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촬영.(4)
배준욱 감독의 영화<육식식물>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슷한 구조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어느 날, 한국의 몇몇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짧은 편지가 도착한다.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드리겠습니다-잣나무 섬]
할 말이 있으면 메신저나 SNS의 DM 기능을 이용하는 요즘 시대에 우표도 없이 도착한 이 편지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시한다.
참가만 해도 50만원을 준다는 말에 몇몇은 혹하지만, 기간이 10일,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금방 포기한다.
결국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 어린아이의 장난같은 말에 기대야 할 만큼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각자의 집, 기숙사, 장기 투숙 중인 모텔, 아니면 길거리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한날 한시에 사방이 가려진 배를 타고 어딘가에 도착한다.
개인의 사정과 이야기를 떠안고 한 섬에 도착한 12명의 사람들. 식량, 자원, 그리고 그 12명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 섬에서 사람들이 한 명씩 죽기 시작한다.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범인을 추리해 보지만, 그저 결백한 사람 둘을 죽일 뿐 이 섬에서의 연쇄 살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영화의 초반 시점 내에 12명의 사람들 중 반절이 죽고, 여성 2명과 남성 4명의 인원만이 남는다.
진주, 재윤, 민강, 덕만, 현우, 민정. 이 6명으로 남은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상하게도 이 이후로는 한참 동안 살인이 발생하지 않아서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 살인자인 건 아닐까 추리한 이후, 이 6명은 섬을 탐색해 나가다가 이곳이 어떠한 종교, 또는 그에 가깝게 무언가를 숭배하는 집단이 머물던 장소란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집단이 숭배하는 '그것'을 부화시키기 위해서는 생제물 6마리를 바쳐야 한다는 걸 알아내며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들은 기존의 사망자들이 제물이리라 유추하곤 '그것'의 부활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무인으로 진행되는 의식을 방해하려 해 보지만, 아무런 소용은 없다.
결국 '그것'은 부활한다.
아주 어리고 어린,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그리고 내가 맡은 역할이 바로 '그것'이란 말씀!'
분량은 짧아도 엄청 비중이 크다 보니, 사빈 역시 극의 분위기를 최소한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다만 방해하지 않으려면 잘해도 평타, '그것'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야 분위기를 잡을까 말까 할 정도인 게 문제다.
-사빈이는 울지만 않고 있어주면, 편집팀에서 다 알아서 해 줄 겁니다.
배 감독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CG나 영상 조작은 최소한으로 하길 바라고 있을 거다.
'CG가 싫어서 진짜 무인도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이야.'
안전상의 문제를 위해 부활 의식이 진행되는 지하실의 세트장은 밖에서 건설됐지만, 그 세트장마저도 롱테이크까지 고려해 완전히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도 불타는 효과를 제외하면 CG는 거의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나한테 CG를 사용할 일이 없을 정도로 잘 해내면 배우들의 몰입감도 강화될 테고.'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자신의 장면은 불길하고 기괴하기 짝이 없다. 아이의 아름다움마저 악한 본능에 삼켜져 보는 사람들을 절로 오싹하게 만든다.
극장과 스크린 너머에서 그 모습을 볼 사람들은 음악이나 음향 효과까지 같이 들릴테니 집중하지 않아도 빠져들겠지만, 영화 촬영장인 이곳은 정작 영화가 아니다.
사빈은 자신이 무얼 해내야 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내 장면이 의미하는 건, 인간의 탄생.'
배준욱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더없이 끔찍하고 더러운 존재. 갓 태어난 아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한없이 본능에 가깝기에 더욱 추악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배준욱 감독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원한 아이는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운 6개월짜리 아이가 아니라, 어떻게 생겼든 간에 방금 막 태어난 아이였을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포기해야만 했겠지.
'하지만 배우가 나인 이상, 이 부분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6개월짜리 아기인 사빈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피와 물기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게 오히려 장면의 비인간성을 강화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킬테니. 단,
'내가 맡은 역할이 의미하는 게 탄생임을 관객 모두가 깨닫는다는 전제 하에.'
인간의 미의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완성도에 큰 영향을 받는다. 멀리 갈 것 없이, 연기력 없는 아이돌은 아무리 얼굴과 인기가 좋아도 비중있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거의 없지 않나.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완벽에 가까운 연기이고..'
연기란 곧 흉내이며, 남을 흉내내기 위해선 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는 완벽한 이해가 필요하게 된다.
'내가 연기해야 하는 건, 갓 태어난 아기지.'
사빈은 천년간의 지식 속에 담긴, 어떤 아이들을 이해했다.
갓 태어나 버려진 아기, 병에 걸린 아기, 원하지 않던 아기, 인종 청소의 일환이 된 아기들을.
불길함을 탯줄 삼아 세상에 나온 아이를.
***
몸이 약한 진주와 더위를 먹은 민강을 제외한 4명은 섬의 비밀 통로와 연결된 지하실을 내려가고 있었다.
"윽, 끈적거리네..."
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는 민정은 벽을 짚고 내려가다가 잡스러운 것들이 묻은 것을 알곤 황급히 손바닥을 떼어낸다.
"너 아까 사람 내장은 멀쩡히 만졌잖아?"
"아저씨, 피는 안 더럽잖아요. 이건 더럽고."
중년의 남자는 태클을 걸더니 돌아온 답변에 더 큰 의문이 생긴 눈치다. 아니, 그건 더럽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무섭잖아...
"더러운 건 아니더라도 만지진 마세요. 나중에 경찰 데리고 오면 그게 다 증거잖아요."
선두에 가던 남자가 주의를 주자, 갑자기 계속해서 호들갑을 떨던 다른 남자가 산만한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아니, 다들 조용히 좀 해봐요! 지금 이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뭐가 없으면 네가 범인인 거, 알지?"
아까부터 '뭔가 감이 안 좋다'며 반 장난 반 진심 범인으로 몰리던 남자를 여자는 공격했다.
"아 나 아니라니까! 사람을 왜 못 믿어요!
"너 왠지 전생에 놓아주니 배신하고 살려주니 배신하고 동맹하니 배신하고 잘해주니 배신할 상이야!"
"그게 대체 무슨 상인데요!"
"기린상!"
키가 큰 남자는 아까 내장 만지던 여자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실제 남배우의 예능활동을 뜻하는 배우 개그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 어느새 처음의 긴장된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앞장서서 가던 남자가 무언가를 발견한다.
"다들 이것 좀 봐요! 이거 무슨 암호같지 않아요?"
"어디, 어디?"
지하실의 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문은 잠겨있었는데, 그 위의 벽에는 알록달록한 색의 사람 픽토그램 6개가 있었다.
"어...진짜네! 여기 위에 글자도 써져 있어요."
"난 안 보이는데?"
풋, 키 큰 남자가 여자를 비웃었다.
"누나는 키가 너무 작..."
"야."
...선두, 중년, 키다리 세 남자가 모두 멈칫한다. 이, 일 났다!
"꿇어."
"넵, 누님."
여자는 배신상 남자의 허리를 밟고 올라가 글자를 확인했다.
"진작에 이럴걸. 음~진짜 글자가 있네? 사람을 한 명 더 만들어라...무슨 뜻일까? 혹시 이런 문제 아는 사람."
"난 없어."
"저도 없슴다, 누님."
젊은 남자는 새치가 많은 중년의 남자를 홱 돌아봤다.
"아저씨는...아, 아니다."
"으이? 아니 내가 뭐 어쨌다고."
그 말에 엎드린 남자와 그를 밟고있는 여자, 물어본 남자가 싸늘한 눈으로 중년을 바라봤다. 음...지금까지 식량 태우고, 문제 잘못 풀어서 힌트 못 받고, sos신호도 제대로 못 한 게 누구더라.
매정한 시선을 알아차린 덕만은 주먹 쥔 손으로 입을 막보 괜히 큼, 큼. 헛기침을 해댄다.
"니들도 나이 들어봐라. 나처럼 되나 안 되나."
"어휴, 그럼 아저씨는 이거 아세요?"
젊은 남자는 살짝 비켜 중년의 배우도 그림을 볼 수 있게끔 했다. 뒷짐을 진 채 벽면을 바라보던 덕만은 자신의 희끗희끗한 회색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으흠...어어, 이거..."
"아저씨, 괜히 아는 척 하느라 어그로 끌지 말고..."
여자의 말은 중년이 꺼낸 말에 가로막혀 완성되지 못했다.
"너희 이거 모르냐? 나 어릴 땐 엄청 유행한 건데. 이야, 추억이네~"
"알아?"
"안다고?!"
"진짜로?"
...중년 남성은 그 반응에 괜히 서러웠다. 아니, 안다고 해도 불만 모른다고 해도 불만이면 대채 왜 물어보는 거냐, 젊은 것들아.
"...그래. 봐봐라. 이놈 팔은 이쪽, 저놈 다리는 저짝에 갖다대주면...이렇게! 하나 두이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개장 칠칠이!"
타악. 주황색 다리조각을 마지막으로 벽에 붙이자 6명이었던 픽토그램은 어느새 7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어떤 픽토그램은 팔이 없고, 어떤 픽토그램은 머리가 없는 등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오~아저씨, 꽤 하는데? 이건 인정!"
짝짝짝, 젊은이 셋은 칭찬의 박수를 보냈다.
"음핫핫, 내가 이런 사람이야~원래!"
덕만은 중년 택시기사 특유의 과장된 손짓과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걸 보는 젊은이들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원래는 아니죠."
"우연인 듯."
"뭐?"
"자, 들어갑시다!"
시끄러 시끄러, 유명 아이돌이 분한 젊은 남자는 사람들을 뒤에서 밀며 열린 문으로 비집어 넣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들어갔다.
지상에서 계단을 내려올 때부터 원테이크로 따라오던 카메라는 여기서 멈춘 채 배우들만이 더 깊은 지하실을 향해 내려간다.
끼이이이익—
그리고는 문이 닫히는 모습을 천천히 찍는다. 그 너머로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문은 천천히 닫힌다.
천천히, 천천히...
마치 그들의 미래만큼 불안한 모습으로.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는 모르는 편지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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