, 한비도가 김주헌을 가소롭게 대한다.
“정부의 개로 살던 감시자가 여길 와서 도움을 청해? 간도 크네.”
“난 정부 감시실의 내부 조직 구조와 활동 매커니즘을 알고 있어.”
김주헌과의 첫 대면에서 한비도는 부정적이었으나, 이내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럼 우리가 얼씨구나- 하면서 좋다고 믿을 것 같아? 여긴 아무도 믿지 않아.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맡긴다는 것과 같고, 목숨을 남에게 맡긴다는 건 죽고 싶다는 거지.”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힘이 필요한 거다.”
“힘? 힘은 분노가 아니야.”
한비도는 묘한 눈살로 김주헌의 안광을 꿰뚫었다.
“최근에 터진 감시실 테러. 범인이 너구나?”
김주헌은 수긍하듯 대답이 없었고, 한비도는 쉽게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김주헌은 거래를 제안했다.
“나오는 길에 딥페이크 492를 훔쳐 왔다. 거래를 제안하지.”
‘딥페이크 492’라는 단어에 한비도가 멈칫했다.
아직 민간에 풀리지 않은 최첨단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해타산적으로 구는 인간을 가장 싫어하는 한비도는 여전히 경계하는 중.
“네 얼굴... 감시자들 얼굴은 다 똑같아. 짐승 새끼들처럼 원초적인 감정만 좇지.”
“그럼... 안 되는 건가.”
말이 안 통하는 놈인가, 한비도가 울컥거렸다.
“뭐?”
“내 본분을 잊고... 분노에 휩싸여... 복수하려는 건... 안 되는 건가.”
“복수?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과거에 얽매여있는 놈에게 미래는 없어. 내 신조 중 하나야.”
“왜... 과거를 떠올리면 안 되는 건가. 난 항상 남들의 과거만 보고 살아왔는데. 내게 남은 건 과거를 보는 눈밖에 없다.”
그 말이 뭔지.
한비도는 그가 측은해지기도 했다.
그녀 또한 분노에 찌들어있는 자신을 부정하며 살고 있었던 인간이었으니.
김주헌은 복수에 젖어 자신의 모습을 잊었다.
아니, 감시를 하는 일상에 물들었을 때부터 자아를 소멸시켰다.
그저 명령에만 따라왔다.
지금부터는 이를 벗어나 보려 한다.
딱딱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한비도가 잠시 생각을 거치더니 묻는다.
“네가 우리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감시 체계를 무너뜨리고 없애주겠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
주춤하던 한비도가 끝내 씨익 웃었다.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이상적인 기개가 마음에 들었다.
잔혹하고도 매혹적인 웃음으로 김주헌의 턱에 요염하게 손가락을 갖다 대는 한비도.
“우리... 목적은 달라도 목표는 같네?”
그리고 한비도의 입에서 윗선이 강행중인 비밀 프로젝트 명이 나온다.
“너. 고귀하신 윗분들이 사람들 납치해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줄 알아? 감시는 표면적인 족쇄일 뿐이야.”
“...?”
“인간 기계화 실험. 모든 인간을 누군가의 입맛대로 완전히 통제하려는 거지.”
퍼즐이 맞춰진다.
김주헌이 보았던 꼭대기 층의 실험, 엄마 선가희의 죽음, 그녀가 외치려고 했던 진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자행되는 더러운 짓과 관련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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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이제 다 뒤엎겠네.”
2부 분량을 받았는데, 기가 찬다.
이적재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린다.
금세 이입해 연기를 해보고 싶은 의지가 벌써부터 샘솟았다.
특이한 SF 세계관 설정과 CG의 미, 얄팍한 캐릭터로만 밀어붙이는 스토리가 아니었다.
탄탄한 플롯과 강렬하고 냉염한 복수심, 진득하며 공허한 저항정신, 복합적인 인간상.
내포된 감정들이 파도처럼 이적재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다른 작품은 볼 필요도 없다.
“디팡 미팅 갈게요.”
플랫폼, 작가 경력, 많은 것들을 떠나서.
스토리 라인에 매료된 이적재.
여운에서 흘러나온 침이 꿀꺽 삼켜졌다.
“아... 바로 정하시는 겁니까? 그럼 넥스트 플렉스 작품도 한번 봐주세요. 이적재 배우님 모시고 싶다고 간청을 했습니다.”
“흐음.”
“무려 박종찬 작가님 작품이랍니다.”
“오호.”
시간은 있다.
오늘은 들어온 시나리오를 읽기 위해 비워둔 날이니.
커피를 한 모금 삼킨 이적재가 이제는 넥스트 플렉스 대본을 펼쳤다.
“이건가.”
같은 SF물이네.
<우주 마술사>라는 제목이고.
우주선을 만들던 마술사가 사기를 치는 내용이라...
소개로는 진한 휴머니즘이 섞인 SF물이란다.
아직 <감시의 비밀> 여운이 남아있지만, 머리를 헹구고 글자를 읽어나갔다.
<우주 마술사> 주인공, 우주선 연구원이었던 남자는 고된 노동에 일을 그만두고, 오래전 꿈꿔왔던 마술쇼를 한다.
마술을 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데, 그 여자가 검은 조직에게 납치된다.
과학을 능가하는 기막힌 쇼를 벌이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결국 검은 조직에게 납치된 여자를 찾는다... 라는 내용이라.
휴머니즘이라고 적혀있는데 어쩌다 로맨스가 된 거지?
SF의 묘미는 무엇으로 충족하지?
아무튼.
조금 정신이 없는 스토리는 약간 터무니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이게 박종찬 작가의 작품이라니.
아무리 그의 네임드가 높다고 한들 긍정적으로 보기가 힘들었다.
왜 여자가 조직에게 납치를 당했는지, 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지, 어떤 감동과 감흥을 받아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마술쇼의 디테일도 잘 와닿지 않는다.
“뭐... 전 정한 것 같습니다. <감시의 비밀>로 가죠.”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은 의아한 듯 갸우뚱 하다가도 배우이자 대표인 이적재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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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를 받아본 다른 배우들도 비슷했다.
넥플에 다 붙을 것 같다던 디팡의 우려와는 달리.
배우들은 <감시의 비밀>에서 어떤 페로몬을 맡은 듯 연기적 욕망을 일궈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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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7-8부의 수정까지 마쳤다.
지예린과 전체 검토를 끝냈다.
“와! 끝이네요! 도민준 작가님!”
처음으로 드라마 8부작 보조작가 업무를 마친 지예린이 들뜬 기분을 가만두지 못했다.
“네. 끝이네요. 고생하셨어요. 또 추가 업무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네!!”
내일이면 지예린의 계약기간이 끝나기에 오늘 일을 마무리 지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SF 세계를 함께하는 동안은 길게 느껴졌다.
단 한 번도 싫은 소리 않고 잘 따라주어서 고마웠다.
“참. 이건 저번에 봐달라고 했던 지 작가님 단편 시나리오 피드백이에요. 따뜻한 감성이 참 좋던데요.”
마지막으로, 지예린이 쓴 단편 시나리오를 보고 적은 5페이지짜리 문서를 전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었다.
짧은 피드백일 분인데, 지예린의 눈시울이 말랑하게 휘어졌다.
“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
(댓글들 모두 감사합니다 수정 체크 말씀은 덕분에 잘 확인하며 수정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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