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변화.(3)
후우, 머리 위에 올려진 귀여운 하늘색 마린캡을 고쳐 쓰며 사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사가 길어.'
학식이든 권력이든 뭐 하나가 깊은 놈들은 대체로 말을 잘 하지 못하는 편이라는 법칙은 동양인 한국에서도 비슷한지, 아까부터 새벽하늘 어린이집 원장의 길고 긴 연설에 사빈은 너무나도 따분했다.
'저놈들도 다 그렇구만.'
다른 어린아이들도 모양새가 별반 다른 것 같진 않고, 강당 벽 쪽에 붙어있는 보호자들도 서서히 자세가 흐트러지는 중이다. 방금 현빈이 입 가리고 작게 하품하다가 예주한테 한소리 들었다.
-"그렇게, 우리 어린 아이들이 새벽하늘 어린이집을 나오면 새벽이 지나가고, 그래서 새 시대의 아침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저는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 드디어!'
중단발 머리를 안쪽으로 말고, 목티와 회색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있는 원장은 드디어 축사를 마치고 간단하게 목례를 한 뒤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여러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부모들은 살짝 당황했으나 어린이집 입학식 일정도 여기에서 끝이었는지 누군가 제지를 하진 않았다.
"엄마~!!!!"
"아빠!"
"이거 벗을래."
"시러!"
와다다다, 우당탕.
그렇게 스피커에서 새어나오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만 들리던 강당이 순식간에 아이들이 칭얼거리는 소리와 사람 움직이는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어떤 학부모가 겹쳐져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무너뜨리는 바람에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 우는 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저 선생 이름이 김현경이랬지?'
사빈은 소란스러운 틈을 타 원아 폭력 사건의 주 가해자인 선생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 원장의 연설이 시작되기 전 있었던 보육교사 소개에 따르면, 포니테일 선생의 이름은 김자에 현경이요, 대학을 졸업한 지는 4년 정도 지났다고 했다.
'참, 그냥 보면 착하기 그지없는 얼굴인데.'
생김새로 사람의 됨됨이를 구분하는 건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사빈은 그 옛날보다도 옛날, 오랜 삶을 산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착잡함을 숨기기 어려웠다.
'뭐, 그래도 벌은 받아야지!'
다만 사사로운 감상에 사로잡히기에는 죄질이 너무 나쁘다고, 사빈은 생각했다. 이 새벽하늘 어린이집에 제 자녀를 보내는 부모들이 아이가 맞으며 자라길 원해서는 아닐텐데, 그걸 때리는 자는 직업윤리 뿐 아니라 사회의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건 공리주의적으로 옳지 않으니까.
"자~새로 들어온 친구들 이 앞으로 모일게요~!"
'아, 이제 움직여야 하는 건가.'
인턴 보육교사 한 명이 막내반 중에서도 막내가 될 아이인 11월생 사빈을 안아서 옮겨주려 다가오는 중이었지만, 허사가 되었다. 사빈이 알아서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방금 말한 교사의 앞으로 정갈하게 걸어갔기 때문이다. 어린 교사의 허망히 남아있는 빈 손은 대신 그 옆에 앉아있던 명인을 들었다.
'...뭐하냐.'
[이 놈이 물어보지도 않고 날 들었다고.]
그럼 만으로 1살짜리한테 실례하지만 제가 당신을 안아도 되겠습니까? 하고 안아야 하겠냐. 사빈은 진짜 어린 아이들이 있어야 하는 품을 빼앗은 명인을 무슨 나태한 놈 바라보듯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졸지에 강당에서 어린이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명인의 분통만 터졌다.
그렇게 어린이집에 처음 다니기 시작한, 3월 첫째주의 월요일은 큰 사고가 없었다. 물론 유아들이 가득한 곳이니만큼 사건이야 많이 발생했다지만(대체로 애들끼리 싸우거나, 물건을 잘못 삼키거나, 넘어지거나, 모서리에 찧이는 등의 일이었다) 사빈이 예상한 체벌 겸 학대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그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아이들을 처음 또래 집단이자 본인들이 계속해서 케어할 수 없는 공간에 보내게 되어 많은 걱정을 하는 부모들을 위해 오늘 하루는 공개보육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공개보육은 새벽하늘 어린이집에서 이름 붙인 건데, 초등-중등 학교에서 진행하는 공개수업처럼 다른 반의 교사나 원생들의 보호자가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 볼 수 있도록 하는 날을 말한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폭력을 쓰는 교사라 해도 그 부모 앞에서 티를 내겠는가? 절대 안 내겠지.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김현경이 멀쩡하고 착실한 교사의 역할을 잘 수행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뭐,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아이가 선생한테 맞았다고 하면 바로 신고를 할 수도 있을테니 그러겠지.'
다다음 날도, 다다다음 날도.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도록 사빈은 제대로 된 폭력의 현장을 잡아내지 못했다.
'엥?'
불현듯 이 사실을 깨달은 사빈은 간식으로 나온, 설탕 코팅이 입혀진 도넛을 찍고 있던 포크를 내려놨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는 척, 거기 연결되어 있는 4-5세 반의 동태를 슬쩍 살폈다.
물론 김현경을 가장 집중해서 봤다.
상당히 퉁명스럽거나 혹은 불만이 가득하다고도 볼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학대 없이 기르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아무런 잘못을 하고 있지 않을 때 부정적인 표정을 짓는 게 금물이라는 건 육아서적의 상식일 정도인데,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는 보육교사가 그걸 모르진 않을테니까.
'...와중에 인내심은 있나보군.'
지난 일주일로 미루어 보아 아이들을 때려도 되는 시기와 안 되는 시기를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봐야 현경 본인만의 기준이겠지만.
촤르륵.
4-5세 반의 동태를 확인한 사빈은 다시 자신의 반으로 돌아와 명인을 찾았다.
'오늘도 텄어.'
그리고는 노래가 나오는 책을 보고 있는 그 옆에 가 털썩 앉았다.
[안 때리면 좋은거지.]
'언제 때릴까 긴장하며 어린이집을 다니고 싶진 않거든.'
명인이 건성으로 대답하자 사빈은 염세적으로 맞받아쳤다. 명인은 저 말을 듣고는 눈썹과 어깨를 한 건 으쓱이곤 다시 책에 집중하...기 전에, 참견을 한 번 해줬다.
[유도할 방법은 생각해 봤나?]
폭력의 유도.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의외로 가장 까다롭다.
'방법이야 많지.'
일부러 저 선생을 자극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나게 한 다음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게 대표적이다. 빠르며 직관적이고, 염력을 쓸 수 있는 사빈은 충격을 덜 받을 수 있으니 안전하기까지.
그러나...
[내가 말했지. 그 방법은 못 쓴다고.]
새벽하늘 어린이집을 완전히 갈아엎기에는 최악의 방법이 된다. 사빈이 이용할 건 대중의 여론인데, 아이가 먼저 너무 화나게 했다고 하면 오히려 폭력을 행사한 쪽의 편을 드는 제 3자도 나올 수 있으니까.
'대중의 적이 그자가 되도록 해야 해.'
김현경씨는 그 어떤 윤리적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 악인으로 비춰져야 한다. 그래야 일이 커지고, 쉽게 풀릴 수 있으니.
에휴, 결국 그 방법을 써야 하는 건가? 사빈은 푹 한숨을 쉬며 벽에 기대 앉듯이 누웠다. 골치 아픈 일을 시작하기 전 숨돌리기였다.
[무슨 방법?]
'아, 서명인 네가 좀 도와줘야 한다.'
[그니까 무슨 방법인데.]
***
그렇게 이틀 뒤,
—따악!
사빈은 김현경이 던진 핸드폰에 머리를 맞는 데 성공했다.
지이잉—
물론 선명한 고화질의 폭력 현장 실시간 촬영은 덤이었다.
- 작가의말
분량도 적고 업로드도 늦어 죄송합니다. 오늘자 부터는 정상 분량, 자정 업로드가 가능합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