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ia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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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삼
작품등록일 :
2012.09.18 13:35
최근연재일 :
2012.09.18 13:35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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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0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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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양아치- 22

DUMMY

22- 양아치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에서 폭죽이 터졌다. 강남은 매일이 축제의 장이다. 폭죽이 터지는 섬광에 사람들의 얼굴 색깔이 카멜레온처럼 변했다. 하늘은 여전히 검었다. 가로수들이 강한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국희는 시계를 보았다. 8시 10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최신형 스마트폰이다. 한입 베어 먹힌 하얀 사과로고가 요염해 보인다. 앱(app)을 띄워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암호를 입력했다. 메시지가 하나 떠 있었다. 메시지를 바라보는 국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건이 돌아오고 있었다. 국희는 스마트폰을 품에 갈무리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 닳겠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니?” 건이 웃으며 앉았다.

“얼굴은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있긴 해요.”

“내 얼굴이 좀 생기긴 했지.” 건이 웃었다.

“여자를 불행하게 하는 얼굴이기도 하죠.” 국희가 대꾸했다.

“부정하진 못하겠다.” 건이 멋쩍게 웃었다.

“난, 오빠를 무척 좋아했어요.”

국희가 머리카락을 젖혔다. 눈은 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또 그런다. 왠지 쑥쓰럽네.”


“그래서, 난 오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죠.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국희의 얼굴은 진지했다. 건은 눈을 가늘게 떴다.

“......”

“선아가 오빠를 저에게 처음 소개시켰을 때를 기억하세요?”

“글쎄.”


건이 마지막 아이스크림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매우 달았다. 만족스런 맛이다.

“학교 근처 카페였지. 이름이 파스쿠치였던가? 쓸데없이 비싼 곳. 이곳처럼.”

건이 다시 쿡쿡 웃었다. 국희의 표정은 약간 더 굳어 있었다.


“그때 제가 드린 것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꽤 특이한 경험이라서.”

“그게 뭐였죠?”

“시집. 네 손때로 비닐 표지가 너덜너덜 해진 것.”

“그 제목도...... 기억하세요?”

“말도로르의 노래, 로뜨레아몽 백작”

“그 책을 보고, 다음에 둘이 만났을 때 오빠가 제게 한 말도 기억하세요?”

“다시 듣고 싶니?”

건이 두 손을 깍지끼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시선은 여전히 국희를 향해 있었다.

“아뇨, 하지 마세요.” 국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넌 변한 것이 별로 없구나. 의심이 참 많아. 항상 목이 마른 꽃뱀 같았지.”


국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건은 깍지를 낀 손을 스트레칭 하듯 뒤로 젖혔다. 그 동작 하나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국희는 꼰 다리를 풀고 상체를 앞으로 세웠다. 눈빛이 가라 앉았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게 바뀌면 의심을 하게 되죠.”


건은 고개를 들어 국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짙은 마스카라 때문인지 눈은 훨씬 깊어 보였다. 국희의 입 꼬리가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가령?” 건이 물었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가 되어 있다거나.”


“그리고?”

건이 깍지를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짧고 뭉툭했던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졌다던가.”

“......”


“그런데도,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그의 향기가 있죠. 직감, 아니면 느낌 같은 거. 그래서 나는 무척 혼란스러워요.”

“.......”


“지난 번부터 정말 궁금했어요.”

“.......”


턱을 괴고 국희가 건을 바라보았다. 상체를 더 숙였다. 깊게 파인, 단추 하나를 열어 놓은 붉은 브라우스 사이로 가슴 골이 깊게 보였다.


“그대는 대체 누구죠?”

국희가 조용하게 물었다. 폭죽에 비친 눈빛이 붉게 빛났다.


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올라갈 만큼만. 시선은 여전히 국희의 눈에 맞춰져 있었다.


“나도 그게 궁금해.”

“.......”


“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괜찮겠니?”

“그게 무슨 말.......”


국희는 소리를 지르려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옅은 미소에는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국희는 사내의 눈가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농담도 아니고 비웃음도 아닌, 짙은 에스프레소같이 아주 끈적하고 쓰디쓴 것. 농밀한 슬픔. 숙성된 분노.

그리고 그 안에 깊숙하게 자리를 틀고 있는 묵직한 존재감. 심연처럼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위험한 기운, 혹은 분위기.


“국희야”

“네……”

“내가 겪었던 세상은 말이다……”

“……”

국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으니까.


“아주 달랐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지. 로뜨레아몽 백작이 24살 짧은 생애 동안 보았을 어떤 신(神)처럼......내 나이 스물 넷에는 무엇을 봤는지 아니?”

“.......”


“네 나이 스물 넷엔 무엇을 보았었지?”

건이 물었다. 마치 허공에 대고 독백하는 것 같았다.

“......”


국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소녀시절 읽었던 ‘말도로르의 노래’ 만큼 이나.


문장과 문장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고, 아이디어가 이어지지 않았다. 시도 산문도 아니었다. 온갖 기괴한 상징과, 섬뜩한 악의(惡意), 공감할 수 없는 탄식, 욕설과 배설, 근친교배, 신성모독과 온갖 고함소리로 가득 찬 텍스트. 참고 견디며 1장을 넘기기가 그토록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 난해한 글 타래 속에는 빠져 나오기 어려운 묘한 마력이 있었다. 상심한 소녀에게 그 텍스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 랭보와 보들레르에 탐닉하며 그 방탕과 일탈, 그리고 고통의 시어(詩語)에 익숙해졌다.


그때 그가 지적했던 끔찍한 독설처럼, 자신은 겉멋과 지적(知的) ‘빠다(Butter)’가 잔뜩 들어있는 거품 허세 덩어리였는지도 모른다. 허세 덩어리가 맞다. 지금도 지적인 어휘를 굴려 고고한 척하며, 몸을 판 돈으로 그 몸에 처바른 명품처럼. 그 사치품으로만 인간을 평가하게 된 썩은 눈깔처럼.


“나는 건. 너를 슬프게 했던 유건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변함없어. 부디 의심하지 마라.”

“……”

“난, 원하지 않았던 삶을 살아왔어. 그런데, 깨어나보니 모든 걸 잃었다는 걸 알았지. 내 가족. 그리고 나 자신."

"......."

"나는 나 자신의 정체성, 내 기억, 내 가치를 포함한 모든 것을 바닥까지 의심해야 했지. 이제부터 내 것을 되찾으려고 해. 그런데 혼자 힘으로는 벅차더라. 외롭기도 하고.”

“……”

“네가 조금 도와줬으면 해.”

“……”

“미안하다."

"!"

"과거 내 어리석은 행동 모두에 대해.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어.”

“오빠.....”


“대신 너를 지켜줄게. 너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건이 일어섰다. 손을 내밀었다. 굳은 살이 알알이 박힌 손바닥. 가늘고 긴 손가락. 국희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건은 국희가 코트를 입는 것을 도와준 뒤 벗어둔 자신의 코트를 걸쳤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국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몸을 감싸 안 듯 돌려 세웠다. 국희는 그의 품에서 바다냄새를 맡았다. 비릿하면서도 짭조름하고, 왠지 그윽한 향이 스며있는 정겨운 체취.


밖으로 나오는 국희의 표정이 미묘했다. 계산은 이미 되어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왠지 소녀처럼 가슴이 뛰기까지 했다. 그가 지켜주겠다는 말씀은 꿀과 같이 달았다. 그녀는 위로를 받았다고 느꼈다. 설령, 그가 한 말이 모두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가 전처럼 강하다고 해도 결코 해결할 수 없을 일이지만. 그리고 그가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검은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거렸다. 웅장한 천둥 소리가 뒤를 이었다. 새까만 하늘을 섬광이 쪼개듯 가로질렀다. 심판의 날처럼. 장대비가 쏟아졌다. 늦깎이 막내 태풍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강남의 밤은 그래도 밝고 아름다웠다. 건은 이 타락한 거리에서 어떤 기시감(旣視感)을 느꼈다.


질투할진저, 소돔의 사람들아!

하늘에는 분노가, 지상에는 낙원이!


거리엔 그 많았던 사람이 비에 쓸려 나간 듯 사라졌다. 빗방울이 튀기며 건의 바짓단과 국희의 스타킹을 축축하게 적셨다. 작은 우산 속에서 국희는 작은 새처럼 건의 코트 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건이 국희의 귀에 속삭였다. 빗소리와 어울리는, 매우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따뜻한 입김이 연인에게만 속삭이는 밀어처럼 국희의 귓가를 간질였다. 국희는 몸을 움찔했지만 더욱 깊숙하게 안겼다. 달콤한 불가리 향수 냄새가 옅게 퍼졌다.


“이제, 내 동생, 선아 이야기를 좀 해 줄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떠셨지? 그리고......”

“.......”


“넌, 왜 날 기다린 거니?”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4

  • 작성자
    Lv.1 무림사인
    작성일
    12.09.03 23:25
    No. 31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시해
    작성일
    12.09.04 10:47
    No. 32

    너무 잘보고갑니다~ 언제나 좋은글 감사합니다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3 멜체른
    작성일
    12.09.16 02:07
    No. 33

    허영만님의 캬멜레온의 시, 말도로르의 노래라는 단어에 저도 떠올렸는데 같은 걸 떠올린 분이 계시네요. 요즘 읽을 만한 글이 참 드문데... 요삼님의 글은 보면 볼수록 좋네요. 그런데 예스24에 에뜨랑제 전권결재는 없나요? 에뜨랑제 보다가 말아서 보긴 봐야하는데 ^^; 그리고 종이책은 전혀 계획에 없으신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pr*****
    작성일
    12.09.19 12:44
    No. 34

    건필하십시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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