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샤의 일기 + 30년 전쟁 외전
쿠구궁!! 쿠궁!!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포격 소리가 모스크바 전역에 울려 퍼졌다. 나타샤는 자신의 은신처에서 포격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쿠구궁!! 쿠과광!!!
'소리가 남쪽에서 들리는데? 독일군이 여기까지는 안 오려나?'
지금 남은 식량이라고는 투숑카 통조림 반 개와 약간의 비스킷이 전부였다.
'독일군이 점령하면 그 때 투항하자...난 어리고 귀여우니까 포로로 잡혀도 먹을 것도 받을 수 있을 거야.'
나사탸는 예전에 주웠던 독일군의 삐라를 다시 읽어 보았다.
[항복하면 독일 제국군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고 식량을 배급받는다. 또한 독일 제국의 시민이 될 기회가 주어질 것 이다. 이 종이는 통행증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래! 항복하고 독일에서 사는거야!'
나타샤는 어릴 때부터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국제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은 미국식으로 제국 연방 국세청을 설립하였고, 소비재에 제한적으로 국가 개입을 하며, 부정 부패를 단속하여 경제가 상당히 발전했다. 뿐만 아니라 고소득층이나 대기업에는 세금을 추가적으로 부과하였고, 이탈리아도 이런 독일식 체제를 도입하여 경제가 발전했다.
나타샤는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보다는 독일의 체제가 훨씬 발전되었다고 늘 생각했다. 집단 농장 같은건 수 많은 사람들을 기근으로 몰아넣은 야만적이기 짝이 없는 체제이며, 스탈린의 경제 정책 또한 인간을 부속품으로 간주하는 정책이라고 나타샤는 판단했던 것이다.
'난 공산주의의 부속품 따위가 아니란 말야...나도 독일인으로 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독일에서 살다가 이탈리아로 가끔 여행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타샤는 포격으로 인한 공포감을 잊기 위하여 독일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독일 가서 공부도 하고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 공연도 봐야지...'
우르릉 쿠릉 쿠르르릉
하지만 천둥이 치는 것 같은 포격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타샤의 어깨는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모스크바 여기저기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위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잉
모스크바 전역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메트로놈 소리 또한 들리고 있었다. 그 메트로놈은 평소의 3배 정도로 빠르게 똑딱거리고 있었다.
똑딱똑딱똑딱똑딱
이렇게 메트로놈이 빠르게 똑딱이는 것은, 모스크바 주민들에게 당장 지하실로 피신하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남서쪽에서 날아오는 독일군의 항공기들이 모스크바의 차가운 밤 공기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잉
라스푸티차 이전에 독일군의 항공기들이 모스크바 상공을 비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독일군 제트 전투기 He 280 의 제트 엔진이 내는 소리는 여태까지 루프트바페의 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타샤는 삐라와 남은 식량, 식수, 일기장을 챙겨들고는 1층으로 달음박질쳤다.
'설마 여기까지 폭격하진 않겠지!!!'
아군 항공기고 적군 항공기고 엉뚱한 곳에 폭탄 투하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어떻게던 최대한 지하로 가야 했다. 이 건물은 지하실이 없었기에 나타샤는 1층 마루 바닥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으아아...으아아아아...'
쿠궁!! 쿠구구궁!!
쿠과광!!!
그제서야 나타샤는 같이 있으면 든든했던 자신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크세니야...안나...류드밀라...다들 잘 있는거야?'
쿠과과광!!!
'꺄악!!!'
그리고 21세기 좀비 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독일에서 루카 파이퍼는 또 다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이것이 한스 파이퍼가 기만 작전을 위해 자신의 지문을 찍어 두었던 서류 가방입니다! 한스 파이퍼는 중부 집단군의 움직임을 속이기 위하여 인도 출신의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과 함께 RSA 암호 체계를 역으로 이용했던 것 입니다! 1940년 11월 그렇게 소련군이 모스크바 북동부에 전력을 집중한 틈을 타서 구데리안 기갑군은 모스크바 남쪽을 향해 대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다큐멘터리에는 한스 파이퍼가 지문을 찍어두었던 서류 가방과 라마누잔이 나왔다. 루카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음에도 흥미진진하게 다큐에 빠져들었다.
[이 당시 한스 파이퍼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습니다! 군 내부에서 전선을 축소하고 일부 기갑 병력을 후퇴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한스 파이퍼는 이러한 의견을 무시하고 공세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한스 파이퍼의 판단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습니다!
믿을만한 독일 정보 기관은 소련군에 예비대가 남아있지 않으며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데 최소 3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 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한스 파이퍼 또한 소련군이 신규 부대를 편성하여 반격을 할 때까지 최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 이라 보고를 올렸습니다! 과연 독일 정보 기관의 정보가 정확했을 것인가? 한스 파이퍼의 도박은 승리했을 것인가? 독일군은 1940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발을 디디는 것에 성공했을지, 아니면 나폴레옹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는지 다음 회에 밝혀집니다!!]
루카는 노트북을 끄고는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1940년 독소 전쟁 당시 민간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고, '나타샤'라는 이름의 소련 여군이 썼던 일기장에서 발췌한 내용도 있었다.
[아무래도 입대한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인 것 같다! 여기저기서 이가 들끓어서 참을 수가 없다! 목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음식 맛은 형편없다.]
루카는 이 글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루카는 여태까지 전쟁을 다룬 책과 참전자들의 솔직한 수기를 많이 읽어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띠꺼운 말투는 처음 보았다.
'이...이렇게 솔직하게 쓰다니...'
실제로 '나타샤의 일기' 라는 회고록은 상당히 유명한 책이었고 스테디셀러였다. 루카는 도서관에서 '나타샤의 일기' 를 빌려 보았다.
[내 동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몇몇 장교들조차도 글을 읽고 쓸줄 모른다고 한다! 진짜 다들 수준이 너무 낮은 것 같다! 그래도 정치 장교 블라슈크 동지는 잘생기고 멋있는 것 같다.]
[배급 받는 음식은 맛이 없지만 아주머니들이 나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셨다. 나같이 귀여운 소녀는 어딜가나 사랑받는 법이다.]
루카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할 말을 잃었다.
'....'
[나도 류드밀라처럼 사격 실력이 좋았으면 좋겠다. 내가 체구도 작고 힘이 약해서 부대에서 별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너무 피곤해서 일기를 쓸 힘도 나지 않는다...]
[류드밀라가 제일 좋은 총을 받았다. 나도 좋은 총을 받고 싶었는데 너무 억울하다. 다들 류드밀라만 이뻐한다.]
그 다음 챕터는 나타샤가 탈영을 하고 은신처에 숨어있을때 쓴 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너무 억울하다. 그 악마 같은 파블리첸코가 분명 나를 죽이겠다고 찾고 있을 것 이다.]
[나는 통행증을 갖고 있으니 항복하면 분명 독일 시민으로 받아줄 것 이다. 나는 아무래도 독일에서 사는게 더 어울릴 것 같다. 독일 제국은 복지 체제가 상당히 잘 되어있다고 들었다. 전쟁만 끝나면 독일에서 대학도 다녀야지.]
[식량이 다 떨어져가서 힘들다. 먹을 것을 훔쳐야 하는데 NKVD들의 감시가 너무 삼엄하다.]
[방금 전 NKVD가 이 곳을 수색하고 지나갔다! 마루바닥까지 뜯어서 확인하고 갔는데 너무 무섭다! 빨리 독일군이 왔으면 좋겠는데!!]
'나타샤의 일기'를 읽던 루카는 지루해져서 '30년 전쟁'에 관한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 선조도 30년 전쟁에 참전했을까?'
한스 파이퍼의 선조 중에 하나인 사무엘 파이퍼는 실제로 30년 전쟁에 참전했었다. 사무엘 파이퍼는 그 당시 23살이었음에도 직업을 못 구한 한심한 녀석이었다. 결국 부모님 등쌀에 사무엘은 친구 얀과 함께 란츠크네히트에 신병으로 들어갔다. 사무엘 파이퍼는 엄청나게 긴 장창을 바라보았다.
'저...저걸 들어야 한다고?'
사무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병인 사무엘과는 달리 어떤 녀석들은 갑옷과 투구로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부럽다!! 나도 갑옷이랑 투구 있으면 좋을텐데!!'
사무엘의 친구 얀 또한 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도 총 한 번만 쏴보고 싶다!!"
사무엘이 말했다.
"급료는 제 때 주겠지?"
지난 번에 사무엘과 얀은 같이 기술 교육을 받다가 봉급도 받지 못하고 제대로된 교육도 못 받고 쌩고생만 한 적이 있었다. 얀이 말했다.
"그건 걱정 말게! 급료가 미지급되면 병사 집회에서 이를 항의할걸세! 돌격 수당도 제대로 지급된다고 하더군!"
"돌격 수당?"
"꽤나 짭짤하다더군! 물론 우린 신병이니까 별로 기대하면 안되겠지만!"
사무엘과 얀은 정예병들, 이른바 도펠죌트러를 선망이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근데 고참병들은 제일 선두에 나서야하잖아! 그냥 봉급 적당히 받고 뒤에 있는게 나을걸세!"
도펠죌트러 고참병들이 츠바이헨더를 들고 있는 모습은 간지 그 자체였다. 그들은 마치 광대같이 화려한 퍼프가 들어간 옷을 입고 있었다. 도펠죌트러 고참병 뿐만 아니라 신병들도 레이스가 달리고 붉은색, 푸른색 등으로 장식된 슬래시 앤 퍼프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쉬츠라는 신병 또한 여기저기 퍼프가 달린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사무엘이 그 광경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요란한 옷을 입고 어떻게 싸운다는거야?'
얀 또한 쉬츠를 보고 수근거렸다.
"아주 요란하게도 입었네! 저렇게 요란하게 입은 녀석이 제일 먼저 죽을거야!"
사무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대에는 여성 일꾼들 또한 있었다. 이 여성 일꾼들 대다수는 부대 내 병사들의 부인이라고 했다. 물론 사무엘과 얀은 노총각이었기 때문에 아내가 없어서 모든 것을 혼자 챙겨야 했다.
사무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대충 2선에서 싸우면서 봉급이나 모아야지...'
그 때 팔츠 소대장이 걸어왔다. 사무엘, 얀, 쉬츠 모두 잔뜩 긴장했다.
'첫 훈련이다!'
팔츠 소대장이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신병들은 뒤에 배치되니 대충 해도 된다는 생각일 것 이다!!"
팔츠 소대장의 말에 사무엘은 뜨끔했다.
'히익!!'
팔츠 소대장이 사무엘의 앞으로 걸어왔다.
'왜 하필 내 앞으로 오는거야!!!'
팔츠 소대장이 사무엘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 장창보다는 할버드나 츠바이헨더를 들고 싸우고 싶어하겠지? 이 장창 따위보다 총 한 발의 위력이 더 강력하다고 생각하겠군! "
팔츠 소대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엄격하게 외쳤다.
"나는 제군들을 최고의 전사로 만들 것 이다!! 이 훈련을 마치고 나면 제군들은 이 장창을 손가락처럼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을 것 이다!! 그리고 이 장창은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이다!!"
그리고 숙련병이 신병들 앞에서 장창 시범을 보여주었다. 사무엘과 얀, 쉬츠 모두 이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숙련병은 엄청나게 긴 장창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와아...'
그리고 숙련병은 그 긴 장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팔츠 소대장이 외쳤다.
"올려!"
그러자 숙련병은 장창을 수직으로 들어올렸다.
"차렷!!"
숙련병은 장창의 끝을 오른발 옆으로 내려서 수직으로 고정시켰다.
"들어올려!! 돌아!! 준비!!"
숙련병은 능숙하게 장창을 다시 들어올리고 뒤로 돈 다음 앞으로 장창을 겨누었다. 팔츠 소대장이 외쳤다.
"내려 놔!!"
숙련병은 수직으로 서 있는 장창의 끝부분을 바닥에 닿게 하고는 천천히 기울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장창이 엄청나게 길기 때문에 내려 놓을때도 그냥 내려놓으면 안되고 천천히 걸어가며 내려놓아야 했다. 이렇게 숙련병은 천천히 기울인 장창의 끝을 들고 서서 대기했다. 팔츠 소대장이 다시 외쳤다.
"이동!!"
숙련병은 장창의 끝을 잡아서 장창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사무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 쉬운 것 같은데?'
그리고 사무엘과 신병들도 다같이 장창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올려! 차렷!! 들어올려!! 돌아!!! 준비!!!"
숙련병은 쉽게 했던 동작이지만 장창이 워낙 길었기에 동작 하나하나가 보통 어려운게 아니었다.
'으익!!'
'팔 아파!!!"
엉망진창으로 장창을 다루던 신병들은 모조리 기합을 받았다.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팔츠 소대장이 시뻘건 얼굴로 외쳤다.
"이런 기열 찐빠들을 봤나!!!"
고참병들이 이 광경을 보고 수근거렸다.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못하냐?"
"대형 짜는거 훈련하려면 10년은 걸리겠다!!!"
장창 훈련이 끝나고, 사무엘은 얀, 쉬츠와 함께 후들거리는 팔로 장창을 운반했다.
"으아아아..."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싸우냐?"
"조만간 2소대랑 실전 훈련도 한다던데..."
어쨋거나 고된 훈련을 마치고 첫 월급도 받았기에 사무엘은 동료들과 함께 근처에 술집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삼인방은 씻지도 않고 근처에 술집으로 향했다. 사무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드디어 란츠크네히트의 첫 훈련을 받았군!!'
비록 첫 훈련은 엉망진창으로 끝났음에도 일단 란츠크네히트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생겼다. 그렇게 사무엘 삼인방은 근처 술집으로 가서 자리에 앉고는 뚱뚱한 여주인에게 가서 외쳤다.
"맥주 한잔씩 주시오!!"
뚱뚱한 여주인은 사무엘 삼인방의 행색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맥주 다 떨어졌어요!! 다른 곳 가세요!!"
"다 떨어졌다고?"
그 때, 다른 테이블에서 도펠죌트너가 맥주를 주문했다.
"여기 맥주 다섯 잔 더 주시오!!"
"네!!"
이걸 보고 쉬츠가 뚱뚱한 여주인에게 따졌다.
"맥주 다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소?"
뚱뚱한 여주인은 맥주 다섯 잔을 모조리 한 번에 서빙하고는 쉬츠에게 외쳤다.
"없다면 없는거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 빨리 나가세요!"
사무엘이 외쳤다.
"이봐!! 우리도 돈이 있다고!!"
뚱뚱한 여주인이 외쳤다.
"돈 있다고 하고 도망가는 녀석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무슨! 다른 술집으로 가세요!!"
열심히 맥주를 서빙하는 뚱뚱한 여주인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도펠죌트너 고참들이 사무엘 일행에게 외쳤다.
"자네들에겐 안 팔겠다잖아!!"
한 도펠죌트너 고참이 쉬츠의 풍성한 복장을 보고 외쳤다.
"그런 복장은 우리 같은 고참들이나 하는거라고!"
"저 녀석들 부대는 군기가 빠졌네!"
그렇게 사무엘 삼인방은 술집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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