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ia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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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삼
작품등록일 :
2012.09.18 13:35
최근연재일 :
2012.09.18 13:35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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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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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새 소설) 양아치 -01

DUMMY

01 -양아치





눈을 떴다. 몇 번을 깜빡였다. 눈이 뻑뻑하다. 소매로 입을 닦았다. 토사물 특유의 시큼하고 역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침을 삼켰다. 바짝 마른 목젖이 꿀렁거렸다. 마른 흙을 삼키는 것처럼 목이 칼칼하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아직, 세상은 어둡고도 흐릿하다. 여전히.....


“해가 뜨긴 뜨는 구나......”


안개 때문에 산 능선의 실루엣이 흐릿했지만, 산등성이를 타고 넘실거리는 빛은 분명히 붉었다. 새벽이 오는 게지.....새벽은 항상 도둑놈처럼 넘어오니까. 속에서 구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빈속에 쓰라림까지 겹쳐 신물이 올라왔다. 다 비웠는데도 아직 나올게 있는 모양이다. 사내, ‘건’은 다시 눈을 감았다. 초여름 밤이라지만 뼛속까지 으슬으슬 떨렸다. 새벽녘 찬 공기를 따라 입에서 김이 올라왔다.


하늘이 희뿌옇게 열릴 무렵, 건은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밤 이슬에 젖은 등이 축축하다. 반쯤 열린 눈에 새벽 빛이 열어놓은 세상의 풍경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숨을 깊게, 그리고 천천히 들이마셨다. 몽롱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젖은 황토에 듬성듬성 박힌, 아직은 뿌리가 내리지 못한 잔디가 눈에 아프게 밟혔다.


건은 비척거리는 걸음을 옮겨가며 주변을 알뜰하게 정리했다. 여덟 평 남짓한 묘소 주변에 널려있는 소주병을 치우고, 쓰레기를 차곡차곡 비닐봉지에 담았다. 조금 움직였는데도 입에서 단내가 났다.


풀썩 자리에 앉았다. 반쯤 열려있는 눈 앞에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도 헐벗은 봉분 두 기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새벽에 내린 가랑비에 젖어 산소 등어리가 붉고도 붉었다. 건은 눈을 비볐다. 꺼끌한 흙이 눈두덩에서 질척거렸다. 치렁한 긴 머리를 개처럼 좌우로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어색하고도 생소하다. 사흘이 지났지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옆자리를 더듬었다. 마시다 남은 소주가 하나쯤 있을 텐데......


해가 뜬다. 긴 그림자가 두 개의 봉분 위에 드리워질 때까지 건은 무릎을 세운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제 먹다 남은, 두어 모금 정도 남아 있는 소주병을 입에 가져갔다. 미적지근한, 물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가 목을 타고 흘렀다. 입가에 흘러내린 물기를 스윽 닦고, 한 손으로는 쓰레기 비닐 봉지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굽혀 꾸벅 절을 했다. 몸이 휘청거렸다.




“이제 갈게요.”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내는 엉거주춤 서서 뭔가를 기다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이 입술을 적셨다. 건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입술이 실룩거리더니 기어이 입을 열었다. 정말 불러보고 싶었던 말.


“엄마.....”

“아빠.......”


건은 코를 훌쩍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고등학교 이후부터였던가? 대가리가 커버린 이후 절대로 쓰지 않았던 호칭이다. 이제라도 불러보고 싶었다. 어머니, 아버지 보다는 그게 좀 더 가까워 보여서...... 이제 다시는 쓸 수도 없게 되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등을 돌렸다. 때마침 산등성이를 비집고 나오는 아침햇살이 눈을 찔렀다. 물방울 하나가 눈꼬리에서 볼을 타고 흘렀다. 이게 이슬인지, 빗물인지, 눈이 따가워서인지, 아니면 눈꼴이 시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그도 모른다. 물은 샘이 터진 듯 끊임없이 흘러 볼을 타고 떨어졌다. 축축히 젖은 망막에 닿아있는 세상은 이리저리 굽어 있었다. 붉은 하늘이 퍼렇게 멍들어 갈 무렵, 비척거리는 몸을 따라 그림자가 까불거리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묘비 명이 없는 두 개의 무덤이 등뒤에 남겨져 있었다.



* * *



지민은 기분이 나빴다. 아침에 나올 때부터 상민이 년이 사고를 쳐서 일진이 사납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제대로 걸린 것 같다. 이번 주는 정말 몸조심해야지. 옆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 진상은 대체 뭐야?’


스캔하듯이 지민의 눈길은 옆자리 인물의 위 아래를 훑었다. 창 측에 앉은 남자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꺼억- 트름 소리도 들렸다. 벌써 세 번째다. 이윽고 남자의 속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냄새가 아름답게 퍼졌다. 지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심호흡을 해야 했다. 딱 하나 남았던 자리였다. 왜 이 자리가 비어 있었는지 앉고 나서야 알았다.


사내는 젊었지만 초췌하고도 추레해 보였다. 듬성듬성 난 수염, 며칠간 세수를 하지 않은 얼굴, 어깨까지 내려오는 치렁한 장발, 가리워진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쑥 들어가서 퀭한 눈. 두껍고 낡은 점퍼, 흙이 잔뜩 묻은 노숙자 패션에, 오전부터 소주 냄새가 진동했다.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어지간히 재수 털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 같다. 차라리 한 시간을 더 기다리더라도 다음 차를 탈 걸 그랬나? 후회도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그녀가 타자마자 차는 날름 출발해 버렸다. 이제부터 불안하게 3시간을 버텨야 하는 거다. 재수없는 날이니까 5시간이 될 지도 모른다. 지민은 아침 일을 생각하며 다시 이를 갈았다.


‘상민이 년만 아니었어도..... ‘


일요일 서울행 고속버스는 언제나 만원이다. 특히 연휴 마지막 날은 오전부터 자리가 없다. 지민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인-이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검색했다. 원래 이런 장거리 여정에는 자장가를 겸할 수 있는 조용한 음악을 들었지만,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K-POP으로...... 볼륨을 크게 키웠다. 그래도 옆자리에서 풍기는 구릿하고 시큼하고 퀴퀴한 냄새 때문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매너도 참......”


지민은 들릴락 말락 작게 투덜거렸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소심한 항변이었다. 옆에 있던 사내가 들었는지 힐끔 한쪽 눈을 뜨고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지민은 기척을 느꼈지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시골에 두고 온 아픈 엄마, 병든 아빠의 얼굴이 다시 겹쳐졌다. 그리고, 직장. 고단한 일상. 하기야..... 그녀의 직장이라고 더 나을 것도 없는, 시궁창과 다를 바 없건만.....


지민은 허리를 일으켰다. 머리가 띵했다. 한쪽 귀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다른 쪽에서는 빠진 이어폰 스피커가 불안하게 짹짹거렸다. 눈을 떴다. 선잠이 덜 깼는지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무슨 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홱 잡아챘다. 고개가 모로 빙글 돌았다. 하나 남은 이어폰이 귀 바깥으로 쑥 빠져나가며 세상이 떠드는 생생한 소리가 들렸다. 허리띠가 확 당겨졌다. 몸이 돌았다. 헝겊 허리띠가 툭- 끊어지는 느낌 뒤, 손 하나가 겨드랑이 안쪽으로 거칠게 파고 들어왔다. 손바닥은 처녀의 뭉클한 가슴을 쿡 잡아 누르더니 허리까지 거침없이 내려왔다. 브래지어 끈이 툭 끊어졌다. 몸이 허공에서 반대로 돌았다. 이어, 거친 손길이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를 좌악 쓸어 내리며 종아리 옆을 툭 건드렸다. 몸이 붕 뜬 채 허연 다리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악쓰는 소리를 지르던 찰나, 머리 위로 마구 쏟아지는 것들로 인해 그녀의 비명소리는 진압당했다. 엉덩이에 푹신한 뭔가가 닿는 느낌을 끝으로 지민은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죽일……”

그녀는 뒤쪽 그 누군가에게 쌍욕을 하려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앞을 바라보았다.


“헉......”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들숨과 함께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눈 앞에는 고개가 모로 꺾인 사람이 창틀에 기댄 채 눈을 흡뜨고 있었다. 그의 아래 쪽은 보이지 않았다. 붉고 매캐한 연기와 뽀얀 먼지가 광풍처럼 미쳐 날뛰는 공간에서 모든 것은 희뿌옇게 보였다. 언뜻 보이는 버스는 거꾸로 비스듬하게 누워있었고, 부서진 파편 뒤로 여기저기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일부는 허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몸과 몸의 일부가 여기저기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에 끼인 채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도 있었다. 유리창을 따라 허연 것과 붉은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버스가 다시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다 멈췄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어깨에서 다리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사고?”


지민은 벌벌 떨리는 손을 바쁘게 놀리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몸은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바닥의 쿠션이 충격을 완화시켰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밖에.... 아직까지는……


“음-”

신음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신음소리는 사방에서 들렸다. 그렇지만 그녀가 들었던 소리는 곁이 아니라 아래였다. 좀더 또렷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 아래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느낌도.


“비켜줘.....”

“네?”

“엉덩이!”


지민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엉덩이 아래,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뭔가 킁킁거리는 거친 숨소리도. 지민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제야 자신이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아래 푹신하게 깔고 앉아있는 것이 어떤 사내의 얼굴이라는 사실도. 매우 민망할 상황이었지만, 지금 그런 걸 의식할 겨를은 없었다.


“미안해요.....”


지민은 가까스로 대답하며 몸을 비틀었다.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딱히 운신할 만한 공간은 없었다. 깨진 유리를 피해, 꺾어진 쇠막대를 지나, 부서진 의자 파편을 넘어 엉금엉금 기었다. 뒤쪽 속옷이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깨진 유리를 피해 자리를 벗어난 뒤에야 아래를 바라 볼 수 있었다.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취한 듯 반쯤 감긴 눈.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렇지만 이 분위기에 맞지 않게 왠지 무심해 보이는. 그는 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좌우로 훔쳤다.


“노숙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급히 삼켰다. 그렇지만 표정은 조금 더 냉정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때가 잔뜩 낀 그의 손가락에 걸려있는, 끊어진 자신의 알록달록한 허리 띠를 보고 난 뒤였다. 그 짧은 순간에도 아까 겪었던 여러 상황이 뇌리에서 빠르게 재생되었다. 뭔가 적당한 말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지민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민은 사내의 반쯤 감긴 눈길을 바로 외면하곤 통로를 찾았다. 그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리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강했다. 상황은 매우 위험해 보였고, 일단 사태를 파악해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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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아치 -02 +14 12.08.11 14,542 104 13쪽
» (새 소설) 양아치 -01 +52 12.08.11 25,552 107 11쪽
2 독자 제위께..... +178 12.02.10 18,991 97 3쪽
1 요즘 근황, 에뜨랑제 관련 이야기 +133 10.12.09 26,538 6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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