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둥이에서의 일상
독일군 내부에서는 공산주의로 의심되는 자가 있으면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 지침은 슐레프 중대에도 내려왔다. 궁뎅이(지휘소, 치료소, 보급소가 모여있는 곳을 지칭하는 속어)에서 휴식을 취하는 오토와 동기들도 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산주의자 새끼들은 이해할 수가 없네! 고작 이념때문에 조국과 여태까지 같이 싸웠던 동료들을 배신하고 소련 편에 선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로스케(소련군)도 자기 나라 지리켜고 싸우는거지 이념때문에 싸우는건 아닐텐데 말일세!"
오토 또한 말했다.
"공산주의자 새끼들은 처형당해야 마땅하네! 의심되는 새끼들 있으면 잘 살펴보게나! 아무리 내 소대원이라고 해도 절대 감싸주지 않을걸세."
지금 파르티잔들이 독일군의 보급 열차를 탈선시키기 위해서 철로를 걷어내는 등 후방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고 이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그래도 오토와 중대원들이 모여있는 궁뎅이에는 보급이 잘 된 것인지 물자가 풍부했다. 연료가 들어있는 제리캔, 수류탄 등이 산처럼 쌓여있었고, 항공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 그물망, 가짜 나무 등으로 엄청나게 잘 위장되어 있었다.
그 때 누가 외쳤다.
"우편병이다!!"
병사들이 모두 달려가서 우편병한테 자신의 편지를 내놓으라고 했다.
"내놔!! 내꺼야!!"
지금 궁둥이는 모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어떤 병사는 염소의 젖을 짜고 있었다. 염소의 젖은 철제 통에 꽤나 많이 받아진 상태였다.
제빵부대에 제빵사들은 빵을 만드는 차량, 일명 제빵 공장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다. 거대한 막대를 들고 빵을 굽는 일은 꽤나 더웠는지 놈들은 전부 웃통을 벗고 작업하고 있었다.
형벌 부대원들은 근처에 있는 과일 나무에 낑낑대며 올라가서 과일을 잔뜩 채집하고 있었다. 한 녀석은 손을 뻗어 과일을 따다가 그만 바닥에 털썩 떨어지고 말았다.
"젠장!!!"
다른 부대 녀석들은 과일 나무 옆에 트럭을 대고 트럭 위에 올라가서 편하게 과일을 따고 있었다. 형벌 부대원들은 이런 불평등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좆같은!!"
소대원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때, 형벌 부대 소대장 할더는 커다란 목재로 만든 오크통에서 발효시킨 흑맥주를 컵에 받아서 마시고 있었다. 오토와 동기들도 오크통으로 걸어가서 흑맥주를 받아서 마셨다.
"맛 좋다!"
"난 독일 맥주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슐레프 중대장은 소대장들한테 보드카 또한 나눠주었다.
"민간인들이 제조한 밀주일세!"
오토와 동기들은 상당히 진한 보드카를 맛보았다. 여태까지 행군하면서 마을마다 나이 든 아줌마나 할머니들이 통을 호스에 연결해서 밀주를 제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밀주를 판매하여 민간인들은 꽤나 수익을 올리는 모양이었다. 슐레프 중대장이 외쳤다.
"내일부터 다시 강행군이 시작될 것 일세! 오늘은 편히 쉬도록!"
슐레프 중대장이 떠난 다음 헬무트가 말했다.
"블라덱 그 녀석은 아직도 치료소에 쳐박혀 있냐?"
"꾀병 아냐?"
어쨋거나 오토와 동기들은 치료소에 있는 블라덱을 찾아가기로 했다. 블라덱은 맥주를 좋아했지만 오토와 동기들은 블라덱에게 맥주를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
"상처 치료에 맥주는 안 좋겠지?"
"당연하지! 상처났을때 술 마시면 곪을 수 있네!"
그렇게 말하고 오토와 동기들은 맛 좋은 흑맥주를 남김없이 다 마시고는 블라덱을 찾아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오토의 소대원 알프레트가 꿍시렁거렸다.
"정말 대단한 우정이야!"
요하네스가 말했다.
"우리한테도 먹을건 절대 안 나누잖아."
"빨리 집에 돌아가서 맥주나 먹고 싶다!"
흑맥주는 양이 부족해서 장교들만 먹을 수 있었던 것 이다. 전차병들은 장교들이 흑맥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너넨 집에 돌아가면 뭐할거냐?"
무전수 요하네스가 말했다.
"졸업시험 준비해야지."
요하네스는 김나지움을 졸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군에 끌려왔던 것 이다. 장전수 알프레트가 말했다.
"전쟁 끝나면 함부르크로 와! 우리 집 헌 책방 하거든! 책 한 권씩 줄게!"
오토 소대원들 중에 몇은 전차 측면에 설치한 해먹에 드러누워 편히 잠을 자고 있었다. 전차병들 또한 바닥에 담요를 깔고는 철모를 얼굴에 덮고 모처럼 휴식을 즐겼다.
"이대로 휴전이나 했으면 좋겠다..."
잠시 낮잠을 자던 전차병들은 근처에 하천에서 물을 떠와서 물뿌리개로 서로에 등에 뿌려주며 샤워를 했다. 물뿌리개로 동료들의 등에 물을 뿌려주던 에밀이 외쳤다.
"왜 계속 나만 뿌리는 역할이냐!!이젠 너네가 뿌려줘!!"
그 때, 알프레트가 묘안을 냈다.
"좋은 방법이 있네!!"
알프레트는 물뿌리개를 전차 포신에 하나씩 걸어두었고, 물뿌리게에서는 마치 샤워장처럼 시원하게 물이 나왔다. 전차병들은 이렇게 시원하게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어후 살 것 같다!!"
한편 오토와 동기들은 블라덱이 있는 치료소를 찾았다. 블라덱 녀석은 엉덩이가 거의 다 치료되었음에도 경상자들이 모여있는 치료소에서 파리 아가씨들이 나온 잡지를 보며 편히 쉬고 있었다. 동그란 선글라스를 낀 파리 아가씨들의 패션은 그야말로 근사했다.
블라덱은 손목에 줄을 걸고 있었다. 게오르크가 그 줄을 보며 물었다.
"이건 뭐하러 묶어둔건가?"
블라덱이 외쳤다.
"치료소에 워낙 도둑이 많아서 말일세! 내 지갑이랑 묶어둔걸세!"
"철두철미한 놈..."
오토는 블라덱에게 우편물과 염소 젖이 담겨있는 유리병을 내밀었다. 블라덱은 염소 젖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외쳤다.
"이제 다 나았대! 내일부터 다시 지휘할 수 있을걸세!"
블라덱의 궁둥이에는 다시 없어지지 않을 흉터가 남게 되었지만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 오토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내일 놈들의 방어선을 뚫어야 하네. 정보에 따르면 상당히 강력하게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다고 하네."
독일군은 진격할수록 점점 강력하게 구축된 소련군의 방어선과 맞닥뜨려야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 노인들까지 모조리 동원된 이 방어진지는 콘크리트와 장갑판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었다.
블라덱은 헬무트와 게오르크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 쌍안경으로 전방을 바라보고는 식은 땀을 흘렸다. 블라덱이 동료들의 어깨에서 내려온 다음 다시 치료소 침대 위에 엎드렸다.
"왠지 상처가 곪은 것 같네. 계속 치료해야겠어. 지휘권은.."
위생병이 말했다.
"완전히 다 치료되었네!! 병상이 부족하니 이만 나가보게!"
위생병은 엄한 표정으로 치료가 완료되었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위생병의 말은 타당했다. 이제 병상에 누워있는 녀석들은 대다수가 중상자였다. 한 보병 녀석은 다리에 깁스를 하고는 흥얼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블라덱이 목소리를 낮추고 수근거렸다.
"저 녀석은 평생 목발을 짚어야 한다더군."
볼프강이 한숨을 쉬었다.
"좋겠다. 저 녀석은 전역이네."
오토는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는 보병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은 놀랍게도 그림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오토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전역한다고 해도 다리가 저렇게 됐는데 저 녀석은 왜 웃는거지?'
그렇게 블라덱은 치료소에서 쫓겨나서 오토와 동기들과 함께 투덜거리며 자신의 소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때 블라덱이 동기들한테 말했다.
"이보게. 할 말이 있네."
오토는 뭔가 뜨끔했다.
'뭐..뭐지?'
블라덱은 자신들의 동기와 함께 티거 안에 들어간 다음에 입을 열었다.
"우린 돈으로라도 배상을 해야하네."
"뭘 배상해?"
"그 사건 말일세."
헬무트가 욕설을 퍼부었다.
"너 미쳤냐?"
볼프강 또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게 뭔 소리냐...어차피 헌병 조사도 끝났잖아!"
블라덱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잘못했으면 늘 돈으로라도 배상을 해야한다고 하셨네."
볼프강이 외쳤다.
"그게 돈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오토는 동료들이 떠드는 소리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식은 땀만 흘리고 있었다. 블라덱이 소리쳤다.
"최소한 그년 앞으로 먹고 살 돈은 줘야 할거 아냐!! 실어증 걸렸는데 일자리는 찾을 수 있겠냐?"
볼프강은 고개를 숙이고 귀를 틀어막았다.
"으으으...으아아..."
블라덱은 식은 땀을 흘리고 벌벌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아마 무죄 판결 받았으니까 어디 수녀원 같은 곳에 보내질걸세! 당분간은 거기서 먹여살려주겠지!"
현재 오토의 어머니인 에밀라 파이퍼는 전쟁으로 인하여 집을 잃거나 피해를 입은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복지시설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수녀원이나 기타 시설에서 이러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블라덱이 말을 이었다.
"익명으로 그년이 있는 수녀원에 돈을 기부하는걸세!! 전쟁 범죄 피해 복구를 위해서 기부한다고 하는거야! 내 통장에 돈이 꽤 있네. 절반을 내놓을테니 자네들도 조금씩만 보태게."
헬무트가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익명으로 한다고 안 걸릴 것 같나? 절대 안돼!! 허튼 짓 했다가 니 새끼 대갈통부터 박살내겠어!!"
헬무트는 완전 정신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만약 블라덱이 익명으로 기부를 한다고 하면 두들겨 패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블라덱이 외쳤다.
"내가 다 생각이 있네!! 오토의 어머니를 통해서 기부하면 되네!"
오토는 이 말에 입을 크게 벌렸다.
"어?"
"자네 어머니가 그 쪽 일을 하잖아! 오토 휴가갈때 돈을 모아서 주는걸세!"
오토는 이마에서 식은 땀을 흘렸다.
'왜 하필 내가?'
블라덱이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내가 이번에 뒤질뻔하고 느낀게 있네. 전쟁에서 뒤지더라도 최소한 죽기 전에 그 일은 바로 잡아야하네."
오토와 동기들은 자신들의 계좌에 있는 돈을 계산해보았다. 스테판이 속으로 생각했다.
'블라덱 저 녀석이 자기 돈을 내놓다니...'
게오르크가 말했다.
"이 정도면 치료비도 되고 5년 정도는 생활비로 쓸 수 있을걸세."
"한 번 하고 엄청난 돈을 받는군!"
"그년한테도 좋을걸세! 전쟁터에서 총맞고 뒤지는 것보단 한 번 고생하고 팔자핀거야!"
"창녀들은 그 짓거리하고 몇 푼 받지도 못하는데 잘된거지!"
그렇게 오토와 동기들은 애써 자기 자신을 위안했다. 헬무트조차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다들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괴롭기 짝이 없었던 것 이다. 오토는 이마에서 식은 땀을 흘렸다. 그 날 저녁, 오토의 소대원들은 양 손에 제리캔을 들고 와서는 연료를 주유했다.
"연료 냉각수 상태 점검 완료!!"
"가서 쉬게."
오토의 소대원들은 에너지바를 먹으며 8.8cm 대공포를 구경했다. 지금 슐레프 중대와 같이 있는 방공포병들은 에이스임이 분명했다. 8.8cm 대공포의 포방패에는 무수한 격파 표시가 있었던 것 이다.
포수 에밀 녀석이 말했다.
"우리가 쓰는 포랑 똑같은거다!"
"이게 원래 대공포였다니..."
마티아스가 물었다.
"이거 지금 대공 사격할 수 있는건가?"
대공포병이 말했다.
"대공 조준기 뜯어냈으니까 이 상태론 대공 사격은 불가능하지!"
요하네스가 말했다.
"근데 이거 루프트바페에서 빌린거 아닌가? 나중에 참새 새끼(루프트바페 비하하는 속어)들한테 돌려줘야 하는건가?"
대공포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놈들은 돌려달라고 하고 있지만 우리 군단장님이 안 돌려주고 있지!!"
마티아스는 군단 직할로 운용되고 있는 대공포병들을 부러워했다.
"저 녀석들은 좋겠다. 군단 직할로 운용되어서 군단장 빽도 있잖아!"
"우리 소대장님은 육군 참모 총장 아들인데 보급 같은 것도 더 안 해주나?"
"특혜가 있으면 안된다고 오히려 더 깐깐하게 구는 것 같네!"
"우리 부대도 군단 직할로 운용되면 좋겠다!"
전차병들은 모두 전차 옆에 해먹 등에서 널부러져서 잠을 자며 휴식을 취했다. 오토 또한 티거 측면에 설치된 해먹에서 눈을 붙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오토는 티거 내부로 들어가서 가족들이 보내준 편지를 꺼냈다. 하지만 내일 전투를 앞둔 터라 심장이 쿵쿵거려서 편지라 읽혀지지 않았다.
'젠장!! 커피 먹지 말걸!!'
오토는 티거 조종수 석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쿵 쿵 쿵 쿵
얼마 전에 헌병이 했던 말이 머리 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그 파르티잔은 현재 실어증에 걸려서 재판 과정이 중지되었다!!"
'빨리 자야지...하나...둘....셋...'
오토는 빨리 잠에 들기 위해서 머리 속에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헌병의 말이 다시 머리 속에서 떠올랐다.
"그 파르티잔은 현재 실어증에 걸려서 재판 과정이 중지되었다!!"
"...으윽...끄윽..."
엄청난 절망과 공포가 폐 깊은 곳에서부터 토해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바깥에 소대원들이 자고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칠 수도 없었다. 오토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걸레짝같이 더러운 담요로 입을 막았다.
"끅...끄윽...끄으윽..."
얼굴은 시뻘개졌고 충혈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머리 속에 헌병의 말이 떠올랐다.
"그 파르티잔은 현재 실어증에 걸려서 재판 과정이 중지되었다!!"
'그..그러게 왜 여자가 설친거야? 집에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오토는 애써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했다.
'그 년은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다간 총 맞아 뒤질 수도 있었어!! 지금쯤 수녀원에서 푹 쉬고 잘 자고 있겠지! 나도 내일 뒤질지 모르는데 누굴 걱정하는건가!! 싸울거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하지만 오토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군대가 쳐들어와서 자기 땅을 빼앗는다면 누가 안 싸우겠는가.
오토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검은색 군복과 그 군복에 달린 기사 십자 철십자장을 바라보았다. 오토는 그 훈장을 군복에서 쥐어뜯어냈다.
"으헉..으허억...으윽..."
지저분한 얼굴과 손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그건 내가 한게 아냐..다 페비틴 때문이야!! 망할 놈의 위생병들!! 그 새끼들이 나한테 페비틴을 처방해줬어!!'
군에서 페비틴을 보급하지 않았다면 오토와 동기들은 절대로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터였다.
오토는 여태까지 군대가 진격하면서 불에 타버린 수많은 오두막과 민가를 떠올렸다. 어떤 마을 주민들은 스탈린과 레닌이 누군지도 몰랐다. 아직도 러시아 황가가 통치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 노인들도 많았다.
오토는 소련이 독일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배웠다. 문득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군대가 진격하면서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그들을 피난가게 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국제 관계 따위는 지금 중요한게 아니었다. 오토는 그 날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런 짓거리를 저질렀나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원인은 뻔했다. 오토는 자신의 아버지 한스 파이퍼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 시발놈 때문에!!!!'
한스 파이퍼가 부하들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주먹을 날리지만 않았더라도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한스 파이퍼가 오토 자신을 때렸던 앙뚜완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주던 그건 이제 알바 아니었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데!!! 으아악!!!!!!'
오토는 한스 파이퍼와 독일 제국군과 독일 제국을 향해 엄청난 증오심을 느끼고는 애써 속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을 참았다. 머리 속에서는 계속해서 그 헌병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그 파르티잔은 현재 실어증에 걸려서 재판 과정이 중지되었다!!"
아까 치료소에서 봤던 깁스를 하고 있던 보병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오토는 그 보병이 미친듯이 부러웠다. 그 새끼랑 삶을 바꿀 수만 있다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새끼는 이제 사람 안 죽여도 되겠지? 좋겠다...'
다리가 불구가 된 그 녀석은 앞으로 경치 좋은 곳에 가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쓸 수 있을 것이었다. 사무직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을 것 이었다. 엿같은 전쟁은 오래 전 기억으로 남겨두고 남은 인생은 다채롭고 평화로울 것이 분명했다.
'으아아아악!!!!!!!!!!'
오토는 홀스터에서 루거 권총을 꺼내고 자신의 입 안에 집어넣었다.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이 좆같은 전쟁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토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루거 권총 또한 이빨 사이에서 달달 떨렸다.
'이..이대로 도망치면 안된다...'
어떻게던 그 여자한테 저지른 짓은 만회를 해야 했다. 동료들과 같이 모은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면 그 여자는 남은 삶을 이어갈 수도 있을 것 이었다. 오토는 루거 권총을 자신의 입에서 빼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은 전달해야 했다.
'이 돈만 있으면 그 여자는 50년 남은 인생은 잘 살 수 있을거야!! 이 일은 만회할 수 있어!!'
오토는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넣고 마음을 굳혔다.
'휴가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다...'
오토는 단 한번도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었지만 난생 처음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그 여자가 살아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던지 하겠습니다...제발 그 여자가 정신이 멀쩡해지고 앞으로라도 잘 살 수 있도록...'
오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기도를 하면서 죄책감이나 덜고 헛된 변명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돈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전투에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오토는 수통에 있는 물로 얼굴을 씻어내고는 전차의 해치를 열었다.
끼익
오토는 티거 옆에 걸려있는 해먹에 누워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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