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했다.
뭣 됐다. 아주 그냥 제대로 큰일이 났다.
사빈은 16번 지원자가 입에 쪽쪽 무는 키즈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게 먹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둘째치고, 그게 왜 밖에 나와있는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 은찬아!"
16번 지원아동의 보호자는 아이의 입에 들어가 있는 이물질을 재빠르게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다고 사빈의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저걸 입에서 뺀다고 심사장의 장난감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이름이...명인이, 여기 명인이 보호자분 안 계세요?"
"그 분 지금 들어가셨어요! 저한테 주세요. 일행이에요."
와중에 예주는 자신의 속도 모른 채 주인을 잠시 잃은 키즈폰을 받아 챙겨두고 있었다.
'...제페토 119야.'
[왜요.]
나 어떡하냐. 사빈은 제페토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어쩐지 눈에서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을 꾹 참았다.
"사빈엄마~저희도 끝!"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17번 지원자, 그러니까 명인의 카메라 테스팅이 끝나 환한 얼굴로 나오는 이선미 씨의 얼굴이 야속했다.
"어라, 사빈이 왜 이렇게 퍼질러져 있어요?"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이 자세던데요?"
사빈은 예주의 옆 의자에누워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허벅지에 올려논 채 무릎을 세워 한껏 불량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네놈 아들 때문이다.'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어도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담배 하나 입에 무는건데.
그렇게 사빈은 집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도 한껏 입을 내미고 볼을 부풀린 채 팔짱을 끼는, 그의 나이가 허락하는 가장 불만스러운 자세를 했다. 물론 예주와 선미씨는 귀엽다며 사진이나 좀 찍었고, 옆자리 명인 군은 좀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드라마 <비형랑> 아역배우 오디션 심사 결과 공개 당일이 되었다. 사빈이네 집은 여느 때처럼 평화로웠으나 정작 사빈이만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아닌 옆집 아이의 오디션 결과를 걱정하느라 한 숨도 못 잤기 때문이다.
"사빈이 뭐 됐어?"
"주인공 아역~"
예상대로, 사빈은 배우 하늘의 아역으로 낙점됐다. 얼마나 당연했으면 현빈과 예주도 호들갑 떨지 않고 그렇게 됐구나~하는 반응이겠는가.
"근데 사빈이 왜 저렇게 떨어?"
달달달달달달달. 예주는 스스로 핸드폰의 진동 모드를 표현하고 있는 제 아들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다리나 상체는 물론이고 그냥 전신이 잔상이 보일 만큼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서명인이가 비중있는 배역 좀 맡았게 해주세요! 물론 테스팅 때 전혀 집중 안 했겠지만 가끔씩 기적도 하나 일어나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사빈은 무신론자가 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되게 기도하고 있었다. 믿진 않지만 있으면 좀 들어줘라!
"맞다, 명인이는 뭐 됐는지 물어봐야지."
"나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선미 씨 뵀는데."
"그래? 뭐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그게...누구더라?"
사빈은 지금 이 순간 뜸 들이지 말고 제대로 좀 말해라! 기억력도 멀쩡한 젊은 놈들이! 하고 두 사람의 머리를 프라이팬으로 땡! 하고 내려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남자 구미호 아역이었다! 조연 목록 중에 주연 바로 다음으로 나와있던 사람."
"그래? 잘 됐네~"
'신 완전 멋져! 신 최고!!!!!!'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긴 한 영혼이 30번 넘게 환생하는데 있어야지! 사빈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 했다.
"어, 현빈아 사빈이 봐봐!"
신난다, 사빈은 제 온 몸을 엉성하게 리듬을 타며 흔들고 있었다. 천 년간 살면서 춰본 춤이라곤 미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바에서 췄던 게 다지만, 춤은 언제나 감정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므로.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드라마 <비형랑> 첫 촬영날.
"그래도 두 분, 첫 촬영은 보실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실내 촬영장의 가장자리, 아역들 보호자를 위해 준비된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선미, 예주, 현빈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뭐, 중간에 나가야 하긴 하지만요..."
현빈은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어딘가 울적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마스 전날이니 만큼 녹음보다도 홍보 일정 때문이었다. 이따 주요 캐릭터로 참여한 게임이 자정에 런칭하니 홍보글을 트위티랑 인별이랑 너튜브 커뮤니티 등 온갖 SNS에 올리고, 조금 이따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진행하는 '랑랑이와의 전화'콘텐츠를 위해 촬영장 찾아가고...
생각만 해도 아득한지라 현빈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전화 위복이라고 생각해야지. 너 다음 촬영장이랑 비형랑 촬영장이 근처 건물이라서 볼 수 있는 게 어디야?"
그건 그렇지만. 현빈은 예주의 냉철한 위로를 듣고는 울상이었던 표정을 조금이나마 폈다.
"너 피곤하지 말라고 오늘 내가 대신 운전해 주잖아. 애초에 후반 촬영은 문제없이 볼 수 있으면서, 난 그것도 못 한다고."
현빈의 미소가 약간 돌아온 것을 확인한 예주는 장난스레 툴툴거렸다.
"아! 저기 아이들 촬영 시작하세요."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이 하나 둘 자신의 자리에서 꼼짝없이 서 있기 시작하는 걸 보고 선미 씨는 자신의 아들을 향해 손을 휙휙 흔들었다. 서명인 군도 그에 맞춰 통통한 팔을 휘적거렸다.
'이놈도 제 나잇대 치고는 발육이 빠르단 말야.'
그 옆에서 같이 앉아있던 명인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나야 정신은 천 살이 넘었으니 당연히 상호작용이 일찍 되지만, 얘 나잇대면 원래 인사도 잘 안 되지 않던가.
'으음, 갓난아기를 키운 지가 꽤 오래돼서 생각이 안 나네.'
대부분의 생애에서 학자거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사빈은 결혼은 잘 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아이를 키우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러고 보니 직전의 생에서 아내가 있었던가...아.'
그 때 금슬은 좋았지만 아이가 낳자마자 죽었었군. 사빈은 2차 세계대전 중 아내가 보내온 편지에 적혀있던 글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털었다. 지나간 슬픔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감정이나 사고, 사상과 노하우는 그걸 터득한 생애에서만 활용하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 버린다, 혹은 잊는다.
그것이 30번이 넘는 생을 살면서 사빈이 알아낸 자아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후우, 다시금 '선우사빈'으로 돌아온 사빈은 기지개를 쭈욱 폈다.
"자, 셋 세면 들어갑니다. 하나~"
'첫 촬영은 단순히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여자아이를 한 번 보면 된다 했지.'
"둘~"
진짜 어린아이에게라면 모를까 자신에게는 케이크 한 조각만큼 쉬운 일이니, 사빈은 아무런 긴장도 없이 촬영에 임했다.
"셋!"
틱틱,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달그락. 사빈은 나무 느낌의 도색이 된 플라스틱 블럭 하나를 집고, 매트 위에 놓인 크고 평평한 블럭 위에 쌓았다.
턱.
타이밍 좋게 명인이도 잡고있던 블럭을 또 위에 올려놓았다.
달그락, 턱, 달그락, 턱.
몇 번의 움직임이 기세좋게 오가고, 그에 맞춰 블럭 탑도 점점 높이 세워진다.
그 모습을 어떤 여자아이 하나가 빤히 지켜본다. 이제 막 14개월, 13개월에 이른 둘보다 좀 더 키가 크지만 차이가 엄청나게 나진 않는다. 18~20개월 쯤 됐을까.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유하림(한주희 분)의 아역이다.
이 다음 장면에서 어린 하림은 두 남자아이가 탑을 쌓는 모습을 보고 경쟁심을 느껴 혼자서 블럭탑을 더 높게 쌓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다시 가겠습니다."
"다시 갈게요~"
"다시요."
"다시 해볼게요!"
"다시!"
어린아이의 인지능력 탓인지, 어린 하림 역을 맡은 아이가 자꾸 탑을 쌓지 못하고 쓰러트린 것이다.
'아니, 이게 그렇게 어렵나?'
사빈은 약 6번의 촬영 시도 동안 탑만 계속 쌓고 있자니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한 터라, 여자아이의 탑 쌓기 실력에 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야 그렇다 치고 내 옆에 14개월짜리인 이 남자애도 잘 쌓는 걸 쟨 왜 혼자서 못 하지? 순수한 의문도 섞여 있었고 말이다.
사빈은 슬쩍 감독과 스태프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이 장면을 포기할 생각은...없는 것 같네.'
아역들끼리 노는 씬의 내용 정도야 얼마든지 수정 가능한 부분이지만, 아까 스토리감독 옆을 지나가다 엿들은 대화에 따르면 탑은 드라마 비형랑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계속 등장할 상징물이라서 이 장면을 버리기 싫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사빈은 이 다음 시도에서는 자신이 은근슬쩍 염력을 이용해 어린 하림을 도와줘야 한다고 계획했다. 수미상관 구조가 들어있을 뿐인 이 사소한 장면에 처음부터 붙들려 있으면 좀 그러니까.
"다시, 큐!"
감독의 사인과 동시에 사빈과 명인은 블럭을 쌓기 시작했다.
턱, 턱, 턱, 턱.
슬슬 이 둘은 요령이 생기는지 경쾌한 박자감이 이어졌다. 이제 이 이후엔 여자아이가 더 빠른 속도로, 더 높이 탑을 쌓아야 하지만...
탁, 타다달그락.
'역시.'
이번에도 어린 하림이의 탑은 무게중심이 서서히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4개 쯤에서 영 불안하다 싶더니, 5번째 블럭을 놓자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 사빈은 아주 작게 한숨을 쉬고는 염력을 쓸 준비를 했다. 최소한 염력으로 블럭이 쏠린 쪽을 막아놓으면 쓰러지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사빈이 상상도 못했던, 정확히 말하자면 고려하지도 않았던 변수가 발생했다.
—툭.
제 옆에 있고, 자신보다 여자아이에게 가까이 있던 명인이 어린 하림이가 쌓고있던 탑을 슬쩍 민 것이다. 무게중심이 옮겨지고 있던 방향의 반대로, 탑이 다시 균형을 되찾을 수 있게.
'어라?'
이쯤에서 사빈은 의아함을 느꼈다. 저 놈 뭐지?
몇 개월 더 일찍 태어난 하림 아역도 제대로 못 쌓는 탑을, 그 7할 정도밖에 살지 못한 서명인이 무게중심을 완전히 맞춘다?
인지능력의 차이를 고려하자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냥 탑을 쌓는 것 뿐일 땐 우연찮게, 혹은 본능적으로 무게중심을 설정하고 쌓으면 되지만, 무너질 뻔한 탑을 수정하는 건 애초에 무게와 균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니까.
저 탑이 곧 무너질 상태라는 걸 인식하고, 어느 방향으로 무너지는지를 예상하고, 반대로 옮겨가려면 블럭의 어떤 부위를 밀어야 하는지 계산하고, 이동하는 무게중심의 목적지를 탑의 중앙으로 놓기 위해 필요한 힘을 조절하는 것.
작은 일에도 인간의 무의식은 아주 많은 사고를 한다. 아이의 인지능력이 성인보다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지금 서명인은 나이에 맞지 않는, 아주 고차원의 인지능력을 보였다는 뜻이다.
사빈은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현실적인 사유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중, 납득이 되는 가설 하나를 찾았다.
'설마 저 놈, 제페토가 만들어낸 안드로이드 같은 건가?'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화 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staff의 한글 철자는 스테프가 아닌 스태프더군요. 근데 왜 스텝이라 줄이는 건 되는 걸까요. 언어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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