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가방
오토 일행은 민가 이곳저곳을 수색한 다음, 주인 아주머니에게 러시아어로 물었다.
"여기는 총 몇 명이 살고 있습니까?"
아주머니가 벌벌 떨며 말했다.
"남편은 전쟁터에 나갔고 3층에 남자 하숙생이 하나 살고 있어요."
"하숙생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20대 초반 정도 되었을거에요."
데니스가 씨부렸다.
"20대인데 아직도 전쟁 안 끌려갔다니 팔자 좋은 새끼군!"
오토가 속으로 생각했다.
'20대 초반에 징병이 안되었다니 수상하군...'
"그 하숙생은 지금 어디있습니까?"
"아까 밖으로 나갔어요."
오토는 3층 건물인 이 민가의 지붕 위로 올라가 보았다. 비르타넨이 말했다.
"여기서는 지휘소가 한눈에 보이네요."
이 민가의 지붕 위에서는 현재 만토이펠 대대가 쓰고 있는 임시 지휘소와 인근에서 주요 방어 거점으로 쓰이는 건물을 모조리 관찰할 수 있었다. 오토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휘소 위치를 잘못 잡은 것 같군...'
폴스터가 주인 아주머니를 2층에 데려가서 감시하고, 비르타넨이 망을 보기로 했다. 오토는 데니스와 함께 그 하숙생이 묵는다는 방으로 들어갔다.
데니스가 방을 수색하려고 하자 오토가 제지했다.
"잠깐만. 흔적을 남기면 안되네."
오토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노트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낸 다음, 이 종이를 길게 접었다. 데니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걸로 뭘 하려는거지?'
오토는 이 종이를 이용하여 책상에 있는 노트의 꼭지점과 책상 모서리까지의 거리를 확인하고 종이에 연필로 표시했다. 그리고 오토는 조심스럽게 노트를 들어서 펼쳐보았다.
'공학 수학이군...'
공학 수학 외에 다른 내용은 전혀 없어 보였다.
'평범한 대학생들이 쓸법한 노트군...'
오토는 노트를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정확히 올려놓았다. 아까 전에 노트의 원위치와 책상 모서리까지의 거리를 종이에 표시해두었기 때문에, 노트가 놓여있던 원위치에 그대로 둘 수 있었다.
오토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전공과목 책들 밖에 없군...'
전공과목 서적들과 문학책들은 전부 제목이 보이는 방향으로 꽂혀있었다. 그런데 한 책만이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거꾸로 꽂혀있었다. 오토는 조심스럽게 그 책을 꺼내보았다. 레프 트로츠키의 '나의 생애'였다.
데니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공산주의자군요."
"이것 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네."
오토는 이 하숙생 방의 휴지통을 뒤져보았다. 구겨진 종이를 펼쳐보니 그리다만 사각형이 몇 개 나왔다. 오토가 데니스에게 이 종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이 근처 건물들을 표시한 것 같지 않나?"
"그...그런 것 같습니다!"
잠시 뒤, 소련 하숙생 포노마레프는 자신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왠일로 주인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안 계시네?'
포노마레프는 3층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다음 침대에 누워서 방구를 꾸었다.
부릉 부르르릉 부릉
침대 밑에 숨어있던 데니스는 코를 막았다.
'으익!!!'
그렇게 포노마레프는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다가 책상에 가서 앉은 다음 노트를 넘기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옷장 속에서 오토는 발터 권총을 들고는 귀를 기울였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계속해서 들렸다.
'공부하는건가?'
포노마레프는 계속해서 책상에만 앉아 있었다. 오토는 시간이 지체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지금 나가서 두들겨패고 족쳐?'
지금쯤 슐레프 중대장은 오토가 어디갔냐고 노발대발했을 것이 분명했다. 포노마레프는 다시 방구를 뀌었다.
부르릉 부릉 부르릉
'으익!! 시발!!!'
포노마레프는 계속해서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포격 소리가 들렸다.
쿠궁!! 쿠과광!!
데니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전쟁통에 공부냐!!'
1시간 정도 공부를 하던 포노마레프는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데니스와 오토는 1분 정도를 기다렸다. 그리고 데니스와 오토는 잽싸게 기어 나와서는 포노마레프의 책상 위를 살폈다. 포노마레프의 노트에는 공학 수학 공식이 잔뜩 적혀 있었다.
'그냥 공부만 한 것 같은데요?'
'헛고생한건가?'
오토와 데니스는 방 밖으로 나간 다음,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참고로 아까 전에 오토와 데니스는 군화를 벗어두고 맨발이었기 때문에 걸어갈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토는 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붕으로 올라간다! 만약 놈이 우리쪽 지휘소를 감시하고 있다면 지붕에 있을 것 이다!'
오토는 계단 한 칸을 올라갔다. 맨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단이 삐그덕거렸다.
'!!!'
오토가 수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올라간다...'
밖에서는 상당히 규칙적으로 포격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오토와 데니스는 포격 소리에 맞춰 한 발자국씩 계단을 올라갔다.
쿠궁!! 쿠과광!! 쿠궁!!!
지붕에 올라가보니, 포노마레프는 굴뚝 뒤에 숨어서 인근을 정찰하고 종이에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오토는 권총으로 포노마레프의 대가리를 겨누었다.
"손 내려."
그렇게 오토 일행은 포노마레프를 잡아서 대대 지휘소로 데려갔다. 만토이펠이 직접 포노마레프를 후드려패며 심문했다.
퍽!! 퍼억!! 퍽!!!
오토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새끼 말고도 다른 민간인들도 정보를 빼돌렸을 것 이다...언제 소련군이 사보타주하러 올지 알 수 없다...'
오토는 데니스, 바실리, 비르타넨, 폴스터와 함께 인근을 정찰했다. 오토는 지난 번에 노획한 톰슨 기관단총을 들었고, 폴스터는 스텐 기관단총을 들었고 나머지는 소총을 들었다. 오토가 폴스터에게 말했다.
"탄을 아껴서 써야하네!"
폴스터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똥총이라 총알 제대로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지금 다행히도 만토이펠 대대의 기동불가된 티거 전차들이 주요 길목을 막고 있어서 소련군의 차량이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소련군 공병들이 티거 전차 밑에 폭약을 설치하고 폭발을 시도했지만, 티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소련군 공병들은 티거를 폭파시키는 것이 빠를지, 아니면 새 길을 만드는 것이 빠를지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고 있었다.
비록 티거가 주요 길목을 막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만토이펠 대대에게 약간의 시간을 벌어준 것일 뿐이었다. 여전히 곳곳에서 총성이 들리고 있었다.
탕!! 타앙!! 탕!! 타앙!!!
오토 일행은 소련군이 침투해오기 가장 쉬워보이는 구역을 정찰했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콘크리트 파편이 군홧발에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토 일행은 사방을 은밀하게 살피며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오토는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포격으로 난장판이 되었기에 은엄폐할 수 있는 곳이 상당히 많았다. 오토는 커다란 버스 옆에 몸을 붙이고 수신호를 보냈다.
'이 쪽으로!!'
비르타넨, 데니스, 폴스터가 잽싸게 달려왔다. 오토는 빼꼼 고개를 내밀고 부서진 버스 유리창을 통해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기서부터 더 앞으로 가면 소련군 점령 구역이었다.
'현재까지는 아무 이상 없음.'
버스 안에서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찍찍
'으익!!!'
오토는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는 버스 내부를 바라보았다.
'저...저거!!!'
버스 안에서 쥐들이 시체를 물어뜯고 있었다. 오토는 엄청나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오토는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일행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돌아간다!'
그렇게 오토 일행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배고파 죽겠네...'
사실 다들 이번 정찰을 하면서 식량이나 무기를 운 좋게 노획하기를 기대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 뒤질 것 같았다. 오토는 혹시 통조림이라도 주울 수 있을까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폴스터 녀석이 콘크리트 파편 밑에서 가죽 가방을 하나 발견했다. 데니스가 말했다.
"거기 뭐 있냐?"
폴스터가 가죽 가방을 열어보았지만 말끔하게 비어있었다. 데니스가 투덜거렸다.
"안 털렸을리가 없지..."
폴스터는 빈 가방을 챙겼고 오토가 말했다.
"잡낭은 충분한데 그건 왜 챙기나?"
폴스터가 말했다.
"이걸 끓여서 가죽 젤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이 가방으로 젤리를 만든다고?"
"네! 꽤 먹을만하다고 합니다! 악!!!"
오토가 폴스터의 대가리를 쳤다.
"먹고 뒤지고 싶냐!!"
오토 일행은 두 외벽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여기저기 기둥만 남은 건물 1층으로 들어갔다. 그 때, 바실리가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시발!!!"
구석에는 포격으로 죽은 민간인의 시체가 있었고 시체의 복부 쪽에서 수십 마리의 쥐 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데니스가 말했다.
"아주 잔치를 벌이는군..."
수십 마리의 쥐들은 시체의 내장을 뜯어먹고 있었다. 비르타넨이 말했다.
"맛있을까요?"
오토가 말했다.
"으웩! 빨리 가자!"
오토가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비르타넨은 여전히 공허한 표정으로 그 시체를 보고 있었다. 오토가 비르타넨에게 말했다.
"장티푸스 감염되고 싶냐. 빨리 따라와."
비르타넨은 결국 오토 일행을 따라갔다. 데니스가 바실리에게 물었다.
"장티푸스 균은 열 가하면 죽냐??"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그냥 궁금해서 그러네."
오토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데니스가 말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시야가 흐려지고 관절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진짜 죽겠습니다."
오토는 걸음을 멈추었다. 300m 쯤 떨어진 곳에서 계속해서 총소리와 박격포 소리가 들렸다.
탕! 타앙!
쉿!! 쉬잇!!!
오토가 데니스에게 말했다.
"그래서 뭐 시체라도 먹자는거냐? 조만간 항공 보급이 올테니 기다리게!"
하지만 항공 보급이 오기 힘들거라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오토 일행은 만토이펠 대대 임시 대피소로 돌아갔다.
이 시각, 한스는 일본과 소련의 휴전 협정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받았다. 관동군은 후퇴하기 전에 열차포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완전히 아작을 내둔 상태였다. 그렇게 시베리아 철도를 아작낸 직후, 관동군은 후퇴를 하고 방어 태세로 전환한 다음, 소련과 휴전 협정을 맺은 것 이었다.
한스는 이걸 보고 씨익 웃었다.
'이 정도면 됐다! 일본놈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했군!!!'
일본군은 소련군이 시베리아 철도를 쉽게 복구하지 못하도록 콘크리트 쐐기를 잔뜩 설치해두었다.
'일본놈은 일처리가 꼼꼼하군...'
일본군이 극동에서 더 버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시베리아 철도를 끊어준 덕분에 소련의 보급이 지체될 것 이었다.
'앞으로 로스케들은 북해로 보급을 받으려나? 아니다...로스케 놈들은 생각보다 빨리 철도를 복구할 수도 있다...어쨋건 2~3주의 시간을 우리에게 벌어주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북해 쪽에는 카이저마리네가 있으니 로스케 놈들도 쉽게 북해로 보급을 받지는 못하겠지...'
한스는 국제 동향에 대해 다른 서류들 또한 읽어보았다. 1930년대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인종차별 금지법을 시행하고, 식민지에 자치권 및 자립권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서방과 일본의 식민지에서는 자치권과 자립권을 획득하기 위해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하여 서방과 일본에서는 정치적으로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한스는 이 또한 기뻐했다.
'망할 서방 새끼들...지금 물건 팔아먹느라 아주 신났지? 엿이나 먹어봐라.'
현재 모스크바강 이남쪽은 1/3 정도 독일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한스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모형 지도를 바라보다가 2기갑군 사령부 밖으로 나왔다.
2기갑군 사령부에서는 러시아 여자들이 봉급을 받고 잡다한 일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 여자들은 한스 파이퍼를 보고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야. 한스 파이퍼."
한스는 장교 식당으로 가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스는 러시아 여자들을 바라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스파이인가?'
러시아 여자들은 공포에 질려서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한스는 장교들에게 보안을 철저히 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장교 식당으로 떠났다. 그제서야 러시아 여자들은 안심했다.
"생각보다 너무 평범한데?"
이바노바가 수근거렸다.
"아까 말하는거 봤어? 성격도 소심해보여!"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장성이 된거지?"
"싸우는건 생긴거랑 상관이 없나?"
러시아 여자들이 빨랫감을 들고 걸어가다가, 키 190센치를 넘는 거구의 슈코르체니와 마주쳤다. 슈코르체니는 체중이 100kg이 넘었고 얼굴에는 흉터가 있었다. 슈코르체니가 악당 같은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러시아 여자들은 빨랫감을 모조리 떨어트렸다.
"꺄악!!!"
슈코르체니는 러시아 여자들에게 사과를 하고는 하이에와 함께 2기갑군 사령부로 걸어갔다.
"왜 놀란거지?"
솔직히 키 190센치가 넘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슈코르체니를 보면 그 누구라도 놀랄 것이었다. 잠시 뒤, 한스 파이퍼가 식사를 마치고 사령부로 돌아왔고 슈코르체니는 한스 파이퍼에게 경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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