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의 검객
그의 애첩 양씨 부인이었다.
"자네가 여기까지 웬일인가! 이 밤에."
"대감이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으시니 어쩝니까. 저라도 찾아 나서야지요."
"그래그래. 안 그래도 내 곧 집에 들어가려는 참이었는데, 있다가 같이 돌아감세."
김 좌근의 목소리도 함께 맞추어 살랑거리고 있었다.
"대감, 그 보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다니까요."
"그래 뭔가? 그 일이."
"아니, 대감의 누님 말씀이에요. 내가 이번에 대비마마를 위해서 크게 한 번 인심 쓰기로 한 거 있잖아요!"
"그래그래, 그래서 쌀은 이미 준비를 해 놓았으니, 그것은 걱정을 안 해도 되네."
"그런데 요즘, 대감의 누님이 좀 이상하잖아요. 이번에도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내게 시키는데,
어쩝니까! 일단은 네네 하고, 장단은 맞춰드려야 하는 것 아니우!"
"무슨 일을 시켰다고 이렇게 화가 나셨는가?"
"세상에, 물고기에게 공양을 하는 것 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 물고기들을 다 잡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진정한 공덕으로 돌아온다고 하잖우!
그런 게 어딨데요? 세상에."
"아, 그런가? 그런 거 까지는 원래 하지 않는 일인 게야?"
"뻔하죠. 쌀이 아까운 생각이 드니까, 그 대신 굶주린 백성들한테 고기라도 다 잡아서 먹이라는 것 아니겠쑤!"
김 좌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 누님이 그러셨군."
"아니, 누님은 원래가 백성들을 막 살피고 그런 성격이 아니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신데요? 그리고 왜 그렇게 내가 못 마땅 하시대요?
이렇게 애를 써줘도, 아직 까지도 사람대접을 하지 않는 것 좀 보라구요!"
"그러게, 누님께는 왜 자꾸 들리는가! 이제 가지 마시게."
"내가 뭐, 나 좋자구 가는 겐가? 다 대감을 위해서 내가 이리도 애를 쓰는 게지요."
"알지 알지 자네 마음. 일단 누님이 그렇게 얘기를 하셨다면,
내일 당장 한강의 물고기를 잡을 인부와 배를 알아보도록 하겠네.
밤바람이 차네. 자네는 어서어서 방에 가서 몸 좀 녹이고 기다리고 있게.
나는 여기 아우와 조카들과 함께, 나누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고 얼른 내려가도록 하겠네."
"알았쑤. 그럼 얼른 끝내고 내려오시어요 대감."
여인의 간드러지는 말소리에 웃음 짓던 김 좌근이, 돌아서 가는 여인의 풍성한 엉덩이 선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 허, 형님!"
멋쩍은 표정을 짓던 김 좌근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다시 무거운 안색을 띠었다.
"아무래도 누님이 우리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
"하지만, 이런 흉년에 물고기 공양이라니. 좀 과하긴 합니다 형님.
어쩌면 누님이 저리라도 일을 시키신 건, 형님께서 백성들에게 원성이라도 덜 듣게 하려고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지붕위의 그들에게도 고충이 밀려온 것 같았다.
"사부님. 다리가 저려서.. 좀 펼쳐야 ..."
"누구냐!!"
지붕의 기왓장이 살짝 밀리는 소리가 결국은 김 병기의 귀를 자극하고 말았다.
누각 아래의 이들이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지붕위로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원범아, 일어 나거라. 빨리 나가자!"
하지만 그들이 지붕위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는 모습을, 이미 누각 밖으로 나와 있는 김 병기가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김 병기의 눈에 들어온 그들의 모습은,
검은 옷과 검은 복면을 두른 채 눈알만 빼꼼하게 드러내 놓은, 서투른 자객 같은 인간 둘이었다.
"큰일 났다. 저 놈도 기술 꽤나 쓸 줄 아는 놈인데,
여차하면 내가 저 놈 다리라도 물고 뜯고 있을 테니, 넌 꼭 튀어야 해. 알았냐!"
"싫습니다 사부님. 같이 튀어야 합니다.
아니, 같이 붙으세요! 사부님도 기술 꽤나 되시잖아요!"
"이 놈아, 세월 비켜가는 사람이 어딨느냐.
나는 이제 아재 무술이 다 되었거늘, 저런 사람은 못 당한다!
튀는 게 상책이야."
지붕아래에 있던 김 병기가 위의 두 인간을 향해 왼손 집게손가락을 세워 까닥였다.
오른손에는 긴 장검을 꺼내들고 잔뜩 거만한 표정으로 서서, 손가락 하나로 그의 앞으로 내려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 같으면 죽을 자리로 찾아 가겠나. 원범아 튀어라!"
노 상추의 작은 웅얼거림에 맞추어, 두 그림자가 가볍게 몸을 날려 누각의 지붕 위를 뛰어 날아오른 후,
이어진 다른 전각들의 지붕 위를 재주 좋게 이어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김 병기의 발은 참 재빨랐다.
지붕위의 목표물이, 결국은 더 이상 지붕이 없는 끝으로 다다를 때까지 놓치지 않고 함께 달려왔다.
이윽고 멈춰 선 걸음은, 다시 한 번 왼손을 올려 내려오라는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저게, 그냥!"
노 상추가 조금 약이 오른 것 같았다.
"별장 이라면서, 마당이 왜 이리 넓은 거야! 어쨌든 시간을 벌 테니, 원범아 넌 제발 튀어라!"
상추가 빠르게 몇 마디를 남긴 후, 허공위로 멋있게 한 발을 차고 뛰어 올랐다.
허공에서 한번 뒹구르 돌고난 몸은 가볍게 김 병기의 앞으로 우뚝 내려섰고, 그 또한 거만하게 적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작 둘이서 여기를 벗어나겠다고?
들어 올 때는 네 놈들 마음이겠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안 될 거라는 말, 많이 듣지 않았나? "
"아니, 많이 해봤다."
"딱한 놈. 끝까지 자존심을 챙기겠다? 여봐라!"
'... 이런 제길...!'
저기 있는 한 놈이 문제가 아니었다.
구석구석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무리들이 그의 언성을 듣고 순식간에 모여들고 있었다.
놀라기는 지붕위의 원범도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도 상추의 손짓은, 지붕위의 원범을 향해 부지런히 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는 원범이었다.
망설임 없이 허공을 치달아 그의 옆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언제쯤 말 좀 들을래!"
"일단 나가고 나서 얘기해요 사부님."
"저놈들 수가 너무 많다. 상황보고 싸우지 말고 그냥 뛰어. 대문으로!"
"대문이 막혔어요."
"그럼 뛰어 넘어!"
"적들이 많아서, 치달을 거리가 부족해요 사부님."
"자, 이거."
"아, 이전에 말씀 하셨던 당김 밧줄이네요."
그들을 에워싼 무리들의 눈알이 짐승떼처럼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이제 곧 주인의 명령만 떨어지면 , 달라들어 잡아먹고야 말 기세였다.
"세 번 만에 대문 담 쪽으로 던져라. 알겠느냐?"
"네. 사부님!"
그들의 조근거리는 이야기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그들의 칼에 베어나갈 이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한 밧줄에 둘이 매달려야 한다.
넌 '초상비' 단계까지는 훈련이 되어 있으니, 밧줄을 너무 믿지 말고
몸을 가볍게 해서 밧줄이 던져진 방향으로 네 기운을 모두 실어야 한다. 명심해라! "
"네 사부님!"
"자...! 하나, 둘. 이얍...!"
상추의 거센 기합소리가 조금 더 세게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했던 원범과 상추의 행동에, 짐승같은 자들 또한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상추의 기합소리에 맞추어, 원범의 몸이 허공위로 날아오르고,
허공에서 몇 번의 발을 구르던 원범의 몸이, 다행히 먼 거리의 대문 위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원범도 얼추 느낌은 들었다.
둘이서 함께 넘어가기엔, 대문까지 너무 먼 거리였다.
역시 대문을 뛰어 넘어온 건 혼자였다.
상추가 밀어준 힘과, 원범이 밧줄을 따라 '초상비' 경지의 힘을 이용해서,
혼자는 무사히 대문을 넘어 올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밧줄은, 이전에 사부가 자랑하던 당김 밧줄이 아니라 그냥 밧줄인 듯 했다.
대문 밖으로 얼떨결에 떨어져 서있던 원범의 귀에,
금방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듯한 안쪽 마당에서의 싸움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부님!"
떨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간신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 놈이 밖으로 나갔다. 얼른 잡아라!"
그의 뒤로 거칠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흐릿한 그의 눈앞으로, 유령과 같은 형상이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형상은 아무 말도 없었다. 깍듯하게 숙인 목례로 모든 걸 대신했다.
"백... 선... 형님!"
"잡아라!"
대문 안에서 우르르 밀려오는 짐승 떼 같은 소리를 힐끔 쳐다보던 백 선이, 허리춤에서 검은 두건을 꺼내어 머리에 눌러썼다.
이내 원범의 곁을 스쳐 달려가는 백 선의 걸음은, 인간의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고 날렵했다.
대문 앞에서 마주한 무리들을 해결하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범의 눈 앞으로 떨어진 가을 낙엽 하나가 맴을 돌고 바닥으로 내려 앉기도 전,
빠르고 가뿐하게 무리들을 쓰러뜨린 백 선이, 어느새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또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백 선을 맞는 소리가 다급하게 일어나는 듯 했다.
'챙-챙-'
대문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멈추는 데에도, 시간은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조용한 공기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이 어둠속에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끄는 묘한 발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김 병기 였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다급하게 달려온 듯, 숨이 차고 애가 타는 듯한 김 수근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문 안쪽에서는 무리들을 모두 쓰러뜨린 백 선이, 노 상추와 함께 김 병기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간혹 , 노 상추가 그와 함께 서 있는 이 복면의 검객을 힐끔 거리며 쳐다보았다.
이내, 여전히 숨은 찬 모양 이었지만, 조금 더 느긋한 투의 김 좌근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복면을 한 걸 보니,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닌 듯하이!
차라리 이 참에, 우리와 뜻을 함께 해 볼 생각은 없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시국에 우리 편에 줄을 서는 것보다 더 옳은 결정이 있겠나!
자네들의 무술실력을 높이 사서, 내 자네들을 특별히 더 귀하게 여기도록 하겠네."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복면의 사내들은, 그의 이야기를 전혀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백 선을 바라보는 김 병기의 눈빛이 여전히 예사롭지 않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신음소리 하나 들려주지 않는 적들에게 기대를 꺽은 김 좌근이, 옆에 함께 선 김 병학과 김 병국을 향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추어, 그 둘도 잡고 있던 검 집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바닥에서는 쓰러진 무리들이 웅얼거리는 신음소리가, 긴장감 속에 간간히 끼어 들고 있었다.
죽지 않을 만큼 급소를 공격당한 무리들이, 하나 둘 정신이 들며 신음을 내뱉는 소리였다.
백 선의 곁에 선 노 상추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몇 군데 옷이 찢어지고 검은 옷의 색이 짙게 물든 것으로 보아, 노 상추도 적지 않게 칼을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드디어,
김 병기의 외마디 기합소리가 이어 지고,
걷어낸 검 집을 내 던진 병학과 병국도, 복면의 남자들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초상비(草上飛)- 풀잎 위를 밟으며 날아가듯 내달리는 수준으로, 경공에 막 입문해서 몸을 가볍게 달릴 수 있는 단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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