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쿵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내가 나온 문은 반투명한 상태로 변해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불안해지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두 번째로 대미궁에 들어온 거긴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난 대미궁에 발을 다시 밟을 디딘 순간, 드디어 내 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은 그냥 되는 대로, 내 의지라고는 없는 듯이 흘러가듯 살아왔다.
내가 그렇게 살아 온 것을 단순히 환경 탓이라고 퉁치고 넘어갈 생각은 없다.
실제로 난 뭔가가 되고 싶다거나,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적당히 일했고,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수입만을 원했었다.
그러니까 은성이 형이 날 볼 때마다 산 사람 처럼 좀 살라는 얘기를 매번 했던 거겠지.
그런 내 인생관이 대미궁에 다녀온 후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대미궁에서 정확히 뭘 하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이곳에 계속해서 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것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나에게는 정말 큰 변화였다.
은성이 형에게 내가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얘기한 것은 일말의 거짓 없는 내 진심이었다.
내 기분과는 별개로 내가 짊어지고 온 여러 가지 준비물들도 두 번째 대미궁행을 택한 내 선택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첫날은 걷는 것만도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휘 - 익
난 마체테 한 자루를 꺼내 들고 살짝 휘둘러 봤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마체테와 함께라면 난 그렇게 괴롭히던 수풀들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훗.”
난 새로운 모험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내가 갈 방향은 어제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형과 나눈 얘기 중에는 탐험을 어떤 식으로 할지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 만약에 문의 위치가 고정된 거라면 일단 문 주변의 지형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얘기를 나눴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 했고, 문을 나와서 어제 내가 나온 곳과 동일한 지점이라는 확인하고, 반대 방향으로 가보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돌아오는 것은 회귀본능이 있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난 힘차게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
[10:10:12]
‘대략 두 시간 정도 걸은 건가?’
난 상태창의 타이머를 보고 내가 얼마나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꿀꺽꿀꺽
난 백팩에서 물을 하나 꺼내 마시고 에너지바도 하나 꺼내 먹었다.
우물우물
‘체력 스탯이 올라가니까 확실히 힘이 많이 안 드네. 어제는 삼십 분에 한 번은 쉬었던 것 같은데.’
단순히 체력 스탯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은 수풀들이 그다지 우거지지 않아서 걷는 것도 어제보다는 아주 편했다.
대신 칼로리 소모는 꽤 되는지 의식하지 않을 때는 몰랐지만 한 번 먹기 시작하면 꽤 많은 양을 먹어줘야 허기가 가셨다.
‘그래도 내가 얻은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닌 거겠지. 그런데 이쪽은 풀들 색도 조금 달라지는데, 숲이 아니라 다른 지형이 나오는 건가?’
정확히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10~15km는 걸은 것 같았다.
체력이 좋아져서 쉬지 않고 걸은 것도 있지만 조금 올라간 민첩의 영향인지, 말 그대로 내 몸이 조금 민첩해져서 걷는 속도도 올라간 듯싶었다.
GPS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있었겠지만, 인공위성이 없는 대미궁에서 아쉬워 해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제와 같은 높이 자란 풀숲을 생각하고 꺼내 들었던 마체테는 진작 돌려놨다.
‘음. 어제 정도는 아니더라도 뭔가를 발견해야 후원해준 은성이 형한테도 할 말이 있을 텐데···. 뭐 어제도 거의 돌아가기 직전에 천둥거인의 뼈를 발견한 거였으니,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겠지.’
난 다 먹은 페트병과 에너지바 껍질들을 따로 준비해둔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서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조금 걷다 보니 내 발걸음 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 풀들은 많이 보이지 않고 그사이 사이로 흙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무들 숫자도 줄어들었어. 여기서 더 가면 뭐가 나오는 걸까?’
내게는 판단을 내릴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계속 움직이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조금 속도를 줄이고 움직이기로 했다.
혹시라도 뭔가가 나온다면 대처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확실히 대미궁이라고 할 만한 게 분명히 천장은 보이는데 내 좌우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처음에 숲으로 들어 갔을 때는 나무들로 가려져서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초원지대에 가까운 지형을 걷다 보니 대미궁의 광활함이 너무나 잘 느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걸까? 다음에는 레이저 거리 측정기라도 가지고 들어와 봐야겠어. 그거라면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계속 걷고 있는데 저쪽에 아주 높게 자란 갈대숲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물 냄새가 나는 듯했다.
‘냇가라도 있는 건가?’
일단 나는 조금 더 다가가 보기로 했다.
갈대숲의 갈대들은 지구에서 보던 갈대와는 종이 좀 다른 듯 했다.
갈대라기보다는 대나무에 가까운 굵기를 가지고 있는 종이었다.
내가 갈대라고 판단한 건 마디 끝부분에 자라고 있는 먼지떨이 같은 술 때문이었다.
뭐 이곳만의 이름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신기한 갈대를 밀어내며 강가로 생각되는 곳까지 뚫고 나갔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도로 퉁겨져 나왔을 것만 같은 탄력을 가지고 있는 갈대들이었다.
하지만 43이라는 엄청난 힘 스탯은 내게 갈대들에 밀리지 않게 해줘서 굉장히 수월하게 갈대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갈대숲을 빠져나오자 보이는 건 한강의 반 정도 되는 넓이의 강이었다.
맑고 투명한 강물은 강바닥까지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물고기들도 꽤 있네.’
강물 속에는 내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그 순간 난 어릴 적 딱 한 번 봤던 전기 낚시가 생각이 났다.
왜 그 생각이 났냐 하면, 얻어놓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기초 전격 마법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상태창에 표기가 돼 있기는 한데, 지금까지 사용해보지를 못했었다.
사용법은 스킬을 얻는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았지만 어떤 위력일지 몰라 지구에서도, 대미궁에서도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했다.
지구에서는 가전 도구가 혹시라도 고장이 날까 봐 못 썼고, 대미궁에 와서는 쓸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솔직히 괜히 아무 데나 마법을 쐈다가 괜히 어그로가 끌리거나 할까 봐 쏴보지 못했다.
하지만 물에 데고 쏘는 거라면 소리도 안 나게 쏠 수 있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이 든 의문점은 천둥거인의 힘으로 얻은 마법이면 천둥 마법일 것이지 왜 기초 전격 마법이냐는 것 정도였다.
‘자 그러면 한번 사용해볼까?’
내가 얻은 기초 전격 마법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일정한 형식이 없는 마법 같았다.
형식이 없다는 건 내가 해봤던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것처럼 무슨 무슨 쇼크나 라이트닝 화살 같은 기술 이름을 외치면 기술이 나가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그저 전기를 방출하는 느낌?
단지 내가 사용할 마나 양을 정하고 전격의 이미지를 만들면 거기에 따라서 전격이 외부로 방출되는 것 같았다.
아직 해보지를 않아서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난 강물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내 양손을 강물에 담갔다.
그리고 작은 그물을 연상하며 전격을 방출하는 이미지를 그렸다.
빠지지지지직
“우왔! 뭐야 이거!!”
내가 쏜 전격 마법은 작은 그물이 아니라 어망 수준이 돼서 강물 위를 날뛰고 있었다.
강폭의 절반은 잡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전격으로 만들어진 어망은 거의 5분가량을 강물 위에서 뛰놀다가 사라졌다.
만신창이가 된 물고기들을 잔뜩 남긴 채···.
‘이거 위력이 말도 안 되게 센 것 같은데. 힘 조절하는 법을 좀 연구해야겠어.’
전격 어망을 만드는데 들어간 마나는 30이었다.
원래 그 정도를 사용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 마나를 과하게 사용한 것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기초 전격 마법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효율이 높다는 얘기일 수도 있었다.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게 백번 났지.’
강물에 손을 넣고 있느라고 내가 쏜 전격에 내 옷의 소매 부분이 조금 타기는 했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마도 전격 내성이 있어서 멀쩡한 거겠지.
음 지상에서도 써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조금 전에도 봤듯이 내가 이미지화한 대로 나오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더 가다가 적당한 공간이 있으면 바닥에다가라도 연습을 해보는 게 좋겠다.
- 헥, 헥, 헥, 헥
갑자기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잘생긴 개대가리가 내 옆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름을 지으려면 세바스티앙 에우로디프스 3세 정도는 돼야 할 정도로 잘생긴 개였다.
아니 정정한다. 머리만 개고, 역관 절을 한 이족 보행을 할 것으로 추정되는 몬스터였다.
“인간, 저거 다 니가 먹을 거냐?”
“??!!!”
충격이다.
비만 고블린은 닥치고 공격하고 케륵거리는 소리밖에는 안 냈는데, 이 잘생긴 개대가리는 말도 잘한다.
목소리도 좋은 건 뭐지?
날 노려보는 개대가리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뭘 얘기하는 거야.”
“네가 잡은 물고기들을 말하는 거다. 진짜 다 먹을 거냐?”
그제서야 난 노릇노릇 잘 구워져서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들에 생각이 미쳤다.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일단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아니. 네가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가서 먹어도 돼.”
“오 정말인가? 고맙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잘생긴 개대가리는 강물로 뛰어들어 물고기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 앞에 쌓아두고는 다시 강물로 들어가 물고기들을 건져내는 걸 반복했다.
물고기들이 거의 안 보일 때까지.
난 그 재빠른 동작에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만약에 이 개대가리와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하니 자연스럽게 긴장이 됐다.
내가 잡은 물고기들을 쌓아 놓으니 거짓말 좀 보태서 작은 동산쯤은 되는 것 같았다.
이 개대가리가 작은놈들은 그냥 흘러가게 두었는데도 그 정도였다.
그 물고기 동산을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는데 강물 속을 왔다갔다 해서 웻헤어가 된, 더 잘생겨진 개대가리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인간,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괜찮다면······내 동생들도 불러서 같이 먹으면 안될까?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동생들은 나보다 훨씬 작고 얼마 먹지도 못하는 편이니까···.”
“난 또 뭐라고. 괜찮으니까 불러서 같이 먹어도 괜찮아.”
“정말인가? 넌 진짜 좋은 인간이구나!! 얘들아, 먹어도 된다.”
슈슈슉
잘생긴 개대가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뒤에서 조그만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와 물고기 동산으로 향했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인기척, 아니 조그만 기척 조차 못 느꼈다.
‘이거 얘네들이 마음만 먹었으면 나 같은 건 순식간에 죽이는 거 아니야?’
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나조차도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귀여운 작은 강아지들 네 마리가 물고기 동산에서 물고기들을 흡입하고 있었다.
“저렇게 밝은 모습으로 식사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인간 고맙다.”
그 모습을 같이 바라보고 있던 잘생긴 개대가리가 내게 감사를 표해왔다.
감사인사를 하면서도 침을 질질 흘리며 물고기들에게서 눈을 못떼고 있는 모습을 한 정체 모를 개대가리가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너는 안먹어도 되?”
“나도 먹어도 되는거냐?”
“당연하지.”
이 녀석의 동생이라는 녀석들이 먹는 속도를 보아하니 빨리 먹지않으면 이녀석이 먹을 것이 하나도 남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꿀꺽, 그럼 잠시 실례하도록하지.”
‘침 흘린 시간에 진작 먹으러갈 것이지.’
개대가리 녀석이 있던 자리는 녀석이 흘린 침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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