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작을 찾자!(1)
스태프는 낮에 배우와의 말싸움이 한 차례 소진 상태에 들어섰을 때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섬에 있는 인원의 대부분이 안 그런 척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일을 그만둬야 하겠지...'
무명 배우에게도 그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무거운 짐을 이고지고 땡볕 아래에서 대기해야 하는 직원들보다 더 유리한 입지에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차라리 자신과 싸운 배우가 이름값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오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은 행동 역시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저기요, 지금 장비 일부러 넘어뜨리셨죠?
-아 씨X, 그럼 그게 길막 중인데 어쩌라고?
-뭐라고요? X발? 지금 당신 말 다했어?
-다 했으면 어쩔건데? 야, 그리고 넌 왜 갑자기 반말이야!
스태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조금만 더 참을걸, 그런 모욕쯤이야 이런 방송업계에서 허드렛일을 하다 보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왜 인내하지 못 했을까.
인내를 요구하는 것보다 먼저 잘못한 사람의 행동에 대한 교정 시도가 더 중요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론적으로는. 하지만 현실이 어디 이론으로만 유지되는 것이던가?
와중에 배우가 먼저 한 욕은 잘 들리지 않고, 그가 자신이 패드립을 했다는 사실을 과장되게 소리쳤을 때부터 사람들의 눈초리가 거세졌으니 꼼짝없이 분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될 판이었다...
-"저, 제가 두 분 대화 내용이 좀 들렸었는데..."
...만약 현빈이 그 상황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천막 아래의 모두가 자신에게 '네 잘못이야.'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아이를 안고 다가온 잘생긴 용모의 성인은 과장 좀 보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온 성자처럼 보였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 된 직후에는 어안이 벙벙해 뭐라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서 말하자니 약간 민망한 일이었는지라 '사례의 의미로 선물이라도 보내드리고 싶다'며 기프티콘을 보낼 연락처나마 고 감독에게 물었는데, 다행히도 오지랖 넓고 사람 좋은 음향감독은 길 가던 현빈을 불러세워 줘 이렇게 직접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 정말 좋은 분이세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서 한 거에요."
위와 같은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할 순 없으니 스태프의 인삿말은 굉장히 짧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감사함, 안도감, 편안함이나 억울한 일이 해결 된 후 드는 긍정적인 서러움 같은 게 담겨있어 그 말이 진심임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어려워 하는 일이니 당연한 게 아니죠. 앞으로 하는 일 다 잘 되시길 바래요. 정말로요."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현빈은 마지못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는 헤어지기 직전 연거푸 절을 할 기세로 정중한 인사를 했다. 허리를 얼마나 숙였는지 긴 머리에 섬의 모래알이 닿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한 쪽의 90도 인사가 몇 번이고 이어지던 그 때, 사빈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현빈의 팔을 툭툭 쳤다.
"아우으아."
"응? 사빈이 왜 그래?"
사빈은 짧뚱한 손가락으로 인사를 하고 있는 그 스태프를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보고 현빈은 무슨 의미일까 가만히 생각하다가, 결국 알아내기를 포기하곤 자신의 작은 아들이 시키는 대로 사빈을 스태프 바로 옆으로 데리고 갔다.
'어휴, 현빈이 저 놈 센스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내가 딱! 하면 알아서 착! 하고 보조를 해줘야지. 사빈은 내심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는...
"어?"
사빈은 스태프에게 다가가 그를 꼬옥 안아주었다.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다정하게.
"아~사빈이가 누나 안아주고 싶었나 봐요!"
아하, 그제야 사빈의 뜬금없는 행동을 이해한 현빈이 말로 설명을 했다. 순간 오늘 하루 종일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됐던 스태프는 눈물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사빈아~~!!!"
그치만 아주 행복하고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아이를 껴안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이 아기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짓을 하는데 어떻게 안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누나 힘낼게, 스태프는 사빈의 볼뽀뽀까지 받아내고는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기운이 넘치는 얼굴로 정리 중인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하하, 이 씨 오늘 수지맞았네! 사빈아, 아저씨도 안아주면 안 되냐? 응?"
'가라, 늙은 놈.'
사빈은 고 감독의 뺨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물론 힘이 너무나도 작았기에 고 감독은 아기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져 줬구나! 이렇게 감동일 수가! 라고 알아서 착각하고는 마침 도착한 배에 타는 현빈과 사빈을 배웅했다.
참고로 배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있었다.
"사빈아~아빠도 안아주면 안 돼?"
'사내놈들이 왜 이래?'
그렇게, 말 많고 탈도 많던 하루가 끝났다.
***
9월, 습도가 내려가는 것 만으로 슬슬 살 만 하다~라고 느끼는 크레이지 코리안들이 한창 택배를 주문하느라 바빠지는 시기. 사빈, 현빈, 예주의 집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드디어 이들이 낡은 빌라촌을 벗어나 번듯한 신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는 점이다.
"으와으우아아!(크기는 작아도 인테리어가 내 맘에 쏙 드는군!)"
"하하, 사빈이도 좋은가봐~"
"그러게, 칙칙한 색이라 싫어할까 봐 걱정했는데."
30평 초반대의 아파트는 쿨그레이 계열의 가구들을 기본으로 벽지와 바닥은 하얀색, 종종 포인트를 주기 위해 검은색으로 장식된 모더니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뽁뽁
"집 주소 가족들에게 안 알려줬지?"
"당연한 소리를, 민서한테만 근처에 올 일 없게 막으라고 알려줬어."
뽁뽁뽁뽁
"잘 했네. 근데 우리 이따가 저녁 뭐 먹지? 여기 조리기구가 아무것도 없잖아."
"원래 이삿날에는 짜장면이긴 한데."
뽁뽁뽁뽁뽁뽁
"...난 짜장면 별로."
"알아 바보야."
"난 바보 아냐 바보야."
"너 맞아 바보야."
뽁뽁뽁뽁뽁뽁뽁뿩!
아니, 근데 아까부터 어디선가 뽁뽁소리가 자꾸...
휘익, 이 거슬리는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집 안을 둘러보던 예주는 소리의 근원지를 얼마 안 가 파악했다.
"현빈아! 사빈이 걷는다!!!!"
"뭐? 어디!!"
바로 사빈이에게 신겨주고 온, 곰돌이 푸가 그려진 뽁뽁이 신발!
인테리어 흠집 체크할 때가 아니야, 바보부부는 얼른 핸드폰을 집어들고 뽁뽁 소리가 들리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
"..."
세 명의 눈빛이 교차한다. 너 방금 걷지 않았어?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어머니아버지. 저는 그냥 앉아있기만 했을 뿐 집을 구경한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는데요?
예주와 현빈은 가만히 앉아있는 사빈을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도저히 일어설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결국 수도를 체크하고 있던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게 몇 번째야, 진짜~"
"하하, 이게 놀이라고 인식한 걸지도 모르겠다..."
요 근래 한 달 간,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됐다. 뭘 잡고 일어서길래 핸드폰 가지고 왔더니 그새 앉아있고, 걷는 소리가 나길래 핸드폰 가지고 왔더니 누워있고.
그 타이밍이 얼마나 절묘했는지, 며칠 전 예주의 손을 잡고 몇 발자국 떼는 영상이 다라면 말 다했다.
"아니, 그거 걷는 거 우리한테 보여준자고 닳나? 달아?"
"예주야, 화내지는 말고..."
그렇게 예주는 분노하고 현빈은 서운하기를 5주째...였으나, 사실 사빈은 단순히 장난을 치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도 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농간을 벌이는 거다.
그 이유라 함은 바로...
'...바보들.'
사빈은 염력을 이용해서 예주가 서랍장 2번째 칸에 놓고 간 핸드폰을 잡았다.
바로 예주 혹은 현빈의 핸드폰이다.
'이 귀중한 물건을 아무데나 둔다니까. 뭐, 나야 좋지만.'
이상하게도 바보 부부는 21세기의 대한민국 경제활동가능인구치고는 휴대폰을 제 생명줄마냥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대로 하루 정도는 그냥 안 지니고 살기도 했다.
'덕분에 내가 쓰기는 편하지만.'
방금처럼 휴대폰을 가지고 달려오게 만든 다음, 목적을 상실한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아무 곳에나 놓고 가는 핸드폰을 염력으로 주워 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도 역시 내 개인 핸드폰이 있는 것보단 못하단 말야.'
언제쯤 받을 수 있으려나, 사빈은 자신의 작은 몸뚱아리를 되새기며 푸욱 한숨을 쉬었다.
[전 세계의 청소년들이 핸드폰을 처음 가지게 되는 나이는 한국 나이 11세 정도입니다.]
"와악!"
깜짝이야, 사빈은 화면에서 갑작스레 들리는 음성에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굴 뻔했다.
'이놈아, 갑자기 말 걸지 말라니까는.'
[어차피 이 제페토119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찾으신 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사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화면을 바라봤다.
'내가 부탁한 건 찾았나?'
물론이죠. 제페토119의 이모티콘 표정이 나오던 화면엔 순식간에 여러 링크가 적혀있는 파일이 띄워졌다.
[상업영화 아역배우 모집. 가제:(스물 아홉 시간)]
[독립영화 아역배우를 모집합니다.]
[뮤지컬 '밀푀유' 아역을 찾습니다.]
[가디언이 아역배우의 꿈에 함께합니다.]
바로 아역배우 모집 공고들이다. 사빈은 침대 위에 있는 베개에 걸터앉고는 그 글들을 하나 하나 분별해내기 시작했다.
여긴 이름값이 없고, 노래? 이건 아직 못 하지. 연령이 높아. 윽, 감독이 악평이 심한걸.
대체로 그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건 없었지만, 그 와중에 눈에 띄는 글이 하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시리즈 '히에리온' 영화 제작 확정...미국에서부터 오디션 시작.]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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