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ia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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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삼
작품등록일 :
2012.09.18 13:35
최근연재일 :
2012.09.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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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1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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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양아치- 05

DUMMY

05- 양아치



건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언제나 신기하고도 새롭다. 6월 초여름 무성해진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햇살이 제법 따갑지만, 바람은 시원하고, 공기는 맑았다.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가슴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오랜만에 허리 띠와 마음을 함께 풀어놓고 청한 잠은 무척 달았다.


해가 서쪽으로 향해 갈 무렵, 건은 눈을 떴다. 몸을 만져본다. 옷은 대강 다 말랐다. 손을 뻗어 가방을 만져본다. 갈색 낡은 가죽 가방. 아직도 축축하다. 응달에서 바람을 맞아가며 정성스럽게 말려야 하는 놈이라서 항상 이렇게 시간을 죽이게 만든다. 무릎에 놓고 가방을 열었다. 3중으로 된 지퍼를 열어 전화를 꺼냈다. 가방 안쪽은 젖지 않았다. 특수지퍼라서 수중 50미터까지도 방수가 되니까. 가방을 뒤적거려 약 봉지를 찾아냈다. 작은 약병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지독하게 쓴 맛이 중노동 후 나른해진 정신상태에 테러를 가했다.


건은 치밀어 오르는 쓴 물을 다시 삼키며 폴더를 열어 전화 주소록을 살펴본다. 그의 주소록엔 딱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전화를 할 사람. 전화를 받을 사람. 그리고, 전화를 받지 말아야 할 사람.


그 중 한 사람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할 사람이었다. 신호가 갔다. 그런데 상대는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참 기다리다 폴더를 탁-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요즘은 모르는 사람 번호가 찍혀 있으면 잘 받지 않는다. 이 사람은 더욱 그럴 것이다. 자신의 번호를 기억이나 해 줄까? 아니,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건의 얼굴에 미소가 고였다. 역시 혼자만 생각했던 것이었지......


건은 다시 풀썩 누웠다. 이제 서둘 일도, 기다려주는 이도 없다. 이 세상엔. 어느 새 해가 서쪽 끝에서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이제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 그의 현실세계로 가는 고단한 길을 열 수 있겠지.


* * *


하영은 전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는 이름이다. 잊혀진 이름이다. 그리고 잊어야 할 이름이다. 전화는 조금 울리다가 끊어졌다. 괜히 기분이 나빴다. 이 전화는 아주 오래 울렸어야 했다. 마지막 종료 메시지가 나가고, 뚜뚜 소리가 나고, 다음 통화까지도 시도해봐야지. 나쁜 새끼.


“누구야?” 친구가 물었다.

“글쎄..... 누굴까?”

하영은 연락처를 찾아 메뉴를 눌렀다.

-삭제하시겠습니까?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승인’을 눌렀다. 이름이 정말로 싹- 지워졌다. 하영은 지워진 화면을 다시 바라보았다. 풋- 웃었다.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 흔적도 없었다. 마치 애초에 그 이름이 없었던 것처럼.


“버려!“


하영은 정말 오랫동안 써왔던 싸구려 구형 휴대전화를 매니저 친구에게 툭- 던져 넘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환호성이 들렸다. 그녀는 비로소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자신의 세계로 가는 자유. 환호와 함성이 가득한 곳. 환상이 현실이 되는 세계. 다른 말로 판타지 세계.



* * *


“유건, 이 새끼. 살아있긴 했구나. 어디서 뒈져버린 줄 알았다.”

김진석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오자 마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건은 얼굴을 찡그리며 팔뚝을 문질렀다. 그렇지만,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세월이 꽤 지났는데도 이놈은 변한 게 없다. 그래서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됐다.” 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무슨 일로 잠수 탄 거냐? 어디 보자. 마지막 본 게 2015년이었으니까, 군대까지 합하면 7년 동안 사라졌던 거네?”

“많이 아팠다.” 건이 쓰게 웃었다.

“아무리 아파도 전화는 할 수 있었을 거 아냐! 그게 말이 돼? 새꺄!”

“곧 선생 될 넘이 입 참 걸지네. 애들이 너한테 뭘 배우겠냐?”

“니 걱정이나 해 자슥아. 근데 진짜 너 어떻게 된 거야?”

“여기에 문제가 있어서......”

건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진석이 픽 웃었다.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혹시...... 기억상실이라고 말하려고 했냐?”

“비슷해.......”

“너 시방 소설 쓰는 거지?”

“아니, 정신병 맞아. 맛이 좀 갔었다.”

“넌 원래 맛이 간 게 정상이었잖아? 전문용어로 꼴통.”

“이번엔 진짜라니까.”

건이 웃었다. 진석이 눈매를 좁혔다. 이 친구가 자신에게 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하기야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슨 상관이랴.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세상인데.

“지금은?”

“이젠 다 나았어.” 건이 씨익 웃었다.

“그래서 이제야 복학하려고?” 진석이 물었다.

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위는 여러 모로 필요하겠더라고.”

“철들었네.”

“나이도 들었지.”

“3학년 때 휴학했지? 요즘 커리큘럼 많이 바뀌었다. 따라가기 빡셀거야.”

“네가 도와주면 되지. 전임강사 됐다며?”

“기대하지 마라. 예전처럼 쌈질하러 다니느라 리포트 대필시키고, 얼라들 시켜 대출하고 그런 거 이제는 안 통한다. 위치추적, 출석인증은 휴대폰 인증으로 자동 처리하거든.”

진석이 빙긋 웃었다. 고소하다는 표정이다.

“세상 참 팍팍해졌구만. 대학의 낭만이 사라졌어.” 건이 한숨을 쉬었다.

“낭만을 이야기하기엔 네 연식이 좀 됐다고 생각하지 않냐?”

“그렇기야 하지. 큭-”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아픈 이야기는 건드리지 않았다. 만날 때부터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쌓아놓은 얼음이 깨지면, 그때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건은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긴 머리를 뒤로 묶어서 이마가 훤하게 드러났다. 평균보다 큰 키에, 탄탄한 몸매가 아니라면 얼굴 선이 부드러워서 여자로도 착각할 모습이다. 세월이 지났는데도 학생회관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하다. 카페에 걸린 대형 TV에서는 뉴스가 실시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1주일이 넘어갔는데도 영동고속도로 대형 사고에 관한 뉴스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건은 단순한 교통사고에서 다문화정책을 둘러싼 정치공방으로, 그리고 이해관계자간 거대한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있으며, 이미 각 도시의 슬럼화된 구역에서는 무장한 세력간 테러, 한국계와 외국계 조폭 간에 무력 충돌도 일어나고 있었다.


TV 의 화제는 이름없는 영웅으로 넘어갔다. 이제 사골이 될 정도로 우려먹어 국민 들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버린 동영상이 또 등장했다. 특히 오지민 기자가 잡았던 마지막 구조 장면 동영상은 거의 1억에 가까운 재생횟수를 기록 중이고, 현재도 전 세계 접속자를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 영웅, ‘시민 S’를 위한 팬 카페도 생겼다고 한다.


“갸 네들 말야......”

진석이 TV 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다. 건이 그를 바라보았다.

“학교에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이 있어.”

“그래?”

건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네가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혹시 KGB냐?” 건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진석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 놈 취향이 워낙 까다롭고 독특했잖아. 이 자유로운 학교 밖으로 나가서 뭘 할 것 같지는 않아. 여전히 정보역학 쪽이냐?”

“교수 자리 꿰차고 있지. 벌써 부교수다. 그 나이에. 큭큭. 애비도 천재지만 그 넘은 진짜 천재 맞아. 게다가 변태 싸이코패스라서 정말 위험하지.” 진석이 웃었다.

“가장 자유롭고 안전한 곳에서 둥지를 틀었구만. 그런데 왜?”

“별로. KGB 덕택에 네가 복학한 걸 곧 모두가 알게 될 거란 거지. 알만 한 놈은 모두.”

“다른 놈들은 잘 있대냐?”

“졸업해서 사회에서 한 자리 꿰차고 있지. 모두 빵빵한 가문의 후계자들이니 이미 대단한 권력기반을 다지고 있고.”

“재미없는 이야기네. 이젠 나랑 상관없잖아?”

건은 남은 커피를 홀짝 마셨다. 진석은 시계를 보았다. 이제 수업 시간이다.

“글쎄, 세상이 다 그렇지 뭐. 나 간다.”

“멀리 안 나간다.” 건이 앉아서 손을 흔들었다.

“새끼...... 뽀대는 여전하네.”


진석은 건의 어깨를 툭 치곤, 태블릿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기 전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건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눈을 비볐다. 그는 어두운 곳에 있었지만, 왠지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빛은 무척 푸르고도 선명했다. 12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단 한 번 보았을 때보다도 더 강했다. 진석은 가슴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저 빛을 본 사람이 자신 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문득 떠 올렸다. 또 하나의 전설적인 웃음거리가 될 자신 만의 농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진석은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손 끝이 조금 떨렸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신호소리가 울렸다. 진석은 담배 연기를 길게 후- 내뱉었다. 수신음이 떨어졌다.


- 왜?

“건이 만났다.

- 누구?

“건. 유건”

-........

“살아있더라.”

-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안 만날 거냐?”

- 내 입장 잘 알잖아?

“알지. 그래도 넌.....”

- 나, 지금 회의에 들어가야 하거든? 나중에 이야기 하자.


전화가 끊겼다. 진석은 한 모금 더 빤 후 담배를 비벼 껐다. 제일 담이 작고 입이 가벼운 놈에게 연락해뒀으니 내일쯤이면 다섯 명 모두가 소식을 알게 될 것이다. 진석은 어깨를 으쓱하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리를 쭉 펴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얼굴에 조그만 미소가 번졌다.


‘꼭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정말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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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아치 -02 +14 12.08.11 14,542 104 13쪽
3 (새 소설) 양아치 -01 +52 12.08.11 25,552 10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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